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 열사의 영정을 안고 오열하는 이소선 어머니의 사진. 전태일기념관 상설전시실에 걸려 있다.
부산에서 동두천까지 전국 찾아가고
100여년 전 역사적 현장을 돌아보며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여기, 이곳’은
잊고 있던 사건·사람이 만든 길 위” 강조
노동자의 어머니 이소선 활동 살펴보며
“하나가 되자”는 메시지에 귀 기울이고
‘용산참사때 철거민 인권 문제’ 되짚은 뒤
“비극 재현 안 되게 마음에 새겨야” 제안
‘상처는 언젠가 말을 한다.’
인권운동가 박래군 4·16재단 상임이사가 최근 펴낸 책의 제목이다. 박 상임이사는 ‘인권운동가 박래군의 한국 현대사 인권기행 2’라는 부제가 붙은 <상처는 언젠가 말을 한다>(도서출판 클)에서 우리나라 주요한 인권 현장이 전하는 ‘목소리’에 귀 기울이자고 말한다.
이 책은 2020년 나온 ‘인권기행 1’ <우리에겐 기억할 것이 있다>의 후속편이다. 제목을 비교해 살펴보면, <상처는…> 쪽에서 더욱 간절함이 느껴진다. 아마도 우리 사회가 점점 더 ‘상처를 되돌아보지 않으려는 경향’을 강하게 보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제주 4·3, 광주 5·18, 세월호 참사 현장, 서대문형무소, 남산과 남영동 고문실, 소록도와 마석 모란공원 등을 다룬 1편처럼 이번에도 그는 형제복지원 사건이 있었던 부산에서 미군 기지촌 여성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경기도 동두천까지 전국을 훑는다. 그러나 <상처는…>은 용산참사 등 비교적 최근에 벌어졌던 사건뿐 아니라, 동학농민혁명이나 천주교 순교 장소 등 100년이 훨씬 지난 장소나,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터 등 ‘역사 속의 현장’도 살펴보고 있다. 이는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여기, 이곳’이 다름 아닌 “우리가 잊고 있었던 사건과 사람들이 애써 만들어놓은 길 위”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읽힌다.
그가 다녀온 인권 현장 중에는 서울의 여러 곳도 포함돼 있다. 전태일 열사의 모친 ‘이소선 어머니’가 활동하던 청계천·구로·창신동, 2009년 1월20일 경찰의 무리한 진압으로 철거민 5명과 경찰 특공대원 1명이 사망한 ‘용산참사’ 현장, 그리고 1866년 병인박해 때 많은 천주교인이 순교한 절두산순교성지가 그곳이다. 이 상처의 현장들은 각각 우리에게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일까?
박 상임이사는 1970년 11월13일 아들 전태일이 “근로기준법을 지키라”며 분신한 뒤부터 노동운동가·인권운동가로서 살아온 이소선 어머니는 우리 사회에 “하나가 되자”는 목소리를 던진다고 얘기한다. 박 상임이사는 1989년부터 1993년까지 5년 동안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유가협) 사무국장을 지내며 유가협 초대 회장이었던 이소선 어머니와 함께 활동했다.
전태일 열사가 사망하자 당시 노동부와 중앙정보부 등이 현금을 보따리에 싸서 갖고 왔다. 이소선을 회유해 장례를 빨리 치르게 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는 보따리를 풀어서 돈뭉치를 집어들고 공중에다 뿌려버렸다. 그것은 “못다 이룬 일을 이루어달라”는 아들의 유언을 반드시 지키겠다는 다짐과도 같은 행동이었다.
1970년대 평화시장 일터 모습. 한 층을 반으로 나눠 다락방을 만든 탓에 허리를 제대로 펴고 걸을 수 없다.
그 뒤 이소선은 전태일 열사 분신 뒤 14일 만에 설립된 청계피복노동조합을 지키고, 평화시장 여성 노동자들을 주체로 세우기 위해 애썼다. 또 한영섬유·동일방직·YH 노조 등 1970년대 민주노조들이 겪는 탄압과 인권침해에 대해서 “매 맞고 체포되고 구류되는 것까지 감당하면서 맞서 싸웠다”. 2000년대 들어서도 기륭전자의 비정규직 노동자 집단해고, 쌍용자동차 노동자 집단해고 투쟁 등에도 빼놓지 않고 연대투쟁에 나섰다.
이소선 어머니는 그렇게 2011년 9월3일, 만 82살의 나이로 아들 전태일 곁에 누울 때까지 41년간 노동자 등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서서 싸움을 멈추지 않았다. 이소선은 그 세월 동안 250차례 넘는 체포와 180여 번의 구류처분, 3년여의 옥살이를 했다. 이제 이소선이 늘 강조하던 ‘하나 됨’은 그의 묘비명으로 남아 더욱더 큰 울림을 만들어내고 있다.
