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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산티아고 순례길과 달리
때론 어깨 부딪히며 걷는 분주한
도심 순례길, 무심히 걷다 보면
2시간 남짓 자기만의 속도 확인
명동대성당
11월, 도시 여행자들에게 길 하나가 새로 열렸다. 서울 중구에서 선보이는 ‘순례역사길’이다. 명동대성당에서 시작해 중림동 약현성당에 이르는 총 6㎞의 가뿐한 길로, 구불구불 지도를 따라 걷다 보면 10곳의 천주교 성지를 차례로 잇게 된다. 늦가을 단풍이 절정을 이룬 지난 일요일부터 이틀에 걸쳐 순례역사길을 돌아보았다. 명동대성당(김범우 집터), 이벽 집터, 좌포도청 터, 의금부 터, 전옥서 터, 우포도청 터,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 성당, 경기감영터, 서소문 역사공원, 약현성당. 모두 순교자들이 자유와 사회변혁을 위해 생을 바치거나, 신앙생활을 시작하고 이어간 곳들이다.
도시에서 순례자가 될 수 있을까?
스페인의 ‘카미노 데산티아고’ 순례길은 전 세계 도보여행자들이 손꼽는 ‘걷고 싶은 길’ 중 하나다. 프랑스 남부 생장 피에드포르에서 시작해 피레네 산맥을 넘어 산티아고 데콤포스델라까지, 약 800㎞의 길을 모두 걸으려면 한달 남짓이 걸리지만 성장과 치유의 수기가 많다.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 성당(성공회성당)
도시 속 순례길은 산티아고 순례길과 다르다. 산맥을 넘는 사람들과 느릿느릿 걸어가며 고요한 우정을 다져가는 대신, 횡단보도를 건너는 일상인들과 어깨를 부딪히며 파란불이 깜빡깜빡하면 막 달리기도 해야 한다. 도시에서 순례자가 되는 것이 가능할까?
이에 대한 답일까? 답사를 시작한 일요일 낮 2시, 가톨릭서점 ‘바오로딸’ 명동점에서 만난 책임자 김데레지나 수녀님은 “자본주의의 거리에서 아직 살아 있는, 저희 같은 작은 서점도 있는걸요. 저희는 평생 이 번잡한 거리에 있을 거예요” 하며 웃었다. 1960년대 명동에 자리잡은 ‘바오로딸’ 서점은 요란한 가게 빽빽한 곳에서 버티며 한자리를 줄곧 지켰다. 문명에 정신 잃고 들어온 여행객들에게 다시 갈 길을 안내한다. 수녀님이 건넨 책을 펼쳤다.
“장미에게는 이유가 없다. 그저 꽃이 피니까 꽃을 피울 뿐. 자신에게 신경 쓰지 않으며, 누가 봐주는지도 묻지 않는다. -<케루빔 순례자> 1280”
한국 최초 예배지에서 ‘서소문 순교성지’까지
명동대성당의 주말. 관광객들이 몰려 부산할 법한데, 종탑이 있는 본당으로 들어서니 일순간에 고요해져 옷매무시를 절로 고치게 됐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가 발간한 <한국 천주교 성지순례>에 따르면, 한국 천주교는 18세기 조선의 지식인 중 청나라 선진문물에 관심 많던 실학자들이 ‘서학’이라는 이름으로 소개했다. 시간이 흘러 명례방(현 명동대성당 권역)에 살던 통역관 김범우(1751~1787)가 자신의 집에 공동체를 만들어 교회 강좌를 열었는데, 이를 한국 최초의 예배로 본다.
김범우 집터
1785년 집회가 발각되어 김범우는 고문당하고 밀양에 유배돼 1년 만에 사망한다. 천주교 박해의 시작이다. 수많은 지도자가 처형되거나 고문당했고, 평신도들은 산골 깊숙이 숨었다. 1882년 프랑스인 교구장 블랑 주교가 김범우의 집터를 사 성당의 터를 닦았고, 1898년 완공된 명동대성당은 성당 지하에 성인 5명, 순교자 4명의 유해를 안치했다.
청계천 수표교 지척에 있는 ‘이벽 집터’는 김범우 집터에서 걸어서 약 15분 거리에 있다. 1784년 우리나라 최초로 세례를 받은 이승훈이 이벽, 정약용 등에게 첫 세례를 했던 곳이다. 현재는 표석 하나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
서소문역사공원을 포함한 서소문 일대는 조선시대 때 공식 사형 집행장이다. 처형장에서 순교한 인물은 100명 가까운 것으로 추산한다. 이곳이 백성들이 많이 오가는 ‘칠패시장’과 가까워 처형 장면을 보여줌으로써 경각심을 갖게 하려 했다.
약현성당
중림동 약현성당(사적 제252호)은 서소문 성지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순교자들 넋을 기리려고 세운 건축물이다. 야트막한 언덕 위에 지었는데 당시로써 파격적인 위치 선택이었다. 성당 건축에 쓴 흙은 서소문 밖 김대건 신부를 비롯해 순교한 천주교인들의 시신이 묻혀 있던 곳에서 가져왔다. 오늘날 약현성당은 결혼식 장소로 인기가 많아 새로운 인생길을 시작하는 부부들이 언약하는 공간이 되었다는 점도 애틋하다.
중구 순례역사길 도보 탐방 코스는 서둘러 걸으면 2시간 남짓 걸리지만, 마음 닿는 곳에 머물러 생각에 잠기다 걷기를 반복하다 보면 자기만의 속력이 필요하다. 멀리 떠나지 못하는 도시인들에게는 언제든 걸어볼 수 있는 일상의 순례길이다.
매주 수·토요일 오전 10시에 명동성당 앞에서 도보답사팀이 출발하며, 4명 이상이면 중구청 누리집에서 해설사를 신청할 수 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소속 현양안내자 18명이 순례역사길 해설사로 나선다.
글·사진 전현주 객원기자 fingerwhale@gmail.com, <한겨레> 자료사진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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