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악구는 지난 6월 지역 사회 여성들의 생애를 통해 지역 공동체의 기억과 유산을 기록한 책 <관악에 뿌리내리고 꽃피운 그녀들의 이야기>를 발간했다. 관악구의 역사와 함께한 여성의 삶을 주제로 지역 여성들의 생애를 담았다. 1 1960년대 서울 도심에서 이주한 사람들이 모여 만든 신림동 천막촌. 2 1996년 봉천5동 재개발 현장. 3 1964년 22살에 결혼한 문순심씨. 4 봉천동 주민 윤집득 할머니가 자신의 이야기를 그린 그림책 <산꼭대기 놓아도 살 사람>에 수록된 내용. 5 <관악에 뿌리내리고 꽃피운 그녀들의 이야기>를 만드는 데 도움을 준 권희정 한국구술사연구소 연구원(맨 왼쪽)과 구술사 박수진(왼쪽 둘째부터), 정순애, 박후란, 조수미씨. 6 가수의 꿈을 품고 상경한 오미숙씨의 만담 공연 모습. 7 김혜경씨 집에서 진행된 난협여름학교 모습. 8 난곡 아줌마들이 만든 ‘국수클럽’ 모습. 훗날 난곡희망의료협동조합의 모태가 됐다. 9 이주 청년 김율씨가 <마음대로 점프>에서 공연하고 있다. 10 크리에이티브그룹 활동을 하는 박상아씨가 기획한 동네상인 상생 프로젝트 ‘난곡로 클라쓰’ 포스터 모습. 11 관악구에 있는 ‘봉제공장’ 모습. 주로 건물 1층이나 지하에 있는데 대부분 간판이 없다.
정용일 선임기자 yongil@hani.co.kr, 관악구 제공
“미싱사, 별미집 주인 등 다양한 연령층의 여성 삶 기록”
구의 ‘여성친화도시 사업’으로 진행돼
집필자도 여성…전문 구술사 교육 받아
‘지역 발전 과정’ 여성 역할·기여 재조명
“역사 인식이 바뀐 것 같아요. 평범한 동네여성들이지만, 이분들은 나랑 내 가족을 위해 뭘 못하겠냐며 자신의 인생을 개척한 사람들이죠. 이분들의 삶이 우리의 역사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관악구는 지난 6월 지역 사회 여성들의 생애를 통해 지역 공동체의 기억과 유산을 기록한 책 <관악에 뿌리내리고 꽃피운 그녀들의 이야기>(관악, 그녀들의 이야기)를 발간했다. 관악구의 역사와 함께한 여성의 삶을 주제로 지역 여성들의 생애를 담았는데, 관악구 여성들이 겪은 삶의 굴곡을 통해 시대와 지역의 변화 등을 생생하게 기록했다. 채록과 집필에 참여한 정순애(57)씨는 22일 “내 삶도 역사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며 “도서관 서가에 책이 꽂히면 또 다른 역사로 남을 수 있어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관악, 그녀들의 이야기>는 관악구가 여성친화도시 사업의 하나로 진행한 ‘관악 허스토리 발굴 사업’의 결과물이다. 관악구는 2021년 1월부터 2022년 3월까지 지역 여성을 대상으로 ‘관악 허스토리’ 구술사 발굴 채록단을 모집하고 한국구술사연구소와 협력해 구술사를 양성했다. 구술자 인터뷰와 원고 집필은 코로나19 여파로 다소 늦춰져 2021년 11월부터 2022년 3월까지 진행했다. 이번 관악 허스토리 발굴 사업으로 관악구에 사는 여성 8명이 9명의 삶을 기록했다.
이주 여성 박채원씨가 어린이들에게 다문화 강의를 하고 있다. 관악구 제공
구술자는 30대 청년부터 90대 노인까지, 채록과 집필에는 20대부터 60대까지 다양한 여성들이 참여했다. 책에는 93살 할머니 그림책 작가, 미성동 봉제공장 미싱사, 의료협동조합을 만든 난곡 아줌마, 관악문화원과 함께한 관악 문화인, 난곡 별미집 주인, 대를 이어 노포 사진관을 운영하는 30대 여성, 결혼 이주 여성, 지방에서 올라온 두 명의 30대 이주 청년 등의 이야기가 담겼다. 조미숙 관악구 여성가족과 여성친화정책팀 주무관은 “지역 여성들의 역량도 높이면서 관악구의 역사도 잊히지 않도록 보존하면 좋을 것 같아 프로젝트를 기획했다”며 “지자체가 사업을 기획해 지역 사회 여성을 재조명하면서 기록의 주체로 전문가가 아닌 지역 여성을 참여시킨 사례는 관악구가 처음”이라고 했다.
인문학 강사로 활동하는 조수미(49)씨는 ‘이은숙, 오늘도 내 삶을 재봉한다’를 집필했다. 이은숙(55)씨는 서민 노동자 여성이 결혼과 동시에 경력 단절이 된 대표적인 사례다.
열일곱 살에 서울에 와 관악구에서 30년을 살아온 이씨의 삶은 항상 ‘재봉틀’과 함께였다. 조씨는 “이씨의 이야기는 젊은 시절 익혔던 자신의 노동 기술을 통해 다시 경제 활동을 하면서 자존감을 찾고 삶의 보람을 되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돼 의미가 크다”며 “나 자신도 여성이지만, 여성에 대한 이해가 좀 더 깊어졌다”고 했다.
