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재 정선의 붓끝에서 ‘300년 서울의 변화’를 보다

서울의 작은 박물관 ㉙ 강서구 마곡동 겸재정선미술관

등록 : 2023-06-08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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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재정선미술관 뒤 궁산에 있는 소악루.

그림 속 강바람이 전시실로 불어오니

선유봉, 탑산, 청풍계, 청송당, 백운동…

겸재 그림 속에 살아 있는 ‘사라진 장소’

현재 모습과 대비해서 보는 재미 ‘쏠쏠’

강가 능수버들 가지가 낭창거리고 물비늘 위에 뜬 작은 배의 돛이 바람을 잔뜩 머금었다. 그림에서 인 강바람이 전시실까지 불어오는 것 같았다. 순간 기억 속 물비린내가 코끝에서 번졌다.

강서구 마곡동 겸재정선미술관에 전시된 겸재 정선(1676~1759)의 그림 <산수도> 앞이었다. 조선시대 동작 나루를 그린 <동작진도>, 인왕산 동쪽 기슭을 그린 <청풍계도>도 붓끝에 맺힌 겸재의 온기가 느껴지는 원화다.

수십 점의 원화와 더 많은 영인본 그림에서 ‘사라진 옛 풍경’을 찾기도 했다. 선유봉, 탑산, 청풍계, 청송당, 백운동…. 사라진 옛 풍경을 현재의 그 자리에 옮기는 상상만으로도 겸재가 살갑다. 겸재의 붓끝을 따라 조선과 서울의 비경을 넘나들었던 한나절 여행, 겸재정선미술관.


겸재정선미술관.

겸재의 그림 속 선유봉이 사라진 곳에 선유도공원이 들어섰다. 선유도공원 선유교에서 본 풍경.

이야기를 알면 그림이 더 재밌다

겸재정선미술관으로 가는 길옆 공사장 벽에 인쇄된 겸재 정선의 커다란 그림들이 사람들을 마중하고 있었다. 한 손에 부채를 펴들고 비스듬히 앉은 겸재의 조형물은 노년의 겸재가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어서오라’며 건네는 인사 같았다. 해설사의 친절한 안내는 그림을 감상하는 재미를 더했다.

종해청조(宗海聽潮), 종해헌에서 조수 소리를 듣다. 밀물 때면 바닷물이 한강으로 거슬러 올라오고 강물은 바다로 나가려 하니, 두 큰물이 만나 부딪히고 섞이는 소리를 종해헌에 앉아 듣는다는 뜻이다.

1740년 양천현령으로 부임한 겸재는 어느 날 양천현 관아 건물인 종해헌 누각에 앉아 바닷물과 강물이 부딪히며 섞이는 소리를 들었다. 겸재는 그때의 감흥을 숨길 수 없어 그림으로 남겼다.

겸재가 1676년 태어났으니 양천현령으로 부임한 때의 나이도 그렇고 그림도 완숙의 경지로 접어들 무렵이었다. 지기이자 시인인 이병연은 그림과 시를 주고받던 친구이기도 했다. 겸재의 그림과 이병연의 시가 하나 되어 시화(詩畫)가 완성됐다. 그래서였을까? 겸재는 소나무 아래에서 종이와 붓과 벼루를 놓고 마주 앉은 두 노인을 그리기도 했다. 그림 이름이 <시화환상간도>이다.

<목멱조돈>에도 겸재와 이병연의 이야기가 깃들었다. 양천현령에 부임한 겸재가 한강 남쪽에서 강 건너편 남산 쪽에서 떠오르는 해를 처음 본 감흥을 이병연에게 알렸다. 이병연이 그 풍경을 궁금해하자 겸재는 그 장면을 그려서 이병연에게 보냈다. 이병연은 그 그림에서 받은 영감을 ‘새벽빛 한강에 떠오르니/ 언덕들 낚싯배에 가린다/ 아침마다 나와서 우뚝 앉으면/ 첫 햇살 종남산에서 오른다’라고 썼다.

미술관 뒤 궁산에 오른 이유는 겸재가 봤던 풍경을 보기 위해서였다. 한강 건너 안산, 인왕산, 남산까지 보였다. 안산은 겸재의 그림 <안현석봉>에 등장한다. 궁산 소악루 안내판에 있는 그림 <안현석봉>과 실제 풍경을 번갈아 본다. 그림의 안산 정상에 보이는 붉은 점은 안산 봉수대에서 피워 올린 봉홧불이란다. <안현석봉>에도 이병연의 시가 붙었다. ‘계절의 맛이 무르익은 때 발을 걷어 올리니 산빛이 저물었구나. 웃음을 지으며 한 점 별 같은 불꽃을 보고 양천 밥을 배불리 먹는다’

겸재정선미술관 앞 겸재 정선 조형물.

겸재의 그림에서 확인하는 사라진 옛 풍경

양천현 관아 뒤 궁산에 올랐던 겸재, 그의 시선에 눈길을 포개본다. 지금의 서울 풍경에 겸재의 그림에 있는 옛 풍경을 덧씌워 보았다.

