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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세대 약속·휴식·데이트 자리
공간 사옥 구관을 걷다 보면
구불구불 굽은 길에서 헤매기 일쑤
“사람 내장 속을 걷는 느낌”
아라리오 뮤지엄 인 스페이스(공간 사옥 구관)의 전시 공간은 약 343.3㎡(100평)의 아담한 면적이지만, 구불구불한 길이 이어지고 동선도 제법 길어 걷는 맛이 난다.
서울 지도를 펼쳐보자. 지금 2030세대들의 약속, 휴식, 데이트 장소로 호평 일색인 곳을 하나만 찍으라면? 종로구 원서동 ‘아라리오 뮤지엄 인 스페이스(등록문화재 제586호)’다. 건축사무소 ‘공간’과 역사를 함께한 이들에겐 빛났던 시절을, 이제 막 도달한 청년들에겐 약동하는 유행을 선물하는 그곳. 세대의 정서가 교류 중인 서울의 ‘신마당’을 탐방했다.
‘좁은 길’과 ‘창덕궁 비원’을 함께 품은 공간
까만 벽돌과 투명한 유리가 눈에 띄는 건물. ‘아라리오 뮤지엄 인 스페이스’는 ㈜아라리오 창업자 김창일 회장이 수집한 현대미술 컬렉션을 기반으로 2014년 새롭게 문을 연 예술박물관이다. 육중한 현대 사옥과 위엄 서린 창덕궁 사이에 숨어 있어 무심히 걷다간 지나치기 십상이다.
카페, 레스토랑이 자리잡은 공간 사옥 신관에 오르면 창덕궁이 한눈에 보인다.
과거 건축사무소로 쓰였고, 한국 현대건축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공간 사옥’의 특성을 보존해 예술 공간으로 재구성했다. 백남준, 앤디 워홀, 키스 해링, 데이미언 허스트, 신디 셔먼 등 굵직한 현대예술가들의 작품, 중국 미술계에서 급부상한 1980년대생 대표 작가 ‘리칭’의 ‘8개의 방’, 우리나라 전통 활쏘기에서 모티브를 얻는 김순기 작가의 ‘一畵’(일화)를 전시 중이다.
현대미술 전시 공간으로 탈바꿈한 공간 사옥 구관을 걷다 보면 “좋은 길은 좁을수록 좋고, 나쁜 길은 넓을수록 좋다”고 했던, 공간 창립자 고 김수근의 수기가 떠오른다. 통로와 계단이 매우 좁다. 처음 구관을 걸을 땐 길을 잃었고, 두번째 걸을 땐 몸과 보폭이 길에 맞춰졌고, 세번째 걸을 땐 건물 속에서 ‘골목길’을 산책하는 기분이 들었다.
옛 카페 자리는 뮤지엄 숍으로 바뀌었다.
뒤따라 계단을 밟고 내려온 30대 디자이너 부부의 의견도 비슷했다. “올해 두번째 방문인데, 길이 구불구불 이어지다가 생각지 못한 곳에서 공간이 확 트이고 현대 작품이 눈앞에 탁 나타나는 게 재밌더라. 사람의 내장 속을 걷는 기분이 들지 않던가” 좁아 보이던 뮤지엄 외관과 달리, 관람 동선이 길고 걷는 맛이 있었다는 소감이다.
신사옥에서 굽어보는 창덕궁 풍경은 뮤지엄의 중요 관망 포인트다. 사방이 훤한 투명 유리창 너머로 창덕궁 정원과 전각의 리듬이 살아난다. 가장 전망이 좋은 5층 한식 레스토랑은 예약해야 들어갈 수 있다.
뮤지엄 전시실 1층 고헤이 나와 작가의 <픽셀-더블디어 #7>
마당은 이미 청년들의 놀이터다. 1층 카페에서 커피 한잔 받아 조심조심 바깥 한옥채로 이동해, 문을 몇번 지나야 의자에 닿는 조금은 불편한 여정에도 방문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아 휴일 오후마다 빈자리 찾기가 어렵다. 식사를 마치고 내려오는 노부부와 전망을 보러 오르는 젊은 연인의 얼굴이 좁은 통로에서 교차하기도 한다. 마당에서 함께 햇살에 익어가는 모습도 다정한 볼거리다.
구석구석, 임정의 사진작가와 숨은이야기찾기
“감개무량하군요.” 옛 공관 사옥을 둘러보던 임정의 사진작가(72)의 한마디다. 신사옥을 설계한 장세양 건축가의 흉상 앞에서는 “멋쟁이였는데 일찍 갔다”며 옅은 한숨을 뱉었다.
옛 카페 자리는 뮤지엄 숍으로 바뀌었다.
지난 11월23일, 1975년 공간 사옥에 입사해 사진부장으로 일했던 임 작가의 안내로 공간 구석구석 숨은 이야기를 찾아보았다. 40여년이 흐른 지금, 그가 보이는 흑백사진은 오늘날 공간과 큰 다름이 없다. 임 작가가 먼저 한발 앞서서 설계실, 인화실, 회의실, 화장실까지 거쳐 공간을 지나간 사람들을 두루 복기해나갔다.
임 작가는 1970년대 코리아헤럴드사에서 사진기자로 일하다가 고 김수근 건축가가 이끌던 공간 그룹의 ‘광복 30주년 종합프로젝트’ 총괄감독을 제안받아 ‘공간에서 숙식’을 시작했다고 한다. “당시 신문사에서는 교환원이 나오는 먹통(전화기)을 썼는데, 여기 오니까 금성 키폰이 있더라고. 회사가 한눈에 봐도 멋이 있었어요. 한달 동안 고민하다가 프로젝트를 맡아 하게 되면서, 여기서 먹고 자기 시작했죠.”
임 작가가 기억하는 옛 공간 사옥은 한마디로 ‘개미굴’이다. 통로 끝마다 크고 작은 방들이 연결됐는데, 창문이 있는 곳이 적어 일개미마냥 밤낮 일만 했다며 웃었다. 빈 공간에서 책상이 놓였던 자리를, 빈 책장 앞에선 빼곡한 자료를, 빈 통로 앞에선 이곳을 지나간 예술가들을 구체적으로 떠올렸다. 고 김수근의 작업실 자리, 젊은 예술가들의 사랑방이었던 지하전시관, 카페가 있었다는 뮤지엄 숍을 차례도 돌았다. “여기 있으면서 자연스럽게 연극, 미술, 건축하는 이들과 어울리게 되고, 내가 건축사진가의 길을 걷게 됐죠.”
임정의 사진가가 70년대 당시 설계실로 쓰인 공간을 설명하고 있다.
인화실 자리였다는 구관 1층 전시실도 지났다. 마치 설계도면처럼, 벽이 있었던 자리가 온전히 남아 있음이 신기하다. 임 작가의 손이 자연스럽게 투명 작업대에 올려져, 투명 인화지를 만지기 시작했다. 임 작가가 인화실에서 나와 보여준 단체사진이 새롭다. 사진 속 그만한 나잇대의 청년들이 팔짱을 끼고 공간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는 장면에 임 작가가 말한다. “일만 하던 공간이 데이트 공간이 됐군!”
마당을 건너 공간소극장으로 들어선 임 작가는 극단 배우들의 연습 장면을 보며 목소리를 한 톤 높였다. “홍신자, 공옥진 등 당대 젊은 예술가들이 다 여기를 지나갔어요. 아직도 여기가 운영되고 있구나. 저 장면이지. 저 사람들을 한 컷 찍어두라고요.”
글·사진 전현주 객원기자 fingerwhale@gmail.com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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