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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4일 서울시청 앞에서 조지연씨가 딸 희주의 보조기 위에 방한 덧신을 신기고 있다. 이 덧신은 조씨 등 뇌병변 장애인 부모들이 서울시 ‘디자인 거버넌스’에 참여해 직접 개발했다.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선생님, 점심시간에 여유가 있으면 아이 발 좀 만져주시면 안 될까요?”
지난 6일 구로구 궁동 서울정진학교 앞에서 만난 김경미(50)씨는 특수학교에 있는 딸 혜원(고3)이의 발을 걱정했다. “선생님이 반 아이들 전부를 그렇게 해줄 수는 없다. 알면서도, 기대는 안 하면서도 아이 발이 워낙 차니까 그런 부탁을 드릴 수밖에 없었다.”
휘어진 몸에 맞게 제작된 특수휠체어가 없으면 이동하기도 힘든 뇌병변(뇌성마비 중복 장애) 아이들에게 겨울은 고통스러운 계절이다. 뇌병변은 미성숙한 뇌에 손상을 입어 근육을 조절할 수 없는 질환이다. 증세가 심하면, 관절이 틀어지거나 돌아가는 것을 막기 위해 발에 단단한 보조기를 단다. 같은 학교 학부모 한현하(45)씨는 “양말을 여러 겹 신겨도 움직이지 않아서 그런지 발이 항상 차갑다. 요즘 같은 한파 속에 휠체어를 끌고 나가면 아이 발이 얼마나 시릴까 안쓰럽다”고 한다. 김경미씨는 “딱딱한 보조기를 한 채 일반 부츠를 신기는 어렵다. 그래서 지퍼나 벨크로(찍찍이)가 있는, 발보다 아주 큰 신발을 신긴다. 애 덩치는 요만한데 신발은 이만하니까 보기에도 안 좋고, 발도 약한 아이들이 지탱하기에 너무 무겁다”고 한다.
국내에선 보조기 위에 신을 수 있는 신발이 한 제품만 판매되는데, 방한용이 아닌데다 색상과 디자인도 제한돼 있다. 김경미씨는 “작은 보조기라도 대부분 값이 비싸기 때문에 모든 걸 갖출 수는 없다. 엄마들은 일반 제품 가운데 비슷한 제품을 찾아 고쳐 쓰는 형편”이라고 했다. 인지 장애로 자기 마음을 표현할 수 없는 아이들이 비장애인과 다른 차림새에 마음의 상처를 입는 건 아닌지도 걱정이다. 딸 희주(초 4)를 기다리던 조지연(42)씨는 “우리 아이가 얘기는 못 하지만, 자기 신발이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걸 볼 거다. 아이의 자존감을 위해 진짜 신발처럼 생긴 덧신이 꼭 필요하다”고 했다.
신발처럼 생겼으면서도 쉽게 신길 수 있는 따뜻한 방한 덧신, 아무도 만들지 않자 엄마들이 개발에 나섰다. 10년 전 발족해 현재 450여명이 활동하는 ‘중증·중복 뇌병변 장애인 부모회’(중애모·cafe.daum.net/chungjimo) 회원들이 그 주인공이다. 선천성 뇌병변 장애인은 지적·자폐·언어·시청각·섭식·수면 등 중증 장애를 보통 서너 가지, 많게는 예닐곱 가지 갖고 있다.
중애모 회원들이 제품 개발에 나설 수 있었던 건 서울시의 ‘디자인 거버넌스’ 사업 덕분이다. 시민이 생활하며 겪는 문제를 제안하면 전문가 등 여러 사람이 디자인에 함께 참여해 해결한다. 이정욱 중애모 공동대표는 “지난해 ‘뇌병변 아동의 의복 문제’를 제안했는데, 시민투표에서 가장 많은 표를 받았다”고 말했다.