<소악후월도>, 궁산에 있던 정자 소악루와 한강, 한강 주변의 산들이 어울린 풍경에 커다란 보름달이 떠올랐다. 겸재는 그 순간을 포착해 그렸다. 그림에 있는 탑산과 선유봉은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산을 부숴 얻은 돌은 도로와 공항 활주로 등을 만드는 재료로 쓰였다. 탑산의 흔적은 탑산초등학교 이름에 남았다. 선유봉은 선유도공원이 됐다.

<청풍계도>는 인왕산 동쪽 자락, 김상용의 이야기가 전하는 곳을 그린 그림이다. 김상용은 병자호란 때 왕의 가족을 도와 강화도로 피란했다가 강화도가 함락되자 자결한 인물이다. 병자호란 때 청과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한 김상헌이 김상용의 동생이다.

김상용은 17세기 초반부터 청풍계에 살았다. 사당인 늠연사 아래 조심지, 함벽지, 척금지라는 이름의 연못을 만들었다. 세 연못에는 각각 뜻이 있었는데, 그것을 하나로 말하면 인재를 키우고자 했던 것이라고 한다. 인왕산의 바위 절벽과 소나무, 계곡 숲도 그림에 담겼다. 지금은 그 풍경이 다 사라지고 그 자리에 ‘백세청풍’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각자바위만 남았다.

<백운동도>는 당시 한양에서 경치 좋기로 소문난 곳 중 하나인 백운동천을 그린 그림이다. 겸재는 그림을 남겼고 강희맹, 김종직, 김수온 등은 시를 남겼다. 지금은 그 풍경이 다 사라지고 바위 절벽에 새긴 백운동천이라는 글자만 남았다. 백운동천 각자 바위에서 조금 떨어진, 경기상고 건물 뒤 깊은 숲에는 청송당 터를 알리는 푯돌과 ‘청송당유지’라는 글자가 새겨진 바위가 남아 있다. 겸재의 그림 <청송당도>에는 인왕산과 백악산(북악산)이 만나는 골짜기의 수려한 풍경이 보이는데, 지금은 그 풍경이 다 사라졌다.

겸재의 그림을 설명하던 해설사가 처음 보는 그림인 <은암동록도>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그림의 아랫부분을 가리키며, 이곳이 수양대군(세조)과 그를 따르는 무리가 뜻을 모았던 ‘회맹의식’을 치른 장소인 회맹단 터라고 알려줬다. 그 설명에 그림이 더 재미있어진다.

겸재정선미술관 원화전시실.

금강산에서 인왕산까지

경북 안동의 도산서당을 그린 <계상정거도>를 자세히 보라며 그림 속 작은 기와집을 가리 키는 해설사의 손가락 끝을 따라 눈길을 옮겼다. 작은 기와집 방 책상 앞에 앉은 사람이 보였다. 퇴계 이황의 모습이고 작은 기와집은 도산서당의 완락재라는 설명을 곁들인다.

그렇게 그림 속 인물과 그들의 행동, 크고 작은 집과 사물들을 잘 살펴보라는 해설사의 말에 따라 본 그림 중 하나가 <단발령망금강산도>이다. 단발령에 올라 멀리 금강산을 바라본다는 뜻인데, 그림 속 인물들이 모여 있는 곳이 단발령 고갯길이다. 그곳에서 바라보는 금강산 풍경이 아름다워 머리를 깎고 속세를 떠나 눈앞에 보이는 풍경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한다고 해서 고개 이름이 단발령이라는 설명도 들려준다.

겸재는 1711년 금강산을 유람하고 <풍악도첩>을 남긴다. 그해가 신묘년이라서 <신묘년풍악도첩>이라는 제목이 붙었다. 1712년에는 지기인 이병연 등과 금강산을 유람한다. 그때 그린 금강산 그림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겸재는 명성을 얻게 된다.

1734년에는 <금강전도>를 남긴다. 금강산을 그린 겸재의 작품 중 대표작으로 꼽히는 이 작품에는 장안사에서 비로봉까지, 정양사에서 혈망봉까지 아우르는 풍경이 담겼다. 그리고 누군가의 시도 적혀 있다. ‘만이천봉 개골산/ 누가 용의주도하게 참모습을 그렸는가?/ 뭇 향기는 동해 끝의 해 돋는 나무까지 날리고/ 웅장하게 쌓인 기운은 온 세계에 서렸네/ 몇 송이인가, 연꽃은 맑은 자태를 드날리고/ 반쪽 숲의 송백은 현묘한 도문을 가렸네/ 설령 지금 내 발로 밟으며 두루 다녀본들/ 머리맡에 두고 실컷 보는 것에 비기겠는가’ 겸재는 1747년 72살의 나이에 마지막으로 금강산을 유람하고 <해악전신첩>을 남긴다.

금강산은 겸재 정선에게 예술적 영감을 선물했고, 겸재 정선은 평생을 바쳐 그림으로 조선을 세상에 알렸다.

1751년 윤오월, 며칠 동안 쏟아지던 비가 그치고 날이 갰다. 바위산이 젖어 검푸르게 빛났다. 바위골짜기에 폭포수가 떨어지고 있었다. 물안개인지 덜 걷힌 구름인지 산허리를 감추었다. 누인 붓을 힘주어 내려그은 흔적에서 겸재의 마음을 읽는다. 인왕산을 바라보는 76살 겸재 정선의 마음은 떨렸을 것이다.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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