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우의 서울 백년가게

한국 재즈클럽의 산 역사, 연주자의 보금자리

이태원 ‘올댓재즈’ since1976

등록 : 2018-03-01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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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누스’와 더불어 양대 재즈클럽

상업적으로 성공한 이태원의 명물

화교 출신인 마명덕이 1976년 오픈

재즈 마니아 진낙원씨가 클럽 키워

90년대 초 재즈 붐 타고 기반 다져

2011년 이태원 뒤편으로

클럽 이전 뒤 객석 140석 규모로

젊은층 재즈팬으로 이끄는 역할


재즈클럽 올댓재즈는 나이트클럽으로 쓰던 현재 건물로 이전하면서 바에서 클럽 스타일로 분위기가 바뀌었다. 홀은 1, 2층 합쳐 140석 규모로 입석까지 최고 300명이 들어갈 수 있다. 복층 구조에 지붕이 개폐식이어서 노천 공연도 할 수 있다. 날마다 두 팀이 저녁 6시30분부터 11시까지 공연한다. 입장료 5000원. 주 메뉴는 주류와 음료수, 파스타.

1975년, 지금은 뮤지컬의 고전이 된 <시카고>가 뉴욕 브로드웨이 무대에 오른다. 1920년대 욕망이 들끓는 도시 시카고를 배경으로 한 뮤지컬 <시카고>는 끈적이는 보컬과 관능적인 춤으로 단숨에 관객을 매료시켰다. 메인 테마 ‘올 댓 재즈’(All That Jazz)는 당시 시카고 뒷골목의 재즈클럽 이미지를 생생하게 노래한다.

“차에 시동을 걸어(Start the car)/ 내가 신나는 곳을 알아(I know a whoopee spot)/ 진은 차가워도(Where the gin is cold)/ 피아노는 뜨거운 곳(But the piano’s hot)/ 그게 바로 재즈야!(And all that Jazz!)”

#1년 뒤인 1976년. 지구 반대편 서울 이태원 거리에 30여 평 규모의 작은 재즈바 하나가 문을 연다. 이름은 ‘올댓재즈’. 뉴욕에서 뮤지컬 <시카고>가 이제 막 롱런 가도에 접어든 무렵이었으니, 카톡도 페이스북도 없던 시절에 참으로 기민한 ‘문화 수용’이었다.

이태원 대로변 건물 2층에 처음 터를 잡은 올댓재즈는 한국 최초의 전문 재즈 공연 클럽이다. 시카고 밤거리의 비속어 ‘죽여주는군!’(jass it up!)에 어원을 둔 재즈가 ‘서양 음악’이란 뜻으로 우리나라에 소개된 것은 1920년대. ‘전라도 만석꾼 아들’ 백명곤이 상하이에서 악기를 사들여와 친구 홍난파 등과 함께 서울의 YMCA에서 재즈 콘서트를 연 것이 1926년이었다.(<한국재즈 100년사>, 박성건) 올댓재즈는 실로 50년 만에 대중을 상대로 등장한 첫 재즈클럽이었던 것이다.

재즈클럽 올댓재즈는 2년 뒤 재즈가수 박성연이 신촌에 문을 연 ‘야누스’와 더불어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간과할 수 없는 의미를 지닌다. 두 클럽은 쌍두마차를 이루며 재즈 불모지라는 한국에 재즈 공연 무대를 제공함으로써 전문 연주자들이 자라는 토양을 만들고, 외국의 재즈 흐름을 수입해 전파하는 창구 역할을 했다. ‘빽판’(해적 음반)으로나 재즈를 들을 수 있었던 당시의 재즈 애호가들에게 두 클럽은 자욱한 담배 연기 속에서 “진은 차가워도 피아노는 뜨거운” 재즈의 성지였다.

