해방촌에는 108계단이 있다고 했다. 용산고등학교 뒤편, 후암동 옛 종점에서 남산의 남쪽으로 오르는 언덕에 놓인 긴 계단을 그렇게 일렀다. 세어 보지는 않았지만 단이 108개라서 108계단이라고 했을 것이다. 108이란 숫자가 불교와 관련된 무언가가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다. 처음 듣는 이들은 마음속에 번뇌를 준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해방촌이란 이름은 ‘일제로부터 해방됨’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계단을 오르고 나면 사실이 아님을 알게 된다. 왜 그럴까?
비탈계단 옆으로 나 있는 골목길은 해방촌으로 오르는 중심 도로다. 꼬불꼬불하거니와 경사가 급해 마을버스조차 힘겹게 다닌다. 다니기 만만치 않은 좁은 이 길은 본래 남산에서 내려오는 물길이었다고 한다. 도로가 된 뒤 양편에는 꽤나 높은 3~4층의 상가주택들이 병풍처럼 서서 골목을 만들었다. 한 20여 년 전, 막내 여동생이 여기서 신혼살림을 시작했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변한 게 별로 없다.
길은 변했지만 시장은 남아 60년대를 추억
도로를 따라 해방촌 언덕을 거의 다 올라갈 즈음에 ‘남산타워’(N서울타워)가 골목 사이로 들어온다. 밤이 되면 골목의 오래된 건물, 얽힌 케이블들 사이에 나타나는 엔서울타워는 공기의 청정도에 따라 오색으로 불빛을 뿜으며 해방촌의 나이를 끌어올리기도 한다.
그런 도로변에서 보면 시장이 있는지 없는지조차 알 수 없지만 작은 게이트 같은 문 안을 들여다보면 60년대풍의 시장이, 수몰지구 이주마을 민속박물관처럼 들어앉아 녹슨 세월처럼 처연하다. 낮에도 알전구 노란 전깃불이 천장에 매달리고 그 아래 빈 평상들은 ‘신흥하던 시절의 좌판’이 이제는 유물이 되었음을 보여 준다. 이름이 ‘신흥시장’이었으니 한때는 여기저기 좋은 물건을 고르고 값을 깎는 흥정의 왁자지껄한 모습이 홀로그램처럼 스쳐간다. 이런 해방촌에 우리 문학사의 전무후무한 리얼리즘 문학이 태어났다. 우리가 어렸을 때 라디오방송의 가십 프로그램 이름이기도 했던 <오발탄>(1959)이란 소설이다. 해방촌(용산동 2가, 신흥동)을 무대로 한 소설 <오발탄>은 월남민 가족의 삶을 통해 전쟁과 분단의 비극을 보여 주고, 전후의 황폐한 상황을 예리하게 묘사했다. 주인공 철호는 누구보다 성실하게 살고자 했지만, 동생의 구속과 아내의 죽음은 철호를 절망에 빠뜨린다. 잘못 발사된 ‘오발탄’처럼 세상에 순응하지 못하는 철호의 모습은 부조리한 현실 속 방향타 없는 민중의 삶을 대변한다.
학촌 이범선(1920~1981)이 쓴 이 소설은 유현목 감독에 의해 같은 이름의 영화 ‘오발탄’(1961)으로 제작됐는데, 지금까지도 리얼리즘 영화로 남아 있다. 영화에서, 그리고 소설에서, 아니 현실에서, 주인공인 ‘철호’는 6·25 때 월남한 가족의 가장이다. 그는 한국전쟁 때 용산 일대가 폭격으로 지옥처럼 무너져나가는 것을 보았다. 그때의 충격으로 정신이상이 된 홀어머니와 음대 출신의 아내, 군에서 제대한 지 2년이 넘도록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동생 영호, 그리고 양공주가 된 여동생 명숙 등과 함께 그가 해방촌에서 살아가는 이야기를 그렸지만, 소설은 모두 판매 금지되고 영화는 상영 금지되기도 했다.
이 소설과 영화에서 보듯이 해방촌 사람들은 거의 평안북도 선천에서 월남한 서북인들이다. 그들은 대부분 기독교 신자로 이곳에 학교와 교회를 지었으며, 이것들은 대개 자신들의 고향에서 가져왔다. 앞서 보았던 신흥시장에서 나와 해방촌 언덕 위 남쪽으로 가면서 보이는 해방교회, 해방성당, 신흥교회가 그것들이고, 보성여중고, 숭실중고(1975년 은평구 신사동으로 이전)도 그들이 중심이 되어 세운 학교이다.
해방촌의 변화 이끄는 ‘빈가게 빈집운동’
영락교회가 주선해 월남한 서북인들이 정착했다고 알려진 이 마을에서 사람들은 편물과 염색일을 주요 생활수단을 삼았다고 한다. 60~70년대에는 남대문시장에서 거래되는 편물 80%를 생산했을 정도로 번성했다고 전해오는 해방촌은 이제 새로운 세대가 주도하는 ‘빈가게 빈집운동’이 한창이다.
이 운동과 함께 용산동2가 주민센터 앞 ‘해방촌5거리’를 중심으로 들어선 카페와 갤러리들을 이용하는 노란머리, 진황색 얼굴을 한 사람들이 이 후암동 쪽 내리막길에서도, 경리단 쪽 급경사도로 가에서도, 그리고 이태원 한남동길 방향에서도 자주 눈에 띈다.
그러나 108계단 길에서는 조금 다르다. 여전히 수십 년을 살아온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음을 본다. 왜 그럴까? 108계단은 일본 제국주의가 자국의 군인이 전쟁에서 죽으면 추모하기 위해 지은 신사로 오르는 진입로였다. 이른바 ‘경성호국신사’로 일본이 만주전쟁과 태평양전쟁에서 죽은 군인들을 위해서 본국의 야스쿠니 대신 지은 이른바 쇼콘샤(초혼사)이다. 1939년에 일제가 계획을 세워 1943년에 완공했지만, 패전 탓에 죽은 자들을 한 번도 합장하지 못했다. 그 자리에는 앞서의 보성여중고, 숭실중고 등이 들어왔으니 108계단만 그 사실을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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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5일치 김란기의 서울 골목길 탐방 원고 중 끝부분 ‘원효대교’는 ‘동작대교’, ‘원효대로’는 ‘동작대로’의 오기이므로 바로잡습니다.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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