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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원구 ‘초로기 활동가’들, “카페서 일하니 삶의 질 높아져”

노원구치매안심센터, 9~12월 동네카페 2곳서 주 1회씩 ‘초대날’ 운영
8명 초로기 치매 환자 2주에 한 번 주문받기, 매장 정리하기 등 활동

등록 : 2023-10-05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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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지 기능 떨어져도 ‘몸에 밴 일 경험’ 쓸 수 있어 좋아요”

인식개선 캠페인·굿즈 제작에도 참여

월 20여 시간 활동, 마트 이용권 받아

올해는 체계 갖추고 ‘내년엔 확대’ 기대

노원구 치매안심마을에 있는 카페 2곳에서는 매주 수요일이나 목요일 2시간 특별한 활동이 펼쳐진다. 65살 이전에 치매 증상이 나타난 경증 치매 환자인 ‘초로기 활동가’가 대문 밖으로 나서는 ‘초대날’이다. 인지 기능은 떨어지지만 신체 능력은 여전해 사회활동 욕구가 있다는 데 주목해 노원구치매안심센터가 지난 9월20일부터 올해 연말까지 추진하는 사업이다. 사진은 9월27일 상계1동 카페 ‘커피향기’에서 열린 초대날 모습. 김세인씨가 직접 내린 커피를 담은 쟁반을 손님에게 내놓고 있다.

‘오늘은 초대날, 초로기 활동가의 사회활동을 지원합니다.’

지난 9월27일 노원구 상계1동 주택가에 있는 카페 ‘커피향기’ 출입문에 붙은 큼지막한 포스터에 쓰인 문구다. ‘초대날’은 ‘초로기 활동가’(65살 이전에 증상이 나타난 경증 치매 환자)가 대문 밖으로 나서는 날의 줄임말이다. 노원구치매안심센터가 지역 초로기 치매 환자의 사회활동을 돕기 위해 동네 카페 2곳에서 수요일이나 목요일마다 2시간씩 돌아가며 연다. 8명의 초로기 활동가가 12월까지 석 달 동안 2주에 한 번꼴로 참여해 주문받기, 매장 정리하기, 커피 내리기, 인지 체험보조 등을 한다.

커피향기에서 열린 두 번째 초대날에 박상철(66)씨와 김세인(64)씨가 참여했다. 아이보리색(상아색) 앞치마를 두르고 짙은 남색 베레모를 쓴 두 사람의 옷차림은 단정했다. 초로기 치매를 앓지만, 여느 깔끔한 중장년 모습과 다르지 않다. 박씨가 손님의 주문을 받아 포스기에 입력하자 점주 박윤진씨가 옆에서 “잘하셨어요”라고 격려하면서 도왔다. 커피머신 앞에 선 김씨는 커피를 내렸다. 두 사람은 다소 느리지만, 실수 없이 잘 진행했다. 김씨가 “주문하신 커피 맛있게 준비했습니다”라고 말하며 음료를 담은 쟁반을 손님에게 내놓았다.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라테를 정성스레 만든 그의 얼굴에 뿌듯함이 묻어났다.


카페 출입문에 초대날을 알리는 포스터가 붙어 있다.

초대날은 노원구치매안심센터가 초로기 치매 환자의 사회참여 프로젝트로 추진하는 사업이다. 올해 복지부 치매안심마을 우수 선도사업으로 6월에 선정돼 예산 지원을 받았다. 여기에 시비와 구비를 매칭해 예산 4700만원을 마련했다. 초로기 치매는 노인성 치매에 견줘 진행 속도가 빠르고 돌봄이 필요한 기간이 훨씬 길다는 특성도 있다. 센터는 치매 돌봄의 사각지대 문제를 풀어가는 방향으로 프로젝트를 기획했다.

지역 치매 환자의 9%(약 1천 명)를 차지하는 초로기 주민 가운데 경증의 경우, 인지 기능은 떨어지지만 신체 능력은 여전해 사회활동에 대한 욕구가 있다는 데 센터는 주목했다. 이번 프로젝트 기획 때 일본 도쿄도 마치다시 사례를 참고했다. 마치다시는 2016년부터 스타벅스 매장들을 치매카페로 지정해 운영해오고 있다. 정해진 날짜와 시간에 정기적으로 치매 환자와 가족이 매장을 찾고 일반인들도 치매 환자를 친근하게 받아들이도록 꾸린다.

센터는 치매 친화 환경 조성과 함께 한 걸음 더 나아가 경증 초로기 치매 환자들이 사회활동도 경험할 수 있게 추진했다. 참여자들은 카페에서 일 경험을 하고 인식개선 캠페인과 굿즈(머그잔 등) 제작 등의 활동을 한다. 평균 월 20여 시간, 시간당 1만원씩 계산해 생필품을 살 수 있는 지역 마트 상품권을 받는다. 정나나 총괄팀장은 “일상생활을 이어가며 치매 이행을 늦출 수 있게 초로기 활동가들을 돕고 치매 친화적으로 지역주민의 인식을 개선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고 했다.

박상철씨가 손님의 주문을 받아 포스기에 입력하고 있다.

프로젝트에 함께할 동네 카페를 찾기 위해 센터 담당자들은 7~8월 두 달 동안 50여 곳을 찾아 제안했다. 처음에는 파급력을 고려해 대형 프랜차이즈 매장 문부터 두드렸다. 점주와 본사 모두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며 거절했다. 대부분의 동네 카페 반응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목표인 5곳을 채우지 못했지만, 다행히 상계1동의 커피향기를 비롯한 2개 카페 점주가 참여하겠다고 마음을 열어줬다. 나규필 선임 사회복지사는 “좋은 취지의 사업에 작은 힘이라도 보태겠다는 선한 동기로 참여해주셨다”고 전했다.

