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토, 걸으며 생각하며

금각과 은각, 중세 사무라이 권력이 빚어낸 ‘두 욕망’

⑬ 14~15세기 쇼군이 지은 교토의 ‘두 얼굴’ 금각사와 은각사

등록 : 2023-04-13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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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각사의 상징 같은 금각은 1397년 당시 일본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가 집무처 겸 영빈관으로 지은 별장의 황금누각이다. 일본 중세의 화려한 귀족문화를 뜻하는 ‘기타야마 문화’의 대표적인 건축물이다. 1950년 방화로 전소된 뒤 새로 지어졌으나, 기록에 근거한 ‘완전한 복원’이란 점에 힘입어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됐다.

연못에 일렁이는 금빛 찬란한 금각

왕이 되고 싶었던 쇼군의 욕망 가득

1950년 방화로 불탄 뒤 ‘황금빛 부활’

“너무 세속적”이라 싫어하는 일본인도


선경의 은각사는 ‘일본 미의식의 원류’

은칠 없는 모노톤으로 고승 같은 기품


바다와 달을 묘사한 모래마당도 볼만

1994년 금각과 나란히 세계문화유산

긴가쿠지(金閣寺·금각사)와 긴가쿠지(銀閣寺·은각사)는 교토 관광에서 빼놓을 수 없는 명소이다. 각각 긴가쿠(金閣)와 긴가쿠(銀閣)라는 이름의 누각으로 유명하다.(금각과 은각은 일본어로는 약간의 차이가 나지만, 우리말외래어표기법에서는 동일하게 ‘긴가쿠’다. 아래에서는 이에 따라 헷갈리는 일본 발음과 표기 대신 그냥 금각사와 은각사로 부르기로 하자.)

짧은 일정 속에 교토 방문 인증샷이 필요하다면 금각을 배경으로 한 컷을 남기는 것이, 여유 있는 일정이라면 은각사를 천천히 거닐어보는 것이 어떨까.

금각사는 교토 서북쪽 기누가사 산 밑에 있는 선종사찰이다. 정식 이름은 기타야마 로쿠온지(북산 녹원사). 커다란 연못가에 금빛 누각이 찬란하다. 은각사는 동북쪽 히가시야마 연봉 아래 ‘철학의 길’(연재 11회 참조) 시작점에 있는 지쇼지(자조사)의 별칭이다. 은칠은 없지만 금각사와 자주 대비되면서 근세 이래 은각사라 불리고 있다.

각각 14세기 말과 15세기 말에 100년 가까운 시차를 두고 지어진 금각사와 은각사는 무사 권력이 교토를 지배하던 시절의 상징 같은 건축물이다. 둘 다 연못을 중심으로 한 지천회유식 정원 형태를 하고 있다. 애초 절이 아니라 별장으로 지었기 때문이다. 연못가에 아름다운 금각과 은각이 서 있어서 본명보다는 누각의 이름으로 불리게 됐다.

3층 중 2·3층에 금박을 씌운 금각은 그 휘황찬란한 금빛이 보는 이의 시선을 압도한다. 연못에 비친 황금빛 그림자가 일렁일 때는 누각이 마치 물 위에 떠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금각을 의식해 그 반대의 미의식으로 지었다는 은각은 본래 검은 옻칠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오랜 풍상에 그마저 벗겨져 남루를 걸친 듯한 모습이지만, 고고한 자태만은 깊은 선경에 들어 있는 고승의 기품을 방불케 한다.

금각사와 은각사는 일본 미술사에서도 나란히 거론된다. 일본 중세의 뛰어난 건물유적으로서 양식적으로 비교 대상이기도 하지만, 금과 은이라는 색의 대조처럼 철학이나 미학의 차이가 강렬하게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금각사가 화려하고 호사한 귀족문화의 한 절정이라면, 은각사는 선불교를 바탕으로 한 모노톤의 심오한 미의식으로 금각에 “맞서고” 있다.

1994년 금각사와 함께 세계문화유산에 오른 은각사는 ‘질박하고 심오한 아름다움’으로 대표되는 ‘일본 미의식’의 원류라는 점에서 그 가치를 높게 평가받고 있다. 먼저 지어진 금각사의 ‘화려미’를 의식해 건축이 구상됐다고 한다. 금각이 석가모니의 사리전인 데 반해, 은각은 대중 구제 부처인 관세음보살을 모신 점도 대조를 이룬다.

금각사는 무로마치막부 3대 쇼군으로 절대권력을 휘두른 아시카가 요시미쓰가 1397년 지은 산장에서 유래했다. 아시카가는 당시 ‘천하 장관’이라고 불렸다는 한 고위 귀족의 화려 장대한 별장을 인수(사실상 빼앗은 것이나 다름없다)해 자신의 스타일로 고쳐 집무처이자 영빈관으로 삼았다. 절대권력자의 무소불위를 보여주는 ‘건축 행위’였다. 아무리 단일건물이라 해도 전체를 금으로 덮는다는 발상은 막강한 권력과 재력이 없이는 엄두를 낼 수 없는 일이다(사실 이런 일은 이후에도 없다).

사무라이 출신의 절대권력자 아시카가는 상위계급인 왕실 귀족문화를 동경하다 못해 종교(선불교)의 권위를 끌어들여 그 벽을 뛰어넘으려 했다. 일본의 일부 사가는 실제로 아시카가가 쇼군의 지위에 만족하지 않고 스스로 ‘덴노’(왕)가 되려는 야망을 품었다고 본다. 누각의 황금빛과 실내 배치는 그 끝없는 욕망의 표현이다. 금칠이 없는 1층은 왕실의 침전을, 금빛의 2층과 3층은 각각 무가(武家)의 불전과 중국 선종사원 양식을 하고 있다. 왕족의 명예, 막부의 권력, 법황의 권위라는, 현세의 모든 ‘파워’를 한 몸에 지니려 했다는 것이다.

