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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진 전기요금 폭탄을 잊고 사는 아파트

홍제동 성원·제기동 이수브라운, 공동체 만들기·미니태양광이 주효

등록 : 2016-08-18 13:23 수정 : 2016-08-18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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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일 저녁 홍제동 성원아파트에서 열린 ‘불 끄고 천체 관측’ 행사에 참여한 지역 주민 최영하(38) 씨가 천체망원경으로 달을 보는 아들 김승유(5) 군의 머리를 붙잡아 주고 있다. 장수선 인턴기자 grimlike@hani.co.kr
#1. 12일 저녁 7시

서울 서대문구 홍제동 성원아파트

해가 질 무렵인데도 불볕더위에 숨이 턱턱 막힌다. 여느 아파트라면 에어컨이 있는 집 안으로 빨리 들어가려는 사람들로 붐빌 시간인데, 이곳에서는 단지 안 놀이터로 주민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유모차를 몰고 나온 젊은 부부, 늦었다며 학원버스에서 뛰어오는 아이, 뒤뚱거리는 어린 손자 뒤를 쫓는 할아버지. 30분이 지나지 않아 70여 명의 주민이 모였다.

저녁 8시, ‘불 끄고 천체 관측’ 행사가 시작됐다. 지난해 4월, 서울시 ‘에너지자립마을’로 선정된 뒤 한 달에 한 번씩 ‘불 끄기’를 해왔는데, 올 8월에는 천체 관측 이벤트를 마련해 보았다. 불 끄기 참여를 높이기 위해 인근 서대문자연사박물관에서 천체망원경 두 대도 빌렸다. 아이들의 흥미를 끌어 부모들도 따라 나오게 하려는 뜻이다. 어둠이 깔리자 집마다 불이 꺼지기 시작했다. 아파트 전체 242가구 중 편찮은 어르신이 사는 세대를 제외한 90%가량이 참여했다.

“와! 정말 달이 밝고 아름다워요.” 망원경으로 커다란 달을 본 김지선(6) 양이 탄성을 질렀다. “텔레비전에서 보던 달을 직접 보니 신기해요. 불을 껐지만 밝은 달빛이 있어 친구들과 늦게까지 놀 수 있을 것 같아요.” 이수화(8) 양도 신이 났다. 놀이터에서 뛰어놀던 아이들은 앞다퉈 망원경 앞에 줄을 섰고, 부모들은 허기진 아이들에게 찐 감자를 먹였다.

“늦은 밤 어둠을 밝히는 달을 보며 아이들이 뛰어놀고, 모르고 지내던 이웃들이 먼저 다가와 주고…신선한 충격이네요. 지금은 잘 모르겠지만, 아이도 커가면서 우리가 왜 에너지를 아껴야 하는지 알게 되겠지요.” 지난 4월 서초동에서 이사 온 주부 최영하(38) 씨는 아들 김승유(5) 군을 보며 흐뭇해했다.

“우리가 낭비하는 전기 때문에 원자력발전소와 송전선로 주변 주민들이 얼마나 피해를 보는지 아세요?” 홍승연(56) 부녀회장은 모여 있는 주민들에게 에너지 절약의 필요성을 열심히 설명했다. “콘센트만 뽑아도 생각보다 에너지가 절약되더라고요.” 옹기종기 모여 앉은 주민들은 자신들의 경험담으로 이야기꽃을 피웠다.

“에너지 운동에 대한 인식 확대를 위해 우선 공동체 만들기에 나섰어요.” 에너지 운동을 처음 제안한 서정순(48) 씨가 공감대 형성의 과정을 설명했다. 인근 유휴지를 빌려 텃밭을 함께 일궜고, 작물 수확 때는 마을잔치를 벌였다. 소모임을 만들어 에너지 자립 우수마을을 견학하고, 서대문도서관 시청각실에서 교육도 했다. 남승현(59) 관리소장은 “지하주차장 전기료를 50% 절감하는 등 에너지 절약도 절약이지만 마을공동체를 만든 것이 더 큰 자랑”이라고 말했다.


지난달 25일 동대문구 휘경동 주공아파트에서 열린 ‘행복한 불끄기 마을영화제’. 동대문구는 에너지 절약 문화 정착을 위해 지난해부터 마을을 돌며 영화제를 열고 있다. 동대문구 제공
#2. 16일 오후 2시

서울 동대문구 제기동의 이수브라운스톤아파트

이 아파트의 발코니 모습은 유별나다. 전체 299가구 중에서 172가구에 260W 크기의 미니태양광 발전기가 설치돼 있기 때문이다. 아파트 단지가 ‘소형 발전소' 같다는 착각이 들 정도다.

“처음에는 개별 설치를 시도했지만, 제품과 비용이 다양해 포기하는 주민이 많았어요. 아파트 전체를 누진제로 적용한 전력 요금을 알려 주며 비용 절감에 대한 믿음을 줬고, 투표를 통해 모양새가 좋고 값이 싼 제품을 고르게 했지요.” 김선희(48) 관리소장의 설명이다.

이 아파트는 서울의 대표적인 에너지자립마을로 꼽힌다. 지난해 아파트 차원의 에너지 운동을 시작해 모든 가구가 에코마일리지에 가입했다. 지하주차장과 노인정 등 공동시설 전등을 엘이디(LED, 발광다이오드) 전등으로 바꾸고, 각 세대도 엘이디 전등을 공동구매했다. 이런 노력으로 지난해 아파트 전체 전기료를 재작년보다 2900만 원쯤 아꼈다. 주민 박기섭(52) 씨는 “우리 집에서 생산된 전기와 에코마일리지로 인근의 어려운 어르신들에게 기부까지 했어요”라며 뿌듯해했다.

주민들은 달마다 22일 ‘불 끄고 영화제’를 열고, 해마다 자전거 발전기로 솜사탕 만들기 체험을 하는 ‘에너지 주민한마당 축제’도 연다. 공동텃밭 가꾸기와 수확물 나눔 행사, 천연 제습기 만들기 행사도 있다. “예전에 몰랐던 주민과도 친근하게 말을 건네는 사이가 됐어요.” 이승이(47) 씨는 에너지자립마을이 가져온 생활의 변화에 아주 만족스러워했다.

에너지자립마을은 서울시가 2012년부터 육성해온 에너지 절약 공동체다. 마을 단위로 태양광을 이용해 신·재생 에너지를 생산하고 에너지를 아껴 에너지 자립도를 높이는 것이 목표다. 현재 서울에는 모두 55곳의 에너지자립마을에 2만7739가구가 살고 있다. 이 가운데 87.5%인 2만4269가구가 아파트다. 서울시 공모에 응해 에너지자립마을로 선정되면 서울시로부터 연간 1000만 원까지 지원을 받는다.

유재룡 서울시 기후환경본부장은 “공동체 중심의 에너지 절약 문화가 얼마나 큰 의미가 있는지 에너지자립마을을 통해 실감하고 있다. 시민들의 참여와 지혜가 널리 퍼질 수 있도록 에너지자립마을을 적극 지원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김정엽 기자 pkjy@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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