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재 정선의 그림 속에 우뚝 선 선유봉
일제 때 봉우리 부숴 노송 간곳 없지만
나무 모여 숲 이룬 선유도로 돌아오니
그 숲을 휘적휘적 거니는 자 신선이다
한강 남단 서쪽 끝, 경인아라뱃길 판개목쉼터에서 방화대교 사이 약 2.5㎞ 구간 한강 기슭 습지대는 온통 수양버들이다. 한강을 거슬러 동쪽으로 가다가 강가의 낮은 산, 증미산(염창산) 숲에서 잠시 쉬었다. 다시 뗀 발걸음이 머문 곳은 신선들이 노닐었다는 한강의 섬, 선유도였다. 섬 둘레 수양버들, 미루나무숲과 살구나무숲, 잘 정돈된 숲에서 신선처럼 거닐었다. 수양버들숲을 찾아 한강을 돌아봤던 하루가 있었다.
미루나무길, 수양버들숲
경인아라뱃길 판개목쉼터는 바람 소리에 더 고즈넉했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자전거를 옆에 두고 그늘에 앉아 쉰다. 한강 자전거길의 한 축으로 자리 잡은 이곳의 평범한 풍경이다. 그들 사이에서 혼자 말없이 먼 풍경을 바라보는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그의 눈길이 머문 곳은 한강 기슭 수양버들숲이었다. 방화대교 남단 부근 한강 기슭부터 이곳까지 수양버들숲은 계속 이어진다. 방화대교 남단을 지나 이곳까지 오면서 보았던 숲은 살아 있었다.
강서습지생태공원 숲길로 들어설 무렵 숲속에서 푸드덕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순식간에 꿩과 고양이가 숲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고양이가 꿩의 꽁무니를 낚아채려는 순간이었다. 죽을힘을 다해 도망치는 꿩의 도주로는 숲 밖이었고, 고양이는 집요하게 그 뒤를 쫓았던 것이다. 지난번 뚝섬한강공원에서 보았던, 어미 새가 새끼 새들 입으로 먹이를 넣어주는 장면과는 사뭇 다른, 자연 생태계 먹이사슬의 냉혹함을 눈앞에서 직접 보았다. 그 순간에도 바람은 불어 숲을 쓰다듬었고, 햇볕 아래 푸른 생명들은 제 빛을 발산하는 것으로 깊어가는 여름을 알리고 있었다.
그 숲으로 들어갔다. 다른 종류의 나무들도 있지만 유독 눈에 들어오는 건 수양버들이었다. 센바람에 가지가 날리는 모습, 뙤약볕에 축축 늘어진 가지, 건들바람에 낭창거리는 가지, 물에 닿을 듯 말 듯 늘어진 가지, 수양버들은 그렇게 표정을 짓는 것 같았다. 말없이 말을 건네는 듯했다. 수양버들숲을 그렇게 거닐었다.
강서습지생태공원 밖은 한강 둔치 자전거길이다. 뙤약볕 아래 힘차게 페달을 밟으며 판개목쉼터로 가는 사람들은 길가에 줄지어 선 나무와 아무 상관 없는 모양으로 지나친다. 미루나무였다. 미루나무와 양버들나무가 비슷하게 생겨서 구분하기 어렵다는 공원 관계자의 말도 있었지만, 추억 속 옛 시골 신작로에서 보았던 그 나무를 당시 어른들은 미루나무라고 불렀고, 그 이름이 정서와 하나 되어 지금도 미루나무라고 믿고 싶었다. 설령 판개목쉼터로 가는 자전거길 가 나무가 양버들나무라고 해도 마음속으로는 미루나무라고 여기고 싶었다.
판개목쉼터에서 말없이 먼 풍경을 바라보는 사람을 따라 지나온 숲을 바라보았다. 강가에 주둔한 푸른 숲이 완강해 보였다.
한강 가 작은 산, 증미산(염창산) 숲에서 쉬다
방화대교 남단에서 한강을 거슬러 동쪽으로 가다보면 해발 100m가 안 되는 낮은 산들이 강가에 띄엄띄엄 이어진다. 그중 하나가 강서구 가양동에 있는 궁산이다. 궁산은 겸재 정선의 그림에 등장하는, 경치 좋은 한강 풍경을 이루는 산이었다. 궁산 동쪽에는 증미산(염창산)이 있다. 증미산을 들르기로 했다.
증미산 나들목 중 가양9단지교차로 부근 성은교회 뒤쪽 길을 선택했다. 계단으로 올라가다보면 염창산 산책길 이정표가 나온다. 한강변산책로 방향으로 걷는다. 산이 낮고 작아도 여름 숲 향기가 제법이다. 숲은 하늘을 가린 초록의 보호막이다. 숲 그늘을 설렁설렁 걷는다. 숲길 끝에 환하게 빛이 든다. 초록의 ‘숲터널’ 밖은 한강이다.
미산(염창산) 숲길. 터널 같은 숲길이 끝나면 한강 풍경이 펼쳐진다.