조씨는 조원동·신사동·미성동 일대가 ‘의류봉제 소공인 집적지구’로 지정됐다는 소식을 접하고 봉제업을 하는 여성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고 했다. 관악구에서 봉제업에 오래 종사한 여성이면 여성의 삶과 관악구의 역사 이야기를 끌어낼 만한 게 많을 것 같아서였다. “관악구에서는 제 또래 친구 중에도 집에 오빠나 남동생이 있으면 대학 보내야 한다며 상업고등학교에 간 친구가 많아요. 공부하고 싶어도 마음껏 하지 못한 여성이 많죠.”
하지만 선뜻 자신의 얘기를 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조씨는 어렵게 이은숙씨를 만나 인터뷰했지만, 도중에 못하겠다고 해 어려움을 겪었다. “한꺼번에 자신의 얘기를 다 쏟아내고 나서 후회가 되는지 못하겠다고 하더라구요. 겨우 설득해서 가명으로 나오게 됐죠.”
구술사 교육을 맡은 권희정 한국구술사연구소 연구원은 “여성들이 억압되고 통제된 사회에서 살다보니 직간접적으로 남성보다 자기검열이 심하다”며 “말할 때는 해방감을 느꼈지만 나중에 못하겠다고 하는 부분도 그런 것”이라고 설명했다. 박수진(27)씨는 ‘관악구 노포의 역사를 잇는다! 상미사진관 정슬기 사장님’을 집필했다.
상미사진관(상미스튜디오)은 서울시 오래 가게에 선정된 ‘노포 사진관’ 네 곳 중 한 곳으로 45년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정슬기(37)씨가 5년 전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뒤를이어 사진관을 운영한다.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한다고 했더니 관심사와 연결된 노포 사진관을 해보라고 하더라구요. 처음에는 사진관에 대해서 아는 것도 없고 노포에 관심이 없어서 이걸 해야 하나 싶었죠.” 박씨는 “정작 인터뷰해보니 사장님의 삶이 내 삶과 굉장히 관련이 많다는 것을 알고 공감대가 형성됐다”고 했다.
“내가 가진 고민을 해결할 수 있어 좋았어요.” 박씨는 “요즘 결과와 성과를 어떻게 낼지에 대한 생각에 휩싸여 있었다”며 “그런데 ‘꼭 물질적으로 성공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아버지 돌아가신 뒤 가족끼리 행복하게 살면 된다’는 정씨의 말을 듣고 조바심을 버리고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지금까지 자기소개서 외 글을 써본 적이 없어요. 다른 사람 인터뷰를 태어나서 처음해보는 일이라서 인터뷰가 어디로 튈지 몰라 무척 조마조마했죠.” 박씨는 막상 시작해보니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막막했다. 박씨는 “강사 선생님이나 함께 수업을 듣는 동료들이 단체톡이나 개인톡으로 많은 조언을 해줘 걱정을 덜 수 있었다”며 함께 프로그램을 진행한 동료들에게 고마워했다.
책에는 박씨의 글과 함께 박씨가 그린 일러스트도 실렸다. 디자이너인 박씨가 솜씨를 발휘한 것인데, 권희정 연구원은 “역사적자료는 아니지만 역사적 상황을 듣고 당시를 재현한 자료이기도 하고, 구술자와 집필자 두 여성이 상호 작용한 결과물로 의미가있어 실었다”고 설명했다.
박후란(45)씨는 ‘나누어야만 즐거운 삶, 옛 별미집 문순심 여사’를 집필했다. 출판사편집자로 일하는 박씨는 항상 좋은 책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는 인터뷰대상자를 찾는 과정에서 거절도 많이 당했다. “어떻게 하다보니 얘기를 듣기 위해 경로당을 많이 찾아갔죠.” 하지만 코로나19로 몇명 나오지 않아 인터뷰 대상자를 찾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박씨는 동네 미장원을 돌면서 무작정 얘기를 듣기로 했다. 박씨는 “알맞은 대상자를 만나 이렇게 좋은 얘기를 책으로 내자고 하면 대부분 싫어했어요”라며 힘들었던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누군가에게 자신의 얘기를 하는 데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죠. 남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하는데, 현실에서 그러기가 쉽지 않은 거죠.”
방송작가인 정순애씨는 ‘난곡 아줌마들의 유쾌한 반란, 역사가 되다’를 집필했다. 정씨는 도시빈민 인권운동가 김혜경(78)씨를 인터뷰했다. “관악구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역사에도 큰 족적을 남긴 분이라서 인터뷰하고 기록으로 남기는 것은 의미가 있겠다 생각했죠.” 정씨는 “이미 많은 기록이 있어, 여성의 관점에서 새롭게 썼다”며 “충분히 의미 있는 기록이 만들어진 것 같다”고 했다.
이번 관악 허스토리 발굴 사업 참가자들은 지역의 발전 과정에서 여성의 역할과 기여를 재조명하고 정당한 평가를 통해 여성의 자긍심을 높이는 동시에 양성평등 문화를 확산시킬 수 있는 사업을 지속적으로 펼칠 수 있기를 바랐다. 권희정 연구원은 “여성사료가 많이 부족한데, 앞으로 이런 프로젝트가 늘어나 여성 얘기가 많이 기록될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충신 선임기자 cs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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