금각사는 1950년 21살의 학승에 의해 완전히 불탄 적이 있다. 승려의 어머니는 강물에 투신했고, 불을 지른 청년도 6년 뒤 생을 마감했다. 그를 진료한 의사는 ‘정신질환’을 언급했지만, 진짜 방화 동기는 소설과 다큐멘터리 제작으로도 모자랄 만큼 일본인들의 수수께끼였다. 지금의 금각은 1956년 재건된 것이다. 실측조사자료가 남아 있어 거의 완벽하게 재현할 수 있었다고 한다. 불타기 전의 금각은 패전 직후의 고단한 일본처럼 금칠이 거의 벗겨진 ‘퇴락한’ 모습이었다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잿더미가 됨으로써 창건 당시의 찬란한 금빛을 되찾을 수 있었다.

아무튼 금각은 화려함을 되찾았지만(20㎏ 이상의 금이 사용됐다고 한다), 강렬한 세속성의 황금빛을 천박하게 여긴 일본인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금각의 휘황함에서 인생의 허무를 읽는다는 사람도 있었다.

금각사의 배 모양 소나무(리쿠슈노마쓰). 쇼군이 좋아한 분재를 옮겨다가 돛을 단 배 형상으로 가꾼 것이라고 전해진다. 종교적 피안을 상징한다.

그러나 현세의 유복을 바라는 보통사람들은 그 숨 막히는 아름다움 앞에서 위화감을 느낄 겨를조차 없다. 황금이란 금속이 인간의 무의식 속에 심어놓은 ‘영화(榮華)의 이미지’ 때문일 것이다.

구경꾼의 시각에서 보면 금각이 볼만하지만, 문화사적으로는 은각사의 위상이 좀더 높다. 오늘날 자칭 타칭 ‘일본적’이라 여기는 일본 문화의 특징이 이곳 은각사에서 배태됐는데 이를 ‘히가시야마 문화’라고 한다.

이 흐름을 이끈 사람이 은각사를 지은 8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마사이다. 금각사를 지은 아시카가 요시미쓰의 손자로, 정치적으로는 무력했지만 예술적으로는 천재였다. 스스로를 정치와 격리하기 위해 교외의 산기슭에 별장을 짓고 은거생활을 했다. 은각은 그가 죽은 뒤에 완성됐다.

그는 이곳에서 당대의 지식인, 예술가, 선승 등과 문학과 예술을 논하고 다도와 시가, 연희 등을 펼치며 선(禪)의 세계를 추구했는데, 이것이 대중 속으로 들어가 일본 전통문화의 한 전형을 제공했다는 설명이다.

일본 문화는 이때를 계기로 금각 같은 화려미보다는 은각류의 이른바 ‘쓰야케시’(광택을 벗긴 상태)의 소박하고 고졸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흐름으로 바뀌어갔다고 한다. ‘와비’(간소하며 질박한 멋), ‘사비’(고요하고 한적한 멋) 같은 용어로 대표되는 일본적 미의식의 원류가 바로 은각이었다는 것이다.

은각사도 주인이 죽은 뒤 금각사처럼 선종사찰이 되었는데, 잦은 화재로 대부분의 전각이 소실되고 은각과 요시마사가 서재로 쓰던 ‘동구당’만이 요행히 화마를 피했다고 한다. 동구당은 요시마사 장군의 전용 불당으로 현재 일본 국보에 올라 있다.

은각사의 모래마당. 은모래 무늬로 여울을 묘사한 긴샤단(은사탄)과 달빛을 반사하는 역할을 한다는 모래탑 고게쓰다이(향월대). 은각사만의 아취를 이룬다.

은각은 일본인 중에도 본래 은칠을 한 것으로 아는 사람이 많다지만, 은을 칠한 적은 없다. 애초 계획은 있었는데 요시마사가 죽으면서 없던 일이 됐다고도 한다. 이런 내력 때문인지 은각이란 이름도 17세기 에도시대 들어서 생겨났다고 한다. 은각에는 차라리 잘된 일일 것이다. 은색으로 하루 종일 번쩍인들 내내 금색과 비교되며 아류의 허세라는 소리를 들어야 했을지 모르니까.

은각사는 정원미의 측면에서도 금각사보다 아취가 있다. 넓은 마당에 모래를 한 단 높이 쌓고 일렁이는 여울을 묘사한 긴샤단(은사탄), 그 곁에서 달빛을 반사하는 역할을 한다는 모래탑 고게쓰다이(향월대)가 연못에 그림자를 드리운 은각과 어우러진 모습은 오직 은각사에서만 볼 수 있는 특별한 풍경이다.

은각과 함께 국보로 지정된 동구당을 돌아 언덕길을 오르면 은각사와 주변 전경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은각 지붕에는 금각처럼 봉황이 얹혀 있는데 동쪽을 향하고 있다. 영원히 관음보살을 수호한다는 의미라고 한다. 은각의 정식 이름도 간논덴(관음전)이다.

금각과 은각의 우열을 따지는 일은 부질없다. 각자 자기 세계가 있고 미학이 있고 역사가 있다. 욕망의 화신인 금각은 잿더미가 된 뒤에야 비로소 새로운 금의(金衣)를 입을 수 있었고, 영원의 갈구 같은 은각은 은의(銀衣)를 마다함으로써 시간이 흐를수록 오히려 일생일의(一生一衣)의 고고함을 더해가고 있다. 둘은 1994년 나란히 세계문화유산이 됐다.

글·사진 이인우 리쓰메이칸대학 ‘시라카와 시즈카 기념 동양문자문화연구소’ 객원연구원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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