산이 강에서 솟은 듯 숲길 아래가 바로 한강이다. 숲길에서 강 건너편 노을공원, 하늘공원을 본다. 강물을 거슬러 월드컵대교, 성산대교가 눈에 들어오고 그 뒤 도심의 풍경이 아련하다. 해발 100m가 안 되는 낮은 산이지만 전망이 좋다.
꼭대기는 정자와 운동기구가 있는 너른 마당이다. 먼저 올라온 산 아랫마을 사람들이 자리를 다 차지했다. 정자에 앉은 아주머니들은 부채를 부치며 이야기를 나눈다. 건강보조식품부터 실손보험까지 건강을 지키는 당신들 이야기를 정자 마루에 한 아름 꺼내놓는다. 숲 그늘 긴 의자에 앉은 아주머니는 아까부터 존다. 다 젖은 민소매옷 차림의 청년들이 이제 막 꼭대기 마당에 발을 디딘다. 조선시대에 산 아래 소금을 보관하던 창고인 염창이 있어서 염창산이라 불렀다는 이야기, 산 아래 한강에서 종종 세곡운반선이 좌초돼 배에서 곡식을 건졌다고 해서 건질 증(拯), 쌀 미(米)자를 써서 증미산이라고 했다는 내력보다 정자에 앉은 아주머니들이 사투리로 나누는 건강 걱정, 자식 자랑 이야기가 여름 숲에서 더 구성지게 들렸다. 염창산 산책길 배드민턴장을 가리키는 이정표를 따라 내리막길을 걷는다. 산을 거의 다 내려왔는데 공사 때문에 배드민턴장 방향 길을 막아놓았다. 내려올 때 보았던 다른 길로 내려갔다. 숲길은 금방 끝났다.
겸재 정선의 그림들 속에는 살아 있는 그 봉우리
조선시대 화가 겸재 정선의 그림들인 <양화환도> <금성평사> <소악후월>에 공통으로 들어 있는 풍경 중 하나, 선유도(仙遊島). 신선들이 노닐었다는 뜻이 섬 이름에 담겼다. 겸재의 그림 속 선유도 또한 주변 풍경과 어울려 신선들이 노닐 만하게 보인다. 선유도는 돌산이었다. 한강에서 솟은 돌산 절벽에 노송이 고고했다. 당시 사람들은 선유봉이라고 불렀다.
일제강점기에 선유봉 돌산을 부쉈다. 그 돌로 한강 유역을 정비했다고 한다. 한국전쟁 이후 선유봉 돌산에서 돌을 캐서 도로를 복구했다는 기록도 있다. 1978년에는 정수장이 만들어졌다. 한강의 선유봉은 그렇게 사라졌다. 그곳에서 신선처럼 노닐던 사람들도 다 사라지고 겸재의 화폭에만 남았다.
선유도는 2002년 공원의 모습으로 다시 태어났다. 더는 돌산 절벽 고고한 노송은 볼 수 없지만, 공원으로 다시 태어난 선유도는 잘 정돈된 숲이 됐다.
양화대교 동편에 있는 선유도공원 버스정류장에서 내려 공원으로 들어간다. 다리 아래를 지나면 본격적으로 공원 풍경이 펼쳐진다. 지난봄 화사한 꽃을 피웠을 벚나무가 푸르다. 선유도공원관리사무소 왼쪽, 한강이 보이는 곳에 우뚝 솟은 나무는 오동나무다. 요즘 흔히 볼 수 없는 오동나무에 눈길이 오래 머문다. 요모조모 바라보는데, 나뭇가지 퍼진 모양이 하트 모양으로 보였다. 사소한 발견도 무슨 예시처럼 다가왔다. 공원 아래 강가에 커다란 수양버들 한 그루가 보이고, 그 앞 강 건너편 양화한강공원 수양버들숲이 한눈에 들어왔다.
선유도공원 선유교에서 본 풍경. 사진 왼쪽이 선유도공원숲이고 오른쪽은 양화한강공원 수양버들숲이다.
정수장 시설 중 하나였던 빗물방류 밸브가 놓인 곳 주변에 작은 미루나무 군락이 있다. 강서한강공원 자전거길에 이어 이곳에서도 미루나무를 보았다. 추억의 미루나무가 또 떠올랐고, 그 마음으로 길을 걸었다. 수크령과 억새밭 위로 메타세쿼이아 나무가 성벽처럼 서 있는 풍경에 마음을 빼앗겼다. 동화 속 달나라에 산다는 계수나무, 윤극영이 만든 동요 ‘반달’에 나오는 계수나무, 그 이름표를 달고 있는 나무 앞을 지나며 동요 ‘반달’을 흥얼거리는데, 그 발길 앞에 수십 그루의 살구나무가 자라는 살구나무숲이 나타났다.
살구나무숲에서 본 건, 사랑의 매듭으로 묶인 예비 신혼부부였다. 결혼을 앞두고 결혼사진을 찍고 있었다. 하트 모양 오동나무, 강가의 푸르른 수양버들숲, 동화 속 그 이름 계수나무, 그리고 살구나무숲까지, 이어지는 발걸음마다 상징처럼 나무와 숲이 있어 무슨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같았다. 그래서 거닐기에 좋았다.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
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