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관승의 새벽 3시

89살의 현역 미켈란젤로 “나는 아직 배우고 있다”

배움에 대하여

등록 : 2019-04-18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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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직 뒤 배운 파워포인트는 신세계

나이 들수록 손으로 익히는 게 중요

지인은 퇴직 뒤 과자 굽기에 매진

힘들수록 배우는 삶 추구해야

원고 쓰는 날이다. 이날이 되면 나는 어김없이 새벽 3시에 책상에 앉는다. 이 란에 연재를 시작하면서 생긴 습관이니 햇수로는 벌써 4년째다. 글쓰기에 앞서 뜨거운 커피를 만드는 작업부터 시작한다. 크레마라 하는 검붉은 거품과 함께 추출되는 에스프레소 향기가 아직 졸음에서 완전히 깨지 못한 채 미몽에서 헤매는 나를 깨운다. 강렬한 에스프레소 원액을 바라보다가 코를 갖다 대고 향을 즐긴 다음 거품에 살짝 혀를 대본다.

산사에서 수도자들이 갖는 경건함까지는 아니더라도 가능한 한 맑은 정신으로 임하겠다는 일종의 의식이다. 커피콩에서 에스프레소 원액을 추출하고 나면 가루는 쓰레기통으로 가듯이 핵심적인 정수를 추출해내고 싶지만, 그 작업이 어디 그리 쉬운가? 원고 마감 전날에는 되도록 저녁 약속을 자제하지만 불가피하게 참석해야 하는 경우도 있고 술도 마시게 된다. 한꺼번에 일이 몰릴 때면 피곤하기도 하고, 꾀가 날 때도 없지 않다. 장시간 컴퓨터 작업에 매달리다보니 ‘손목 증후군’이라는 직업병도 생겼다. 가끔은 자신에게 이렇게 묻기도 한다.

‘나는 지금 잘 지내고 있는 걸까? 굳이 이렇게 힘들게 살 필요가 있는 걸까?’


하지만 내 몸이 먼저 안다. 지금 아무리 힘들어도 아침에 일어나 하루 종일 할 일이 없는 것보다 더 괴로운 게 없다는 것을. 그보다 더 적극적인 의미가 있다. 배우는 즐거움이다. 한동안 책과 거리를 둔 인생을 살아야 했지만 지금 나에게 가장 가까운 친구는 책이다. 내 인생에서 가장 독서를 많이 하는 시기가 바로 지금이다. 집 근처 도서관에 들러서 책을 빌리는 게 일과가 된 지 오래고, 수입의 일정량은 반드시 책을 사는 데 쓴다.

나이 들면서 눈이 쉽게 피로해지기 때문에 오랜 시간 독서를 지속하기 힘들지만 지식산업에서 일하자면 불가피하다. 중요한 부분에 포스트잇이나 분류표를 붙이고, 노트나 컴퓨터에 메모를 한다. 느긋한 책 읽기가 아니라 매우 적극적인 독서 행위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가장 많이 배우는 사람은 독자나 수강생이 아니다. 저자이자 강연자인 나 자신이다.

요즘 내가 정기적으로 강연하는 곳 가운데 ‘서울시 50플러스 재단’ 산하의 기관들이 있다. 직장에서 퇴직을 앞두고 있거나 퇴직한 분들 대상으로 제2의 인생 설계를 안내하는 곳인데, 강연 첫날의 풍경은 대개 비슷하다. 처음에 강의실에 들어오는 분들의 얼굴 속에서 기대 반, 의심과 회의 반쯤 섞인 표정을 읽을 수 있다. 이 과정의 특성상 일방적으로 가르친다는 느낌이 들면 안 된다. 함께 배운다는 분위기가 매우 중요하다. 마음이 먼저 열려야 귀도 열리는 법이니까.

그러하기에 나는 종종 파워포인트 처음 배우던 날의 추억을 소개한다. 오랫동안 내가 일하던 분야는 파워포인트와 거리가 멀었기에 쓸 기회가 없었다. 그리고 어쩌다 다른 조직 전체의 책임자가 되었을 때는 직원들이 만들어주었기에 배울 기회를 놓쳤다. 어느 날 갑자기 강연이라는 일을 하게 되면서 불가피하게 파워포인트를 사용해야 했다. 시간이 급해서 아내에게 가르쳐달라고 했지만, 부부끼리 가르치고 배우면 안 된다는 교훈을 알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정말이지 운전 연습과 파워포인트, 그리고 글에 대한 평가 등 세 가지 작업은 부부끼리 할 일은 아닌 것 같다.

그러한데도 나이 들어 배우는 파워포인트는 신세계였다. 이미지가 움직이고, 동영상이 춤추는 작업은 새로운 창의성을 요구했다. 요즘 일부 기업의 최고경영자(CEO)들이 파워포인트를 내부 문서로 금지한다고 하지만, 강연장에서 이를 대체할 만한 것은 별로 많지 않다. 강의와 강연은 단순히 책에 쓰여 있는 글과 정보를 입으로 옮기는 기능이 아니기 때문이다. 책이나 방송과 다른 제3의 미디어라고 할 수 있다.

나이 들수록 손으로 만지면서 배우는 게 중요하다. 특히 육안으로 확인되면 될수록 좋다. 왠지 불안하고, 불만이 많아지며, 불신이 늘어나는 ‘3불’의 시기이기 때문이다. 눈 깜짝할 사이에 시간이 흘러갔다는 것에 당황하고, 세상에 뒤처지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이유 없이 자신에게 화가 난다.

그런 점에서 최근 들은 지인의 얘기가 신선했다. 그는 최근 직장에서 명예퇴직했다. 그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일했고 능력을 발휘했지만, 세상은 그의 편이 아니었다. 이럴 때는 먼저 마음의 독가스를 배출해내야 하는데, 그러려면 추상적이고 막연한 것보다 구체적인 것에 몰두하는 게 좋다. 심리적으로 위안과 보람을 주는 까닭이다. 그가 새롭게 배우기 시작한 것은 과자 굽기.

“열심히 쿠키를 굽고 있어요. 만드는 기쁨도 있지만 요리 도구를 고르는 재미도 커요. 만들고 난 뒤 아내가 출근할 때 몇 개씩 챙겨줍니다. 그리고 따로 사시는 어머니에게 가져다드리면 동네 노인들에게 얼마나 자랑하는지 몰라요.”

그는 직장에서 나온 지 100일이 지났는데, 이쯤이면 백일을 건강하게 이겨냈다. 뭐든 처음이 중요한데, 과자 굽기는 그에게 마음의 독소를 빼내는 디톡신 구실을 했다. 현재에 충실해야 나이 들어 행복해진다. ‘그때가 좋았지’ 하면서 자꾸 되돌아보지 말아야 한다. 세상살이에 괴롭고 몸살 날 때가 역설적으로 성숙해지는 시기다. 그 고통스러운 과정 동안 정신의 새로운 싹이 돋아난다. 89세까지 평생 현역의 길을 걸었던 르네상스의 거장 미켈란젤로에게 그 비결을 묻자, 이렇게 얘기했다고 하던가?

“나는 아직 배우고 있다.”

힘들수록 학습해야 한다. 성공이 아니라 성장을 추구하는 삶으로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 성장을 원하는 사람에게는 라이벌도 없고 질투도 없다.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손관승 CEO·언론인 출신의 라이프 코치l 저서『me, 베를린에서 나를 만났다』등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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