특히 올댓재즈가 42년째 이태원 거리의 ‘기념물’처럼 건재하며 상업적으로도 성공한 클럽이 되어 있다는 사실은 놀라움 그 이상이다. 도시의 경기에 민감하고, 심지어 범죄에 연루되기도 하는 유흥가의 작은 재즈클럽이 비즈니스로서뿐 아니라 문화적 명성까지 누리며 장수하는 경우는 어느 나라나 흔한 일이 아니다. 뉴욕의 대표적인 재즈클럽 ‘블루 노트’의 역사가 40년이 채 안 된다는 사실을 안다면, 한국 같은 재즈 변방의 클럽이 40년 넘게 “망하지 않고” 존재할 수 있는 것은 “미쳤다”고 할 만한 열정과 사랑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현재 서울에는 소수의 크고 작은 라이브 재즈 무대가 바, 카페, 클럽 등의 형태로 이태원, 홍대 앞, 대학로 등지에 산재해 있다. 강남권에서는 ‘(원스 인 어)블루문’, 강북권에서는 올댓재즈와 홍대 앞의 ‘에반스’가 애호가들 사이에 ‘3대 문파’로 꼽힌다. 올댓재즈는 이들 중에서 가장 인지도가 높은 대중적 클럽으로 평가된다. ‘야누스’ ‘천년동안도’ ‘문글로우’ 등 여러 클럽이 경영난으로 존폐의 기로를 겪는 가운데서도 올댓재즈의 ‘클럽 경영’은 오히려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다. “재즈를 즐긴다기보다는 재즈클럽 특유의 분위기를 소비하는” 20~30대 젊은층, 특히 여성층이 올댓재즈의 주 고객층이 되면서부터다. 평일 저녁에도 두 팀의 공연이 열리고, 주말이면 140여 석의 좌석을 가득 메우고 대기 손님의 줄이 끊어지지 않을 만큼 호황을 누리고 있다. 올댓재즈가 성업하는 데는 이태원이라는 소비 중심의 국제 거리에 클럽이 자리하고 있는, 지리적 조건도 한몫하고 있는 듯하다.

콘트라베이스의 저음으로 시작돼 깊어가는 이태원 골목길의 밤에 재즈 선율이 흐른다. 펜·수채화 김경래 기자 kkim@hani.co.kr

#올댓재즈의 첫 ‘보스’는 화교 출신의 미국 국적자 마명덕이다. 뮤지컬 <시카고>의 메인 테마 ‘올댓재즈’가 1979년 연출가 밥 포시에 의해 같은 이름의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전에 이미 한국에 재즈클럽 올댓재즈가 출현할 수 있었던 데는, 그가 ‘해외여행이 자유로운 미국인 재즈 마니아’라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한국에서 대학을 나온 마명덕은 미군 문관의 신분으로 사설 카지노 등 여러 가지 사업에 관계했던 것 같다. 마명덕에게 클럽의 커튼 뒤는 사업상 필요한 비밀스러운 공간이었을 수도 있다.

1986년 마명덕이 ‘군수산업 스캔들’에 연루돼 거의 “망명에 가까운” 이민을 떠나게 되면서 올댓재즈는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마명덕에게서 올댓재즈를 넘겨받은 사람이 현재의 주인 진낙원(61)이다. 10대부터 재즈에 빠진 그는 19살에 올댓재즈 개업 손님이 된 이래 10년 동안 디제이와 지배인을 거치면서 올댓재즈 역사의 주역이 됐다. 일수 빚을 얻어가면서까지 그가 올댓재즈를 떠맡은 것은 마명덕을 비롯한 초창기 클럽 멤버들의 뜻이었다고 한다. 클럽의 정체성을 지켜갈 수 있는 적임자로 낙점된 셈이다.

“초등학교 4학년 때인가, 외삼촌 집 전축에서 흘러나온 연주에 꽂혀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들은 경험이 있다. 나중에 재즈를 접하고서야 그 곡이 폴 데스먼드의 명곡 ‘테이크 파이브’라는 걸 알았다. 재즈클럽은 그때 정해진 운명 같았다.”

새 주인을 맞은 올댓재즈는 국내외적으로 활발하게 외연을 넓혀나간다. 일본 재즈 프로모터 모리모토 노리마사, 유명 재즈뮤지션 히노 데루마사, 조지 가와구치 등이 올댓재즈를 창구 삼아 한국 진출을 도모했다. 이정식 등 재능 있는 연주자를 발굴해 외국에 소개하는 일도 자임했다. 두 나라의 재즈뮤지션들이 서울과 오사카 등을 오가며 ‘재즈 트레인’을 벌이기도 했다. 한국 최고의 색소포니스트 정성조가 타계하기 전까지 수십 년을 한 주도 거르지 않고 주말 연주를 벌인 곳, 이봉조, 길옥윤, 정성조의 계보를 잇는 이정식이 데뷔하고 나윤선, 말로 등 수많은 재즈의 별들이 재능을 가다듬은 곳, 마일스 데이비스 밴드의 케니 개릿이 손님으로 왔다가 정성조와 잼(즉흥 연주)을 벌여 재즈 팬들 사이에 두고두고 회자된 곳… 그곳이 올댓재즈였다.

