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태동의 서울 문학기행

쪽배 같은 반달은 한강을 건너고 있었다

'반달' '설날' 등 주옥같은 동요 만든 작가 윤극영의 흔적

등록 : 2016-08-25 13:34 수정 : 2016-08-25 14:58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엔…’으로 시작하는 ‘반달’, ‘까치 까치 설날은 어저께고요 우리우리 설날은 오늘이래요…’로 시작하는 ‘설날’ 등 지금도 입가에 맴도는 동요를 작사 작곡한 윤극영이 살던 집이 서울시 강북구 국립 4·19민주묘지 앞 삼거리 부근에 있다. 일제강점기 민족의 희망은 어린이들이라며 노랫말을 짓고 곡을 만들던 윤극영을 생각하며 돌아오는 길, 저녁달이 떠서 하늘을 건너고 있었다.

반달 할아버지가 살던 집

‘쎄쎄쎄, 푸른 하늘 은하수…’ 서로 마주 앉아 꽃 같은 손으로 ‘손뼉치기’를 하며 부르던 노래 ‘반달’. 이 노래를 부르며 손뼉치기 놀이를 하는 엄마와 아이가 서로를 바라보는 눈이 반달이 되어 반짝거리고 얼굴에서 웃음이 가시지 않는다. 엄마의 눈빛으로, 엄마의 웃는 얼굴로 아이들에게 전해지는 노래 ‘반달’은 1924년 윤극영이 가사를 짓고 곡을 만든 동요다.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엔/계수나무 한 나무 토끼 한 마리/돛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이/가기도 잘도 간다 서쪽 나라로//은하수를 건너서 구름나라로/구름나라 지나선 어디로 가나/멀리서 반짝반짝 비치이는 건/샛별이 등대란다 길을 찾아라” -‘반달’

서울시 강북구 인수봉로 84길 5. 기와 얹은 단층 양옥이 단아하다. 이 집은 ‘설날’ ‘반달’ 등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창작 동요를 만들었던 윤극영이 1977년부터 1988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살던 곳이다.


꽃과 나무가 있는 아담한 마당이 정겹다. 집으로 들어가서 처음 만나는 전시실이 윤극영의 작업실이었다. 새벽잠이 없었던 윤극영은 보통 새벽부터 아침 사이를 작업실에서 보냈다.

전시실에 있는 물건들은 모두 윤극영이 생전에 쓰던 것이다. 나무로 만든 작은 앉은뱅이책상 위에 윤극영의 필체가 담긴 원고지가 있고, 그 위에 안경이 놓였다. 필통과 라디오, 스탠드, 거울, 국어사전이 그의 체온을 간직하고 있는 것 같다. 거실에는 그의 친필 원고와 사진이 있다. 작은방에는 누군가 기증한 풍금이 보인다. 그가 쓰던 도장과 붓을 볼 수 있는데, 반달 모양의 도장이 정겹다. 1926년에 만든 우리나라 최초의 동요곡집 <반달>도 볼 수 있다. 큰방에서는 윤극영에 대한 영상을 시청할 수 있다. 이 집은 2013년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됐다.

우리 동요를 만들어 주세요!

서울시 종로구 소격동에서 태어난 윤극영은 경성고등보통학교를 거쳐 경성법학전문학교에 입학하지만, 중간에 그만두고 일본 도쿄음악학교, 동양음악학교에서 성악과 바이올린을 배운다. 1923년 관동 대지진 때 귀국한다.

윤극영의 집에서는 그에게 노래를 만드는 작업실을 마련해 줬다. 작업실 이름이 ‘일성당’이었다. 일성당에는 피아노가 있었다. 피아노를 치면서 노래를 만들던 그에게 하루는 동네 아이들이 찾아와서 우리말로 된 우리 노래를 만들어달라고 했다. 윤극영은 노랫말을 먼저 지었다. 그리고 곡을 붙였다. 그렇게 탄생한 동요가 ‘설날’이었다.

“까치 까치 설날은 어저께고요/우리 우리 설날은 오늘이래요/곱고 고운 댕기도 내가 드리고/새로 사온 구두도 내가 신어요//우리 언니 저고리 노랑저고리/우리 동생 저고리 색동저고리/아버지 어머니도 호사하시고/우리들의 절 받기 좋아하세요” -‘설날’

‘설날’을 발표한 1924년에 윤극영은 ‘반달’도 발표한다. 이 노래도 윤극영이 시를 짓고 곡을 써서 만들었다.

‘손뼉치기’ 놀이를 하며 신나게 부르던 ‘반달’에는 슬픈 사연이 담겨 있다. 어느 날 윤극영은 시집간 누이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슬픔을 참을 수 없어 올려다본 저녁 하늘에는 저녁달이 떠 있었다. 그 하늘 아래 홀로 서 있었던 윤극영에게 시상이 깃들었고, 그렇게 완성한 시가 ‘반달’이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지은 시에 곡을 붙인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노래가 ‘반달’이다.

노랫말 가운데 ‘돛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이’, ‘샛별이 등대란다 길을 찾아라’ 등의 구절이 일제강점기 암울했던 현실을 극복하고 우리 민족이 나갈 새로운 길을 찾는다는 의미로 읽히기도 한다.

그리고 또 하나의 노래 ‘고기잡이’, ‘고기를 잡으러 바다로 갈까나, 고기를 잡으러 강으로 갈까나…’로 시작하는 노랫말과 곡을 1926년에 지었다.

어린이대공원에 있는 노래비

한국전쟁 때 부산, 군산 등지에서 피난살이를 했던 윤극영은 1958년 수유동 산 6번지에 집을 마련하고 살았다. 1968년에는 덕성여자대학교 근처로 집을 옮겼다. 그가 살았던 두 곳 모두 옛 흔적 없이 바뀌었다.

윤극영은 종로구 소격동 42번지에서 태어났다. 42번지가 지금은 그대로 남아 있지 않고 여러 번지로 갈라져서 태어난 곳을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정독도서관 정문에서 나와서 우회전 한 뒤 조금 가다가 왼쪽 길로 접어든다. 돌실나이 골목길로 들어가서 ‘유산균하우스’라고 적힌 건물을 오른쪽에 두고 골목길로 들어간다. 그 골목 어디쯤에서 윤극영은 태어났다.

1968년 창경궁에 ‘반달’ 노래비가 세워졌다. 노래비는 1984년에 광진구 어린이대공원으로 옮겨졌다. 푸른 풀밭 위에 놓인 노래비에 ‘반달’이 새겨져 있다. 그의 노래비를 보고 돌아오는 길, 해질 무렵 한강 위에 저녁달이 떠서 하늘을 건너고 있었다.

글ㆍ사진 장태동 여행작가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