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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만 60차례 이상…상생의 거리가게 탄생

이수사계길·컵밥거리 현장 르포

등록 : 2018-11-22 15:14 수정 : 2018-11-22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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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가게 상인과 대화해 51곳서 24곳으로 축소, 걷기 편한 거리로

이수·컵밥거리 동작형 대화 해법 성과, 전기·물 공급하고 영업 보장

40년 이상 노점이 난립했던 이수역 12~14번 출구 길이 동작구와 거리가게 상인 간 긴 대화와 협상을 거쳐 지난 9월 상생의 길로 거듭났다. 다니는 길이 1m 이상 넓어져 사람들이 걷기 편하게 바뀌었고, 상인들도 전기와 상하수도 시설을 갖춘 번듯한 가게에서 몸과 맘 편하게 장사할 수 있게 됐다.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김상수(54)씨는 1997년 외환위기(IMF) 사태 때 다니던 회사가 부도를 맞으면서 말 그대로 거리로 나앉았다. 생계 대책이 막막했던 그는 손수레를 끌고 가 지금 동작구 이수역 근처에 포장마차를 꾸렸다. 떡볶이, 튀김, 어묵 등을 파는 ‘또바기분식’이 그의 무허가 거리가게(노점) 상호. 무허가다 보니 포장마차와 물통을 보관소에다 맡기고 찾아오는 번거로움은 기본이다. 음식 조리에 필요한 전기는 주변 상가에서 끌어다 쓰고, 하루 20ℓ짜리 물통 6통씩을 들고 다니는 수고를 해야 했다. 몸도 고달프지만 행정 당국의 단속도 늘 신경 쓰여 20년간 거리가게 생활을 하면서 심적 부담도 컸다.

지난 9월부터 김씨의 또바기분식은 더 이상 단속 대상이 아니다. 오히려 전기·상하수도 등 가게 영업에 필요한 기반 시설을 관할 동작구청에서 지원받는다. 포장마차 대신 가로 2.5m, 세로 1.9m 크기의 상자형 가게에서 김씨는 “몸과 맘 다 편하게” 장사한다. 게다가 이 가게는 구청에서 어엿하게 주소지(사당동 144-4 또바기분식)까지 받아 여기서 우편물이나 택배물도 받을 수 있다. 구청에 연간 60만~65만원의 거리 점용료를 내고 떳떳하게 영업하게 된 뒤 모습이다.

2016년 9월부터 동작구청이 이수역 12~14번 출구 300m 구간에 난립한 거리가게를 정비하기로 한 뒤, 거리가게 상인과 60여 차례 대화와 협상을 한 끝에 이룬 결과다. 동작구청 쪽은 “지하철 환승역과 다양한 버스노선 정차 탓에 통행 인구가 많은데, 노점상(거리가게 상인)이 밀집하면서 보행로를 과다하게 점유함에 따라 보행에 불편을 초래하고, 민원이 끊임없이 제기돼 거리 정비에 나서게 됐다”고 밝혔다.

그러나 일방적인 행정 단속보다는 상인들과 꾸준히 대화하고 협상해 상생의 길을 찾았다고 한다. 그 결과 이수역 주변 노점 51곳은 24곳으로 절반 이상 줄었다. 또한 보행도로를 1m 이상 차지했던 거리가게가 일정한 규격으로 규모가 줄어들면서 보행자들이 걷기 편한 쾌적한 거리가 됐다. 이 거리는 주민 공모를 거쳐 ‘이수사계길’이라는 새 이름을 얻고, 지난 9월 새로 태어났다.

‘혼잡과 단속의 거리’에서 ‘쾌적과 상생의 거리’로 탈바꿈한 것이다. 영업할 수 있는 공간이 그전보다 좁아지고 매출도 조금 줄었지만 상인들은 대체로 만족스러워한다. 이곳에서 30년 가까이 꼬치구이를 파는 터줏대감 장아무개(70)씨는 “비바람 불 때 손수레를 끌고 다니는 일이 힘들었는데, 이제 그럴 일이 없어서 좋다. 장사도 점점 살아나고 있다”고 했다.


또바기분식 김씨도 “협상하는 과정에 불협화음도 있었지만 동작구청에서 상생 차원으로 편의를 많이 봐줬다. 영업을 다시 한 지 2개월 됐는데 만족한다”고 했다. 서울시에서도 지난 8일 현장에 직원을 보내 가게 모습을 촬영하고, 상인과 시민들 반응을 탐문하고 돌아갔다. 서울시는 이수사계길 조성을 가로 정비사업 모델로 선정해, 각 자치구에 홍보 사례로 활용할 계획이라 한다. 이수사계길은 지난 8일 사단법인 한국 FM학회가 주관하는 한국FM대상 도시디자인 부문 대상을 받았다.

