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관승의 새벽 3시

나는 아직도 내 고유의 언어를 찾아헤맨다

커피 만들기로 하루를 시작하며

등록 : 2019-05-30 15:35

크게 작게

아쉬움과 두려움을 뒤로하고

도전하는 마음으로 하루 시작

첫 직장 부장님의 시집에서

자기만의 언어를 엿보다

‘글로생활자’인 나의 하루는 언제나 ‘양탕국’을 끓이는 것으로 시작된다. 양탕국이란 구한말 인천항을 통해 들어온 커피의 첫 이름이다. ‘양탕’은 서양에서 온 탕이란 의미였으니 당시 사람들은 음료가 아닌 음식으로 생각했던 듯싶다.

양탕국을 마시며 나는 완전히 빠져나가지 않은 졸음을 쫓아내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새벽은 밝아오는 새날에 대한 설렘이 있는 반면 아직 어둠의 공포감이 가시지 않은, 명과 암의 기운이 팽팽하게 맞서는 접점이다. 1786년 9월3일 괴테가 카를스바트를 빠져나와 새로운 인생으로 출발했던 용기 있는 시간이기도 하다. 새벽 3시란 바로 그런 의미다. 아쉬움과 두려움을 뒤로하고 도전하는 마음이다.

이 땅의 커피 역사 또한 새벽 3시 정신과 무관하지 않다. 미신과 비합리적인 전근대의 오랜 깊은 잠에서 깨어나기 시작할 무렵에 커피가 들어왔으니 ‘탈미몽’의 음료라 할 수 있다. 이 땅에서 커피를 최초로 마신 사람은 누구였을까? 많은 이들은 고종을 말한다. 1895년 을미사변 뒤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뒤 카를 이바노비치 베베르 공사가 권한 커피를 마시고 커피 애호가가 되었다는 것이다. 당시 고종에게 커피를 만들어주던 이는 독일계 러시아 여인 손탁이었으며, 그가 고종의 후원으로 손탁호텔을 열고 그곳에서 커피를 팔았기에 손탁호텔을 국내 최초의 커피숍이라고 말한다. 1902년의 일이다.


그런데 고종보다 먼저 커피를 마신 사람이 있다. 구한말의 지식인 유길준이다. 1883년 28살의 나이에 보빙사(조선 최초로 미국 등 서방 세계에 파견한 외교 사절단) 수행원 자격으로 미국으로 떠나 유학까지 하고 유럽 각지를 두루 유람한 뒤 1885년 12월에 귀국해 쓴 책이 <서유견문>이다. 유길준은 이렇게 말했다.

“서양 사람들의 음식물은 빵, 버터, 생선, 고기류가 주식이고, 차와 커피는 우리나라에서 숭늉 마시듯 마신다.”

이것이 커피에 관한 이 땅의 최초 기록이다. 유길준은 최소한 고종보다 10년 먼저 커피를 만난 셈이다. 유길준은 전근대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시기, 그것도 동양인의 눈으로 서양을 바라보던 최초의 인물이었으니 ‘새벽 3시의 인간’형에 속한다. 서양과 동양, 전근대와 근대 사이의 경계에 서 있었으니 경계인이라 할 수도 있다. 나갈 때는 수염을 기르고 갓을 썼으며 도포 자락 차림이었다가, 귀국할 때는 면도를 하고 양복 차림으로 변한 과정이 이를 대변한다.

모든 게 낯설고 혼란스러웠고 두려웠겠지만, 유길준은 도전 정신을 잃지 않았다. 그는 미국 매사추세츠주 세일럼의 모스 박사 집에 머무르면서 세상이 얼마나 넓은지 비로소 크게 깨닫고 이렇게 적었다.

“민공이 나의 재주 없음을 못나게 여기지 않고 이곳에 유학시킨 뜻이 (여기에) 있었구나. 내가 게으른 습성대로 세월을 허송하는 것이 어찌 옳으랴, 라고 생각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민공이란 보빙사의 전권대사로 함께 간 민영익을 말하며, 그의 권유와 지원 덕분에 유길준은 공식 수행단과 떨어져 최초의 미국 유학생으로 공부하게 된다.

유길준이 한반도의 새벽 3시형 인간이었다면, 비슷한 시기 유럽에서도 커피를 즐긴 경계인이 있다. 불꽃 같은 삶을 살다간 화가 빈센트 반고흐다. 프랑스 남쪽 아를 시절 그는 동생 테오가 보내준 생활비로 그림에 필요한 물감 등을 사면 남는 게 별로 없었다. 그는 마른 빵에 커피 한잔으로 식사를 때워야 했다. 그가 동생에게 보낸 편지 내용은 대개 그림 얘기와 돈 얘기다. 커피 한잔의 허기는 화가에게 새로운 색을 발견하게 한다. 잠시 동거했던 고갱은 이렇게 증언했다.

“내가 아를에 도착할 무렵 빈센트는 자기 모색을 하고 있었다. 나는 연장자이기는 하지만 다 되어버린 인간이었다. 반면에 빈센트는 놀랍게 진보했다. 그는 자신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들여다본 모양이었다. 그때부터 저 작열하는 태양 아래서 태양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태양의 작품이 탄생한 것이다.”

고갱은 고흐보다 다섯 살 위였다. 그렇게 해서 태어난 위대한 작품이 ‘밤의 카페 테라스’(1888년), ‘해바라기’(1888년) 등이다. 마침내 고흐는 자신만의 새로운 색을 발견한 것이다. 유길준이 세상과 만난 비슷한 시기다. 훗날 피카소는 이렇게 평가했다.

“우리가 밀밭을 본다고 하자. 원래 밀밭은 완벽한 카드뮴 황색이 아니다. 그러나 화가가 그의 색을 자유롭게 결정하기로 마음먹고서 자연에서 찾을 수 없는 색 하나를 쓰게 되면 그림의 다른 모든 부분에도 역시 자연의 억압에서 해방된 색과 하모니를 사용하게 될 것이다. 바로 그것이 빈센트 반고흐를 흥미 있는 화가로 만들어준다.”

흔히 ‘크롬옐로’라 이르는 독창적인 노란색이다. 화가에게 색의 발견이 중요하듯 글을 쓰는 이들에게는 자기만의 고유한 언어가 있어야 한다. 얼마 전 내 사회생활의 첫 부장님으로 모셨던 시인 김형영님께 시집 한 권을 선물받았다. 옛 부장님은 시인의 말을 통해 이렇게 적고 있었다.

“내가 만일 나 자신을 온전히 떠나/ 세상과 만나는 시간이 오면/ 허공에 매달린 홍시 하나로도/ 하늘의 종을 칠 수 있을 것 같다.”

시인은 마침내 자기만의 언어를 발견하였다. ‘홍시’는 고유한 색, 곧 자기만의 정체성을 말한다. 모닝커피의 힘이었을까?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손관승 CEO·언론인 출신의 라이프 코치l저서『me, 베를린에서 나를 만났다』등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