커피향기는 고정적으로, 나머지 카페는 여건에 따라 유동적으로 참여한다. 센터는 카페 이용권을 체험존 이용자와 봉사자들에게 나눠준다. 커피향기의 점주 박현진씨는 치매 가족을 돌봤던 경험이 있다. 20여 년 전 할아버지가 10년 정도 치매를 앓았다. 당시만 해도 사회적 돌봄이나 지원 프로그램이 거의 없어 집에서 가족들이 오롯이 부담해야 했다. 박씨는 “치매 환자 가족의 고충과 당사자의 어려움을 이해하기에 센터가 방문해 제안했을 때 고민 없이 응했다”고 했다.

프로젝트 참여자는 센터에 등록한 초로기 치매 환자 60여 명 가운데 사회활동을 할 수 있는 경증의 20여 명을 대상으로 모집해 최종 8명을 정했다. 이들은 인지 치료와 카페 종사자가 직접 하는 직무교육을 받은 뒤 노원실버카페에 가서 실습도 했다.

30여 년 몸에 밴 경험을 살려 김세인씨가 머신을 이용해 커피를 만들고 있다.

초로기 활동가들은 치매 환자도 충분히 일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줬다. 뇌경색을 앓은 뒤 63살에 치매 판정을 받았던 박상철씨도 활동에 제약이 생기면서 집에만 있었다. 센터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집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카페에서 주문도 받고 매장 정리도 하며 인지 체험존에서 진행 보조도 한다. 박씨는 “아직 사람들과 눈 마주치는 게 어색하지만, 그래도 사람들을 만나고 할 수 있는 일이 있는 게 좋다”며 “이런 활동으로 인지 기능이 더 나빠지지 않았으면 한다”고 했다.

김세인씨는 50대 후반 이른 나이에 치매 증상이 나타났다. 30년 넘게 해온 커피숍을 지인에게 넘기고 거의 집에서만 지냈다. 첫번째 초대날엔 기존에 자신이 다뤘던 장비와 달라 파악하는 데 시간이 좀 걸렸지만 두번째 날엔 기기 다루기가 한결 수월해졌다. 그는 “커피 만드는 일을 다시 해보니 예전에 했던 것이 기억났다”며 “속도는 예전만 못하지만, 몸이 기억해 힘들지 않게 할 수 있다”고 했다. 점주 박씨는 “베테랑답게 잘하셔서 맡겨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김씨는 “(치매에 걸려도) 자기 경력을 되살려 활동할 수 있다면 본인과 가족의 삶의 질도 나아질 거다”라고 했다.

언어장애가 있을 정도로 뇌경색이 심하게 온 뒤 치매증상이 나타난 임서우(67)씨는 62살에 치매 판정을 받았다. 임씨는 “처음엔 말도 잘 못하고 인지 기능도 많이 떨어졌는데 센터 프로그램에 꾸준히 참여하면서 이전보다는 나아지고 있다”며 “집 밖으로 나와 활동하는 게 가능함을 확인할 수 있어 참 좋다”고 했다.

9월27일 상계1동 카페 ‘커피향기’의 초대날에 인지 체험존에서 한 이용자가 가상현실(VR) 장비를 활용해 인지 회상 체험을 하고 있다.

사실 2시간 정도지만 점주 입장에서 좀 번거로울 수 있다. 실제 아무리 베테랑이더라도 카페마다 포스 운영시스템이나 메뉴가 달라 카페에 맞게 새로 배워야 한다. 커피향기의 점주 박씨는 “처음부터 귀찮다고 생각했으면 안 했다”며 “누가 오든 가르치고 배우는 과정을 거쳐야 하기에, 생각하기 나름이다”라고 덧붙였다. 박씨는 치매 환자를 겪은 경험이 있고 마음의 준비가 돼 있어 용기를 낼 수 있었다. 그는 “다른 카페 점주에게 어려울 수 있겠지만, 생각을 바꾸고 마음을 열면 할 수 있다”며 “초로기 활동가들이 집 밖으로 나올 수 있어 좋다며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면 보람도 느낀다”고 덧붙였다.

프로젝트에 관심을 보이는 손님도 있다. ‘좋은 일 하시네요’라며 인사말을 건네거나 테이블에 올려진 치매 자가테스트를 유심히 보기도 한다. 이날 커피향기를 찾은 상계1동 주민 이한숙씨는 인지 체험존을 운영하는 센터 직원에게 치매 검진 방법을 문의했다. 이씨는 20대 땐 부정적으로 생각했던 치매를 나이가 들어가면서 주위에서 자주 듣게 돼 자신이나 가족, 지인의 일처럼 가깝게 느끼고 있다. 그는 “치매는 누구나 걸릴 수 있기에 연로한 부모님 생각도 나고 곧 내 일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며 “커피향기 사장님이 대단하고 멋있다”고 칭찬했다.

센터는 초로기 치매 환자의 사회활동 지원 프로젝트를 내년에도 이어갈 계획이다. 정나나 팀장은 “올해는 체계를 갖추는 데 집중했고, 내년부터는 확대할 수 있길 기대한다”며 “복지부, 서울시, 노원구 등 공공의 지원과 함께 지역에서 돌봄 체계가 만들어졌으면 한다”고 했다. 오승록 노원구청장은 “초로기 치매 환자가 해마다 늘고 있는 만큼 이들이 사회와 단절되지 않도록 구 차원의 지원이 필요하다”며 “치매에 대한 열린 소통으로 치매 친화적인 노원을 만들어가겠다”고 밝혔다.

이현숙 선임기자 hslee@hani.co.kr

사진 노원구 제공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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