1년4개월 동안 대화하고 협상할 때 가장 큰 쟁점은 노점 수 줄이기였다. 구청은 “공간은 한정돼 있는데 모두 같이 갈 수 없다. 주민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가게를 줄일 수밖에 없지 않냐”고 주장했고, 거리가게 상인들은 “가능한 한 다 같이 가야 한다”고 맞섰다. 또바기분식 김씨는 “(노점상) 집행부가 아주 힘들었어요. 우리 주장만 할 수 없었기 때문이죠”라고 말했다.

“새 거리가게가 매매와 상속이 안 되다 보니 연세 많은 분 중에 스스로 그만두는 분도 생기고, 재산 조회에 걸린 분도 있었어요. 우리 입장에서는 20년 이상 이곳에서 장사했는데, 보상 없이 나가니 마음이 아팠죠.”

이수사계길의 성공적 조성은 앞서 ‘노량진 컵밥거리’ 이전 경험이 없었다면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애초 노량진 컵밥거리는 하루 유동인구 12만 명의 대표적 역세권 노랑진역 맞은편에 있었다. 공무원 시험 등 각종 고시 합격을 목표로 한 청년들의 한 끼 해결 공간으로 자리잡으면서 외국까지 이름이 나, 국내외 관광객 필수 코스로 떠올랐으나 그 때문에 극심한 통행 혼잡도 따라왔다.

그전까지 동작구는 철거나 과태료 부과 등 규제 위주의 거리가게 정비계획을 추진했지만, 민선 6기 구청장에 당선된 이창우 구청장은 구정 운영 기조를 ‘소통’에 두고 새로운 해결책을 찾았다.

구는 컵밥거리는 보존하되 주민들의 불편을 줄이는 방안으로, 만양로 입구~사육신공원 맞은편 약 270m 구간으로 컵밥거리 이전 결정을 내렸다.

이를 위해 구는 2014년 10월 행정력을 동원해 단속하는 대신, 처음으로 거리가게 상인, 주민, 구청장 등이 함께 모인 ‘거리가게 정책 토론회’를 열었다. 서로 의견을 자유롭게 펼치며 오랜 갈등을 풀고, 각자의 입장을 이해하는 계기가 됐다고 구청 쪽은 밝혔다. ‘기업형 거리가게 불가, 생계형 거리가게는 상생 도모’라는 동작형 대원칙이 마련된 것도 그때였다.

컵밥거리 성공적 이전, 이수사계길 닦아

노량진 컵밥거리 모습.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유동인구 12만 명 혼잡 피하기 위해

2014년 10월 구청장 참여한 토론회

‘기업형 불가, 생계형 상생’ 원칙 확립

구와 거리가게 상인의 지속적인 대화와 협의 결과 32곳이었던 거리가게가 이전에 동의해, 28곳이 규격화된 상자형 가게로 옮기고, 음식점을 뺀 꽃집 등 4곳은 현 맥도날드 옆 골목으로 이전했다. 가게마다 전기, 수도, 하수처리 시설을 비롯해 개별 계량기가 설치되고, 가게 특성을 반영한 상호도 표기됐다.

컵밥거리에서 베이컨, 삼겹살 등 컵밥을 3천원에 파는 ‘현주네’의 하현주(58)씨는 “처음 옮긴다고 해서 이곳에 왔을 때 한 시간에 행인이 10명도 안 지나갔다. 처음에는(이전에) 반대도 하고 겁도 났지만, 컵밥거리라는 이정표가 생겨 불도 들어오고 손님들 쉼터도 생겨 좋다”고 했다. 인강(인터넷 강의) 활성화로 노량진에 사는 청년 인구가 줄어들면서 컵밥거리를 찾는 사람도 조금 줄었다고 한다.

‘컵밥거리 지역장’을 맡으며 꼬치구이를 팔고 있는 전재수(39)씨는 “거리가게는 전국에 꽤 있는데, 컵밥거리만큼 깨끗하게 잘 정비된 데는 없다고 손님들이 이야기한다”고 말했다. 19살 때부터 거리가게를 시작해 노량진에서만 11년째 장사를 하는 전씨는 하루 평균 매출 30만원을 기록하는 베테랑이다.

“거리가게라도 지저분하게 하면 사람들이 안 찾기 때문에 1년에 두 번 회원들끼리 자체 청소도 해서 소비자 만족도가 높아지는 추세입니다. 구청장님이 저희와 만나서 많은 대화를 하고 지원을 해주어서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가게마다 지붕을 씌워줘 비올 때 손님들이 편하게 식사할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다만 올해 처음 동작구청에서 실시한 야간 난장 축제가 더 활성화돼서 손님이 더 늘었으면 좋겠어요.” 다섯 번째 컵밥거리를 찾는다는 임준(25)·김하은(19)씨는 “싸고 빨리 먹기에 좋다”고 말했다.

김도형 선임기자 aip209@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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