#클럽의 명성은 높아갔지만 경영 상태는 늘 아슬아슬했던 올댓재즈에 뜻밖의 전기가 찾아왔다. 계기는 1994년 드라마 <사랑을 그대 품안에>의 대히트였다. 주인공 차인표가 올댓재즈에서 멋지게 색소폰을 부는 장면은 수많은 여성의 마음을 빼앗았고, 재즈에 대한 대중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장정일의 소설 <너희가 재즈를 믿느냐>(1994)가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재즈의 역사>(유이 쇼이치, 1995) <째지한 재즈 이야기>(선성원, 1995) <재즈 재즈>(장병욱, 1996) 같은 재즈 소개서와 해설서들이 쏟아져나온 것도 이 드라마의 성공이 계기였다. 올댓재즈도 이태원의 관광명소가 될 만큼 유명해지면서 클럽 운영은 날개를 달기 시작했다.

올댓재즈의 세 번째 전기는 2011년 클럽의 이전이다. 최고 60석이 만원이던 처음의 재즈바가 140석 규모의 공연장 형식 클럽으로 바뀐 것이다. “30년 이상 세 들어 있던 건물 주인이 타계한 뒤 새 건물주가 임대 조건을 바꾸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새로 물색한 곳이 근처 해밀톤 호텔 뒤의 나이트클럽 건물이었다.

이태원 해밀톤호텔 뒤에 자리 잡은 올댓재즈(이태원로27가길12) 입구. 클럽 로고는 1980년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은 영화 포스터에서 따왔다.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이 이전은 딜레마였다. 밀도 높은 공간을 선호하는 전통적인 재즈 팬들에게 클럽 스타일의 올댓재즈는 낯설었다. “재즈도 모르는 겉멋 든 젊은이들의 소란스러운 데이트 장소”쯤으로 여겨질 수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젊은이가 그런 과정을 통해 재즈에 입문하기도 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클럽으로서 올댓재즈가 맡은 역할을 과소평가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재즈 왕국이라는 일본의 클럽을 가보면 노인의 나라다. 일본 뮤지션 중에는 젊은이들의 열기로 가득 찬 한국 클럽을 부러워하는 이들이 많다. 젊은층의 유입이야말로 한국 재즈의 미래를 담보하는 게 아닐까?”

#기자가 클럽을 찾아간 어느 ‘불금’, 젊은 재즈그룹 ‘샤카밴드’가 재즈풍으로 편곡된 ‘셀부르의 우산’과 고전적인 재즈곡인 빌리 홀리데이의 ‘컴스 러브’를 잇달아 들려주고 있었다. 매력적인 여성 보컬 샤카를 중심으로 피아노와 색소폰 연주자 모두 뉴욕에서 재즈를 공부한 실력파들이다. 최근의 한국 재즈연주계는 질과 양에서 모두 폭발적 성장을 하고 있다. 전국의 대학 실용음악과에서 재즈 지망생들이 배출되고, 해마다 뉴욕과 버클리 등에서 유학파들이 돌아온다. 진씨는 “국제적으로 손색이 없는 뛰어난 젊은 연주가들이 등장하고 있다. 한국 재즈는 지금 더 높은 어떤 정점을 향해 치닫고 있는 중”이라고 한국 재즈의 미래를 낙관한다.

올댓재즈 주인 진낙원씨와 아들 성철씨. 사진을 전공한 성철씨는 얼마 전부터 클럽 일을 배우며 가업 승계에 나섰다. 서울 강남에 있는 록 중심의 엘피(LP)바 ‘온더그라운드’와 클래식 중심의 뮤직바 ‘더비스’도 진씨 가족이 운영하고 있다.

홀을 가득 채운 청중도 한결같이 젊다. 무대와 객석의 호흡이 내공 깊은 클럽만은 못하지만, 몰입의 분위기만큼은 뜨겁고 진지했다. 2층 홀에서 무대를 내려다보며 보스가 한창 클럽 일을 배우는 아들(진성철)에게 지나가듯 잔소리를 한다. “좀더 재즈에 녹아들어봐. 그래야 진짜 재즈클럽이야.”

이인우 선임기자 iwlee21@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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