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재들의 인쇄 골목에 젊은 디자이너 바람

이충신 기자의 충무로·을지로 인쇄 골목 변화 현장 탐방

등록 : 2018-09-06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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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60대 중심인 비좁은 인쇄 골목에

젊은 디자이너·기획자 하나둘 모여

인쇄문화공간 ‘지붕없는 인쇄소’ 눈길

젊은 인쇄인 교육장으로 활용 움직임

서울시, 명지대와 함께 현장 교육

서울시가 중구 충무로 진양상가 3층에 만든 ‘지붕없는 인쇄소’는 충무로와 을지로 일대 인쇄문화를 알리고 창작자와 인쇄 제작자 간 연결과 지역의 소통을 담당하고 있다.

살인적인 무더위를 몰아내려는 듯 한주 내내 비가 내리더니 이날은 또 쨍하게 햇빛이 났다. 세운상가군의 ‘막내’ 격인 충무로의 진양상가 건물 옆 인쇄 골목으로 들어서니 기계 소리가 요란하고 분주하게 발걸음을 옮기는 사람들이 보였다. 8월의 마지막 날인 31일 찾은 인쇄 골목은 다른 업종이 모여 있는 곳과 분위기가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다.

‘을지로·충무로 인쇄 골목’은 중구 인현동과 을지로, 충무로, 필동 등지에 걸쳐 형성된 인쇄 밀집지역을 일컫는다. 미로처럼 구불구불하고 좁은 골목길을 따라 인쇄 공정이 연결돼 있어, 거대한 컨베이어벨트를 연상시켰다.


일제강점기부터 있던 건물과 남산에서 청계천으로 흐르는 마른내를 비롯한 작은 물길을 따라 들어섰던 건물은 역사의 흔적도 고스란히 지니고 있는 듯했다. 1970년대 중구 장교동 재개발 사업으로 인쇄소 500여 개가 인현동 뒷골목과 충무로로 이전하면서 을지로·충무로 인쇄 골목 시대를 열었다. 이곳에는 지금도 5400여 개 업체와 1만5천여 명이 인쇄 관련업에 종사하고 있다.

‘삼발이’가 가장 낯선 모습으로 다가왔다. 인쇄 골목은 차가 들어갈 수 없는 좁은 골목이 많다. 이처럼 비좁은 골목에서 무거운 종이나 인쇄물을 나르기에는 삼발이가 안성맞춤인 듯 보였다. 오토바이를 개조해 만든 삼발이는 뒤쪽에 짐을 실을 수 있는 짐칸을 붙인 모습으로 지엽사, 인쇄소, 코팅업체, 봉투제작소 등 인쇄 공정마다 골목골목 여러 곳에 흩어져 있는 작업장을 돌며 운송을 책임졌다. 충무로와 을지로에서 귀한 대접을 받는 삼발이는 전용 주차장도 있다. 이란 ‘지붕없는 인쇄소’ 소장은 “부지런한 삼발이는 인쇄소보다 많이 벌기도 한다”고 귀띔해줬다.

인쇄 골목에는 기획사, 디자인 회사, 지업사, 인쇄, 제본, 재단 등 인쇄 관련 업체들이 서로 협력하며 공생한다. 골목 한켠에 있는 커피숍 ‘태양다방’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이 소장은 “인쇄 골목에 있는 건물은 골목만큼이나 작고 좁아서 인쇄기계 외 다른 집기들을 들일 공간이 부족해 손님이나 거래처 사람이 찾아와도 음료나 차 대접도 제대로 못한다”며 “손님이 찾아오면 으레 커피를 배달해 마셨기 때문에 여지껏 명맥을 유지하는 다방이 있는 것”이라고 했다.

인쇄 골목은 1990년대 이후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인쇄를 하던 사람들도 하나둘 떠나고 젊은 사람들은 인쇄를 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고령화도 심각해 50~60대가 대부분이고 40대가 ‘막내’ 대접받는 실정이다. 부친의 뒤를 이어 인쇄업을 하는 박균우 사장은 “제대로 사람을 구할 수 없어 전수해야 할 기술이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다”고 아쉬워했다.

