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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12일 민중 총궐기에 100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모여서 박근혜 대통령의 퇴진을 외쳤다. 서울이나 주변 지역의 사람뿐만 아니라, 전국에서 열차를 타거나 전세버스를 타고 서울의 광장으로 몰려들었다. 그곳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거짓 신화를 깨는 민주주의 시민교육의 축제를 체험했다. 광장은 민주주의의 교실이었고, 새로운 변화에 대한 갈망이 담겨 있는 곳이었다.
광장은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비어 있는 공간이다. 그리스에서는 ‘아고라’라고 했고, 로마에서는 ‘포럼’이라고 칭하면서, 도시에서 가장 중요한 정치적 공간이 되었다. 1971년 박정희 대통령은 여의도에 100만 명이 들어갈 광장을 만들었고 그 이름도 ‘5·16광장’이라 붙였다. 도심지에서 멀리 떨어진 공간으로서, 시민을 위한 공간이기보다는 국군의 날 열병 행사와 같은 정권 유지를 위한 스펙터클을 만들어내는 공간이었다.
1986년 6월 민주항쟁의 시기에 서울시의 거리 곳곳은 그야말로 민주주의의 열망이 분출되는 공간이었다. 명동성당은 민주주의의 성지였고 아스팔트 도로는 그대로 ‘흐르는 광장’이 되어 민주주의를 만들어냈다. 6월 민주항쟁 시기 이한열 열사의 노제에는 100만 명 이상의 인파가 시청 앞에 모이게 되었고, 그 시민의 힘이 이른바 87년 체제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 2002년 한일월드컵 때 시청 앞은 붉은 셔츠로 가득 찬 거리응원의 공간이 되었고, 이곳에서의 공간 체험은 시민들을 ‘당당한 한국인’으로 만들어냈다. 그날의 거리 체험이 새로운 시민의식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명박 시장은 2004년 서울광장(1만3207㎡)과 2005년 청계광장(2026㎡)을 만들었고, 오세훈 시장은 2009년 광화문광장(1만8700㎡)을 만들었다. 그렇지만 정작 이들은 자신들이 만든 서울의 광장을 시민들의 집회와 시위를 위해 열지는 않았다. 촛불시위 때 광화문광장을 막은 ‘명박산성’과 서울시청 광장의 전경차 차벽 폐쇄는 불통의 상징이었다. 광장이 막히면서 민주주의는 위기를 맞이하고, 이에 대해서 시민들은 저항하기 시작했다. 시민들은 막힌 광장을 뚫어냈다. 2008년 광우병 촛불대회 때 70만 명, 그리고 노무현 노제 때 5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은 모여서 함께 분노와 희망을 나누어왔다.
광장은 이처럼 단순한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사람이 소통하고 공감하면서 집단적 기억을 만들어가는 상상의 공간이다. 최근 들어 민주주의를 만들어내는 공적 공간이 점점 축소되고, 상업주의만 조장하는 사적 공간이 늘어난다. 지하철의 공적 공간도, 옥상 전광판도 광고판으로 바뀌고 있다. 11월12일의 대통령 하야 촉구 시위와 같은 역대급 사건 말고도, 일상의 정치가 구현될 수 있는 자그마한 서울 시내의 광장과 공적 공간이 좀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이창현 국민대 교수·전 서울연구원장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