지난 14일 서울시청 앞에서 뇌병변 장애인 부모들이 아이들과 함께 산책하고 있다. 왼쪽부터 최버들·이활인 모자, 이정욱 중애모 대표, 조지연·임희주 모녀. 활인이는 지난해 개발된 무릎싸개와 턱받이를 하고, 희주는 올해 개발된 방한 덧신을 신었다.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지난해 7월부터 취지에 공감하는 국립재활원 연구원, 의상디자인 전공 학생, 봉제업체 대표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가 중애모 회원과 머리를 맞댔다. 아이를 데리고 학교와 여러 치료실을 다녀야 하는 엄마들은 회의에 참석하는 것부터 쉽지 않았다. 어떤 엄마는 치료를 포기하고 아이까지 데려오기도 했다. 조지연씨는 “아이에다 휠체어까지 하면 무게가 80㎏ 이상이다. 둘러업고 회의실에 오려면 밥 먹일 시간도 없어 회의하며 밥을 먹였다”고 한다. 6개월 동안 수많은 회의와 셀 수 없는 수정 끝에 지난해 말 턱받이와 무릎싸개가 완성됐다. 턱받이는 국내에 유아용만 있는데, 디자인을 개선해 청소년이나 어른이 해도 어색하지 않게 만들었다. 무릎싸개는 휠체어에 고정할 수 있고 지퍼로 뒤까지 채워 휠체어 아래에서 불어오는 바람까지 막을 수 있다. 2년 전 겨울 여행에서 아들 활인(고 3)이가 추위에 떠는데도 담요로 싸매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는 최버들(45)씨는 “무릎싸개를 하고 여행을 가면 평소와 달리 손에 온기가 있어 감동했다. 방수·방풍 재질이라 눈비가 와도 담요와 달리 젖지 않더라” 한다. 봉제업체 ‘나비수’의 나기후 대표는 매주 회의에 빠지지 않고 참석했을 뿐 아니라, 공동구매에 나선 중애모 회원들을 위해 턱받이 600장과 무릎싸개 100장을 실비만 받고 만들어줬다. 참가자들의 진정성을 확인한 서울시는 디자인 거버넌스 사업 가운데 유일하게 발전사업으로 선정해 올해도 계속 지원했다. 변서영 서울시 디자인정책과장은 “장애인의 의복 분야는 국내에선 거의 불모지인데다 장애인의 자존감을 높이도록 계속 발전시켜야 한다. 결과물을 보고 시민의 반응이 좋았고, 참여했던 분들의 의지가 커 확산사업으로 선정했다”고 한다. 지난 14일 서울시청에서 만난 희주는 검은색 방한 덧신을 신고 있었다. 지난 3월부터 두번째 디자인 거버넌스를 한 끝에 만든 샘플 제품이다. 겉모양은 보통 부츠와 다를 게 없지만, 발목 부분을 잡고 당기자 앞이 활짝 벌어졌다. 보조기를 한 상태에서도 신고 벗기 편하도록 디자인한 것이다. 최버들씨는 “한쪽 발만 보조기를 차거나 발 변형이 너무 심해서 보조기조차 할 수 없는 아이들까지 고려해 발등 부분은 높게 만들어 발이 눌리지 않게 하고, 원단도 가볍고 부드러운 것으로 썼다”고 한다. 벨크로 방식으로 조임 정도를 조절하며 탈부착이 잘되게 했고, 덧신 안에는 털을 많이 넣어 방한 효과를 높였다. 조지연씨는 “항상 ‘희주 발이 차다’고 하시던 물리치료실 선생님이 오늘은 ‘발이 하나도 안 차네요’ 해서 우리가 괜찮게 만들었구나 싶어 기뻤다”고 했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디자인 거버넌스’에 참여하는 조지연씨는 “없으면 안 되는 물건인데 시중에 나오지 않으니까 그 답답함과 절실함 때문에 여기까지 왔다. 업체들이 안 만드는 이유는 딱 한 가지다. 수요와 수익이 없을 것 같아서다. 사실 한국의 장애용품 시장 규모가 얼마나 되는지 아무도 모른다. 