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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핑카서 라면도 먹고, 고민상담도 해요”

송파구의 청소년 상담카, ‘유레카’ 지난해 1200명 고민 털어놓아

등록 : 2017-03-30 15:40 수정 : 2017-03-30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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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7일 밤 송파구 문정근린공원에 설치된 청소년 고민상담소 유레카 옆에서 학생들이 상담에 앞서 상담 선생님과 담소를 나누고 있다. 조진섭 기자 bromide.js@gmail.com
“친구들이 저만 빼고 카톡방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알았어요.”(ㄴ양·16) “매번 심한 농담을 하는 친구 때문에 힘들어요.”(ㄱ군·15) “선생님이 발표를 시키면 도망가고 싶어요.”(ㄷ군·18)

중·고생들이 이런 고민을 부모님이나 학교 선생님에게 털어놓은 게 아니다. 송파구에서 속마음을 말할 곳이 없는 청소년들을 위해 마련한 특별한 캠핑카 안에서 고민 상담이 이뤄졌다. 상담 선생님을 태우고 송파구 곳곳을 다니는 캠핑카 ‘유레카’(Your dream Raising Car)가 바로 청소년 고민상담소. 지난 23일 문정근린공원 안에서 ‘유레카’를 찾았다.

저녁 7시가 되자 유레카에 불이 켜졌다. 캠핑카 옆에는 메모지, 볼펜, 간식거리가 놓인 테이블 있고, 그 앞에 함지훈(가명·18)군이 앉아 있었다. 함군이 처음 유레카를 알고 찾은 지는 2년이 넘었다. “성격이 소심한 편이라 하고 싶은 말도 잘 못했어요. 유레카에 와서도 라면만 먹고 가거나 선생님과 짧게 이야기 나누는 게 다였죠. 그렇게 열 번 정도 지났나? 선생님이 이런 말씀을 해주셨어요. ‘모든 사람들을 신경 쓰며 살지 않아도 괜찮아. 어떤 것도 너의 탓이 아니야.’”

그때를 기점으로 함군은 변하기 시작했다. 함군은 다른 사람의 시선에 더 이상 얽매이지 않고 하고 싶은 말을 하고, 하고 싶은 일을 하나씩 해나갔다. “간호사가 될 거예요. 유레카를 통해 어떻게 준비하면 되는지도 알게 됐어요.” 함군은 상담이 필요하지 않은 요즘도 유레카에 자주 들러 직업 정보나 일상을 선생님, 친구들과 나누고 있다.

유레카는 2015년 9월 첫 운행을 시작했다. 송파구가 현대자동차 공모사업에 응모해 재정 지원을 받아 한빛청소년대안센터에 운영을 맡기고, 청소년들의 이야기를 들어줄 선생님은 상담·청소년 분야를 전공한 자원봉사자를 모집해 배치했다. 캠핑카라는 특이한 외관 덕에 학생들의 발길이 잦아지고 상담 건수가 늘면서 지난 한 해만 연인원 1200명의 학생들이 유레카를 찾았다. 그런데 기업 지원 기간이 지난해 종료됨에 따라, 올해 운영 중단 위기를 맞기도 했다.

하지만 1년간 유레카를 운영해본 송파구는 청소년들에게 상담이 필요하고, 유레카가 한몫을 톡톡히 한다고 판단했다. 구 자체 예산 5000만원을 편성해 위탁 운영을 이어가기로 결정했다.

송파역, 잠실역과 오금공원, 문정공원 등 지역 중·고등학생들이 자주 오가는 곳에 유레카가 간다. 화요일부터 토요일 저녁 7시와 밤 11시 사이 상담실을 여는데, 요일마다 지정된 곳을 찾아가니 유레카가 오는 날이면 학교가 끝난 뒤 아이들이 문을 두드린다. 캠핑카에는 각종 보드게임과 간식, 푹신한 의자가 있어 아이들이 편하게 놀고 가기도 한다.

“상담이라고 무조건 성격검사나 사전조사를 하는 건 아니에요. 일단 이야기를 들어주는 걸로 시작합니다. 아무 말 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그렇게 시간이 지나다 보면 저절로 아이들이 마음을 열어요.” 심리상담 자원봉사자 김연주(33)씨는 대학원에서 상담교육을 공부하고 있다. 그는 며칠이고 몇 달이고 아이들이 스스로 고민을 털어놓을 준비가 될 때까지 기다려주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지난 17일 학생들이 송파구 문정근린공원에 설치된 청소년 고민상담소 ‘유레카’ 안에서 상담 선생님께 적성검사를 받고 있다. 조진섭 기자
김씨처럼 유레카 자원봉사자로 나서고 있는 상담사만 90명 가까이 된다. 대학에서 상담이나 청소년 관련 과목을 전공했거나 상담사 자격증이 있는 사람을 중심으로 봉사자를 모집하고 3일간 기본교육, 정기 보수교육을 하고 있다. 주요 진로탐색 검사 도구인 디스크 검사(DISC·행동유형테스트), 생애설계 검사, 다중지능 검사, 직업흥미적성 검사 등은 상담 자원봉사자가 진행·해석까지 제공할 수 있도록 교육한다. 2차 전문 상담이 필요한 학생이 있으면 기관에 연계하는 단계까지 책임지고 있다.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점은 상담의 질을 유지하기 위해 많아야 주1회, 매달 4회 정도로 상담 봉사 횟수를 제한하는 것이다. “봉사자가 너무 많은 상담을 진행하면, 아이들 한명 한명의 이야기를 제대로 들어줄 수 없어요. 또 일정이 부담돼 봉사를 그만둘 가능성도 있고요.” 한빛청소년대안센터 한희규 팀장이 이유를 설명했다.

“여기 오면 선생님이 제 이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들어줘요. 그리고 공감을 해주시죠. ‘이렇게 해보면 어떨까? 많이 속상했겠구나.’ 이런 말들 하나하나가 전부 다 힘이 돼요.” 김조은(가명·17) 양은 반 친구들에게도 유레카를 소개한다고 했다. “유레카가 없었다면요? 지금쯤 노래방에 있지 않을까요? 아니면 집에서 휴대폰 하거나. 예전에는 고민이 생기면 잊으려고만 했거든요.”

오늘도 유레카는 아이들의 답답하고 무거운 마음을 덜어주려 송파구 골목골목을 누빈다.

정고운 기자 nimoku@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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