이소선 어머니가 이렇게 ‘사회적 약자의 연대’를 강조했다면, 2009년 1월 발생한 용산참사는 우리에게 ‘사회적 약자의 인권’을 이야기한다.
박 상임이사는 서울 용산역 건너편 남일당이라는 4층 건물 옥상에서 무리한 강제진압으로 철거민과 경찰 특공대원이 숨진 이 사건은 우리에게 “여기 사람이 있다”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고 말한다. 이 사건은 재개발 과정에서 쫓겨난 철거민을 ‘인권을 가진 온전한 존재’로 보지 않은 우리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용산참사 진상규명위원회 집행위원장이던 박 상임이사는 추모대회를 주도했다는 이유로 10개월간 순천향병원과 명동성당 영안실에서 수배생활을 했고, 355일 만에 철거민들의 장례를 치른 다음 감옥에 갔다.
용산도시기억전시관에 있는 파란색 옷을 입은 사내의 상. 옷처럼 두른 파란색 양철판은 용산참사 때 망루 지붕을 덮었던 것이다.
그는 감옥살이를 마친 뒤 사건 현장 근처에 세워진 ‘용산도시기억전시관’을 다녀왔다고 한다. 2021년 4월 개관한 이 전시관에서 그는 “망루를 막 탈출한 철거민들이 옥상 난간을 잡고 올라와서는 망연자실 그 불길을 바라보는 모습들과 355일을 버티면서 싸웠던 유가족들과 시민들의 모습 등”을 담은 미술작품을 보았다.
그런데 전시관을 나오면서 높은 빌딩들 사이에 서 있는 새로운 교회 건물을 봤다. 용산참사가 났을 때 그곳에 있던 교회였다. 박 상임이사는 “그 교회는 아마도 재정비조합과 애초부터 재건축 약속이 되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그리고 묻는다. “교회처럼 그곳에서 장사하던 자영업자들에게도 가게를 약속해주면 되었을 것 아닌가?”
박 상임이사는 “망루 위에 올라간 철거민들을 권리를 가진 사람으로 보았다면, 집을 투기의 대상으로 보는 게 아니라 사람이 살 곳으로 보았다면 용산참사는 없었을 것”이라고 강조한다.
박 상임이사는 용산참사 진상규명위원회 집행위원장을 맡고 있을 때 수배가 되자 2009년 9월 “명동성당으로 숨어들었다”.
그는 명동성당에 있는 동안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천주교 순교자를 둔 나라라는 사실 등을 알게 되면서 “순교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순교와 분신·자결을 비교해 생각했다.
특히 1988년 ‘광주 학살의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며 분신하여 세상을 떠난 동생 박래전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한 일을 하다가 인권운동의 길에 들어선 박 상임이사에게 이 문제는 매우 중요하게 다가왔을 것이다.
마포구 합정동 절두산 절벽 아래 있는 절두산 순교자 기념탑. 가운데 주탑은 조선시대 옥사에 갇힐 때 썼던 칼을
형상화한 것이다.
박 상임이사는 세월호참사 국민대책회의 공동운영위원장을 맡던 2014년 여름 마포구 절두산순교성지 등을 찾으면서 다시 순교와 분신 문제를 고민했다. 절두산순교성지는 병인박해 때의 순교자들을 기리는 공간이다.
박 상임이사는 순교를 당당히 받아들였던 당시 천주교인들에 대해 “신분제에 묶여서 굴종의 삶을 견뎌야 했던 조선인들에게 ‘모두가 하느님의 자식’이라는 평등사상은 짙은 어둠 속의 등불이었을 것”이라며 “천주교를 접한 조선인들은 그 안에서 일종의 인간 존엄성을 발견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는 “한국 현대사에서 나타나고 이어져온 분신·자결과 같은 저항도 ‘약자들이 인간으로서 존엄하게 대우받지 못하던 독재의 시대’에 대한 저항의 방법”이었다고 규정한다. 천주교의 순교나 민주화운동 당시 분신·자결에는 ‘인간 존엄성의 발견과 추구’라는 공통점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제 다시는 인간 존엄성을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하는 사회가 돼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생명을 살리는 일이 인권인데 순교와 분신·자결이 벌어진다는 것은 인권이 제대로 자리잡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걱정이 앞선다. 우리 사회가 이소선 어머니가 남기신 ‘말’을, 용산참사가 던지는 ‘말’을 자꾸 잊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 때문이다.
“용산참사가 뉴타운 바람 가운데 일어난 비극이라는 점을 우리 사회는 완전히 잊고 있는 것 같다. 다시 여기저기서 ‘개발’에 불이 지펴지고 있으니 말이다. 이제 용산참사의 비극이 재발하지 않으리라고 누가 보장할 수 있을까.”
김보근 선임기자 tree21@hani.co.kr
한승일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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