우리가 디자인한 제품을 상품화하려면 업체를 설득할 수 있느냐가 과제”라고 했다. 방한 덧신도 여러 신발업체에 공동개발과 제조를 의뢰했지만 계속 거부당하다 키즈웍(에스투메이드) 김화진 대표가 받아줘서 200켤레를 만들 수 있었다. 조지연씨는 “우리는 이런 제품이 꼭 필요한데, 몇 개만이라도 만들어서 공동구매하게 해주세요 하고 부탁했는데, 업체에서 고맙게도 원가 수준으로 값을 정해줬다” 한다. 최근 중애모 회원들에게 공동구매 신청을 받자 주문이 쇄도했다. 모임 바깥으로 입소문이 나며 마감 뒤에도 추가 주문이 계속 들어온다. 한현하씨는 “다들 이런 덧신이 있으면 좋겠다 생각만 하다가 실제 제품화되니까 반응이 폭발적이다. 중애모 회원이 아니라 몰라서 공동구매에 참여 못한 엄마도 많다. 우리 아이들뿐만 아니라, 갑자기 다친 분이나 어르신에게도 유용할 것 같다”고 한다. 방한 덧신은 제작 단가와 재고 부담 걱정에 크기는 대(L)와 중(M) 두 가지, 색은 검은색과 밤색 둘만 주문받았다. 조지연씨는 “알록달록한 색상과 무늬로 여러 샘플을 만들었지만 공동구매는 무난한 색상으로만 했다. 앞으로 기회가 되면 꼭 제품화하고 싶다”고 바람을 말한다. 최버들씨는 “활인이 키가 170㎝가 넘어 뇌병변 환우 가운데 유난히 큰 편이다. 지난해 무릎싸개 공동구매 때도 세 가지 크기만 만들었는데, 가장 큰 것도 활인이한테는 조금 작더라. 다양한 크기의 제품도 만들 수 있으면 좋겠다”고 한다.
서울시 ‘디자인 거버넌스’로 개발된 방한 덧신은 보조기를 하고도 신고 벗기 편하도록 앞이 활짝 벌어진다. 서울시 제공
팔꿈치·무릎보호대는 디자인까지 다 했지만 제품화를 못해 숙제로 남았다. 노출이 많은 봄부터 가을까지 주로 쓰는데, 공동구매 시기를 놓친 것이다. 청소년용 기저귀는 엄마들이 개발을 간절히 바랐지만 제작 여건 때문에 아쉽게 포기했다. 뇌병변 장애인 대부분이 평생 기저귀를 차야 하지만, 국내에는 영유아용과 성인(실버)용만 있고 중간 크기는 없다. 이정욱 대표는 “엄마들이 영유아용을 쓸 수 있을 때까지 쓰다가, 아이가 너무 커서 도저히 안 되면 외국에서 비싸게 사는 실정”이라 한다. 고민하던 중애모 회원들은 시중에 생리대 용도로 나와 있는 위생팬티에서 착안해 ‘기저귀 위생팬티’를 만들어보자는 아이디어를 냈고, 2018년도 서울시 시민참여예산 사업에 선정돼 개발을 앞두고 있다.
시민참여예산 사업에는 재봉 교육도 포함되었다. 엄마들의 수선 노하우를 모은 <리폼 가이드북>이 2016년 말 나왔지만, 정작 수선을 맡아주는 곳이 드물었다. 조지연씨는 “일반 수선집에 의뢰하면 작업이 까다롭다며 잘 안 해주려 한다. 그래서 엄마들이 재봉 교육을 받아 리폼 서비스를 하며 스스로 일자리도 만들 계획”이라고 했다. 2018년에는 서울시 보조공학서비스센터 세 곳 가운데 서남센터에 리폼 코너를 만들어 시범 운영하기로 했다. 성과에 따라 나머지 동남·동북센터까지 확대할 수도 있다. 이정욱 대표는 “무릎싸개·턱받이 등 이미 공동구매한 제품들을 지금 살 수 없느냐는 문의도 많고, 디자인해둔 팔꿈치·무릎보호대도 만들어야 하고, 앞으로 할 일이 많다. 중애모 회원이 세운 사회적기업에 맡기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고 했다. 시장논리 때문에 배제되고 소외되기 십상이었던 장애인용품 개발을 위한 엄마들의 애끓는 도전은 내년에도 계속된다.
원낙연 기자 yanni@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