인쇄산업은 첨단 기기의 등장 등 인쇄기술의 발달과 디지털화로 시장 양극화가 심해지고 있다. 역시 2세대 인쇄인인 이병욱 피아이텍 대표는 “3차원(3D) 프린터 기술을 도입해 매출 증가를 꾀하고 있다”고 말했다.

건물 3층 ‘스튜디오 플랫플래그’ 사무실 외벽에 붙어 있는 애니메이션 캐릭터 모습이 인상적이다.

이런 인쇄 골목이 변화의 몸짓을 시작했다. 젊은 디자이너들이 하나둘 인쇄 골목을 찾고 있다. ‘스튜디오 플랫플래그’도 최근 젊은 디자이너들이 만든 회사다. 스튜디오 플랫플래그는 자체 아트 프로젝트를 기획·제작하고, 상품을 생산한다. 또 다년간의 상표 디자인 경험을 살려 브랜드 컨설팅을 하고 있다. 염승일 스튜디오 플랫플래그 아트디렉트는 “주위에 인쇄 관련 업체들이 많아서 일하기 수월하고, 홍대 등 다른 지역보다 상대적으로 월세가 저렴한 것이 장점”이라고 했다.

스위스 바젤에서 그래픽디자인을 공부한 뒤 인쇄 실험 기술의 새로운 발견을 끊임없이 시도하는 강주현 디자이너는 세운상가에 작업실 겸 포스터 가게 ‘오큐파이더시티’(Occupy the City)를 열었다. 이곳에서 그가 디자인한 비정기간행물, 포스터, 신문 등도 만날 수 있다. 강 디자이너는 혼자서 타이포그래피 잡지 <티포찜머>(Typozimmer)도 발행한다. 또 진달래·박우혁 작가가 2015년에 디자인한 포스터나 스위스 그래픽디자이너 율리아 본의 포스터도 다루고 있다. 2016년 싼 임대료를 찾아 이곳으로 들어온 그는 “충무로에 있는 디자이너들이 자주 찾는 인쇄소를 이용한다”며 “가격이 조금 비싸지만 까다로운 요구도 잘 맞춰주고 결과물 품질도 높아 마음에 든다”고 했다.

중구 충무로 인쇄골목에서는 운송수단인 ‘삼발이’를 흔하게 볼 수 있다.(왼쪽 사진) 세운상가에 있는 강주현 디자이너의 작업실 겸 포스터 가게 ‘오큐파이더시티’.

이와 함께 서울시가 인쇄산업 활성화를 위해 지난 4월 진양상가 3층에 마련한 ‘지붕없는 인쇄소’도 사람들이 자주 찾는 장소가 되었다. 인쇄문화를 알리고 전시하는 공간인 지붕없는 인쇄소는 독립 출판소, 공유 창작소, 인쇄 중개소, 인쇄 교육소 역할을 담당한다. 아이디어에서 출판까지 독립출판 서적이나 우수 출판물을 전시하고 판다. 디자이너와 작가들에게는 작업 공간으로도 쓰게 한다. 또한 제작 목적이나 디자인에 알맞은 인쇄 제작자를 소개해 효율적인 출판 기회도 만들어준다. 여기에 더해 주변 인쇄소와 함께 다양한 인쇄기술을 익힐 수 있는 교육프로그램도 마련하고 있다.

서울시는 9월부터는 명지대와 함께 을지로와 충무로 인쇄 골목을 현장 교육 장소로 활용해 인쇄기술 교육을 할 계획이다. 명지대가 개설한 현장 중심형 디자인 수업을 을지로와 충무로 지역 인쇄업체와 협력해 좀더 유용하게 만든 것이다. 이 수업으로 학생들은 인쇄기술의 원리와 공정 과정을 더 쉽게 알게 되고, 디자인에 대한 이해도 깊어지고 넓어질 것으로 기대한다.

서울시는 또 10월부터는 인쇄 골목에서 오랫동안 기술을 쌓아온 기술 장인과 업체가 중심이 돼 인쇄기술을 가르치는 ‘다시세운 인쇄기술학교’의 정규 과정에 인쇄 공정 워크숍 ‘두유노프레스’도 운영할 계획이다.

글 이충신 기자 cslee@hani.co.kr

사진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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