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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움받던 60대 여성, 80대 할머니에 기부 보답

전기요금조차 못 내던 김해자씨, 서대문구 ‘100가정 보듬기’ 기부자로

등록 : 2016-12-01 13:07 수정 : 2016-12-01 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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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자씨는 한동네에 사는 조순례 할머니를 매일같이 찾는다. 잠은 잘 잤는지, 끼니는 거르지 않는지 곰살맞게 챙긴다. 삶의 절벽에 섰을 때 누군가 내밀어준 손길의 따뜻함을 알기 때문이다. 할머니가 노래를 부르다 눈물을 보이자 김씨가 안아주고 있다. 장철규 기자 chang21@hani.co.kr
“어머니, 조금 더 드셔야 해. 그래야 기력을 되찾아 밖에도 다닐 수 있지.” “내가 시집살이할 때 적게 먹던 게 습관이 돼서 그래.” 따뜻한 말을 주고받으며 식사를 하는 조순례(87) 할머니와 김해자(61)씨. 이내 조 할머니는 김씨의 청에 못 이겨 노래를 불렀다. “울려고 내가 왔던가, 웃으려고 왔던가~” 젊은 시절 마을의 가수로 불리던 솜씨에 김씨가 손장단으로 추임새를 넣는다.

얼핏 다정한 모녀지간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이웃 사이다. 3년 전 허리를 다친 조 할머니를 김씨가 매일같이 챙기면서 가깝게 지내고 있다. “어머니는 35살에 남편을 여의고 생선 장사와 잔칫집 요리 일 등을 하며 악착같이 6남매를 키워오셨대요. 그 세월이 내 처지와 너무 비슷했어요.” 김씨 역시 5년 전 생활의 큰 고비를 이웃의 도움으로 넘겼다. 김씨가 고비를 넘기는 데는 서대문구의 ‘100가정 보듬기’ 사업의 도움이 컸다.

‘100가정 보듬기’ 사업은 어려운 이웃에게 후원자를 일대일로 연결해서 돕는, 서대문구가 마련한 기부 프로그램이다. 지방정부의 도움은 임시적 성격이 강해 어려운 이웃이 자립하기까지 돕는 데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문석진 서대문구청장은 어려운 이웃의 자립을 도우려면 지속적인 지원이 필요하고, 그러려면 지역사회가 나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회복지공동모금회와 연계해 기부금이 전액 수혜자에게 투명하게 전달되는 시스템도 문 구청장이 아이디어를 냈다.

김씨는 넉넉지 않은 살림에도 봉제(미싱) 일과 목욕탕 청소 등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으며 쌍둥이인 두 아들을 열심히 키웠다. 그러던 2012년 암에 걸리면서 수술과 치료로 일을 할 수 없게 됐다. 생활비를 벌지 못하면서 김씨의 삶은 고비를 겪게 되었다. 게다가 중학교 2학년이던 쌍둥이도 사춘기로 방황을 시작했던 터라 고비가 한없이 어렵게만 느껴지던 시기였다.

“아이들이 공부해야 하니 제발 전기만은 끊지 말아주세요.” 김씨는 전기를 끊으러 나온 기사를 붙들고 눈물로 통사정을 해야 했던 적도 있다. 재기를 위해 당시 에어컨 설치와 수리 기술을 배우던 남편 수입만으로는 월세 40만원과 식비를 감당하기에도 모자랐다. 이런 딱한 사연을 들은 신남숙 서대문구 복지정책과 통합사례관리사가 김씨를 돕겠다며 찾아왔다. 그러나 김씨는 자신이 이웃의 도움을 받아야 할 처지가 되는 것을 용납하기 어려웠다 한다.

“나보다 힘든 처지인 사람도 많을 테고, 사춘기인 쌍둥이들이 자존심 상할까봐 걱정도 됐구요. 도움을 받을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도움을 거부하던 김씨를 신 관리사는 아홉 번이나 더 찾아가 끈질기게 설득했다. 감복한 김씨는 결국 이웃의 도움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 서대문구 ‘100가정 보듬기’의 156번째 결연 가정이 그렇게 힘겹게 태어났다.

김씨 가정의 기부자로 이중명 한국청소년보호협회 회장이 나섰다. 이 회장은 결연 첫 달에 70만원을 후원했다. 김씨는 그 돈으로 우선 밀린 공과금 등을 해결했다. 이후 다달이 30만원씩 받은 기부금으로 김씨는 그토록 아이들에게 해주고 싶었던 학원 공부를 시킬 수가 있었고, 3개월 만에 벼랑 끝 위기에서 벗어나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총 9차례에 걸쳐 300여만원의 기부금을 받은 김씨는 100가정 보듬기의 도움을 스스로 종료했다. 다시 목욕탕 청소를 시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김씨는 지난 8월 서대문구청에서 열린 100가정 보듬기 401호 결연식에 참석했다. 이번에는 수혜자가 아닌 기부자였다. 김씨는 다달이 10만원씩 3년 동안, 초등학생 자녀를 어머니가 혼자 키우는 한부모 가정을 돕기로 했다.


신 관리사는 “김 선생님이 생활비를 더 절약해 한 달에 20만원을 기부하고 싶다고 했지만, 아직 월세 부담이 있고 저축도 필요한 형편이라 기부금을 10만원으로 낮추고 끝까지 기부를 책임져 달라고 했다”며 기부 바이러스의 도미노 현상을 자랑스러워했다.

이중명 회장도 김씨가 다른 이웃의 기부자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의 일처럼 기뻐했다. “형편이 어렵던 어린 시절, 저 역시 이웃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제 삶에 행복한 기부 바이러스가 있는 거지요. 재기에 성공해 기부자로 나선 김씨가 정말 자랑스럽습니다.” 현재 김씨의 남편은 에어컨 기사로 일하고, 두 아들은 모두 대입 수시 전형에 합격하는 기쁨을 누렸다.

김해자씨의 청에 조순례 할머니가 가수 고운봉의 노래 ‘선창‘을 부르며 옛 추억에 빠졌다. 장철규 기자 chang21@hani.co.kr

100가정 보듬기 사업이 성과를 내기까지 문 구청장의 노력이 컸다. “종교의 사명이 한 생명을 구하는 데서부터 시작하는 것 아닙니까?” 문 구청장은 사업 초기 종교시설을 찾아다니며 기부자로 나서기를 요청했다. 100가정 보듬기 1호부터 10호까지 기부자 발굴은 모두 문 구청장이 성사시켰을 정도다.

문 구청장의 노력에 동화된 구청 직원들이 기부 참여와 새로운 결연 가정 발굴로 응답했다. 이 일이 입소문을 타자 기부가 새로운 기부로 이어져, 2011년 시작한 100가정 보듬기는 지금까지 총 426호 결연 가정을 낳았다. 누적 기부금도 지난달 말 기준으로 21억원을 넘어섰다.

100가정 보듬기의 회계 시스템을 관리하는 강윤진 서대문구 복지정책과 주무관은 “다달이 기부금이 잘 전달됐는지 확인하는 게 어렵긴 하지만, 재기에 성공하는 사례자들을 볼 때마다 정말 뿌듯하다”며 지역사회에서 더 많은 기부자가 나서주기를 기대했다. 100가정 보듬기 기부 참여와 도움이 필요한 이웃 소개 등 자세한 내용은 서대문구 복지정책과(02-330-8639)로 문의하면 된다.

김정엽 기자 pkjy@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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