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트 위에 흘린 땀방울, ‘잃어버린 꿈’을 이야기하다

1990년대 태어난 ‘슬램덩크’가 MZ 세대 마음 사로잡는 이유

등록 : 2023-03-02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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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8일 오후 용산역 영푼문고 <슬램덩크> 코너에서 한 시민이 비치된 책을 보고 있다.

연재 종료한 지 26년 만에 극장서 부활

개봉 초 3040 중심…곧 20대 크게 몰려

엄마 손에 이끌려 극장 찾은 MZ세대

수차례 관람…부모보다 더한 열성팬 돼


응원 상영‧특별관 개봉 등 영화관 활기

영화 상영 이후 원작도 100만 부 ‘불티’


입소문에 관객 300만…일 애니 1위 꿈꿔

“현재 우리에게 결핍된 무엇인가 보여줘

1990년대 농구 붐의 주역이었던 인기 스포츠 만화. 전세계적으로 1억7천만 부 이상 판매된 초대형 히트작. 1990년부터 1996년까지 일본에서 연재된 <슬램덩크> 이야기다.

티브이(TV) 애니메이션으로도 제작돼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이 작품이 최근 극장판 <더 퍼스트 슬램덩크>로 돌아오면서 다시금 거센 열풍을 일으키고 있다. 원작에 대한 향수가 있는 3040세대를 중심으로 입소문을 탄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10대와 20대 관객까지 끌어들이며 올해 초 극장가를 장악했다. 영화는 2023년 최장기간 박스오피스 1위 기록을 세우며 새해 개봉작 최초로 300만 관객을 넘어선 데 이어 2월24일 기준으로 누적 관객 수도 340만 명을 기록했다. 흥미로운 점은 이 흥행을 주도하는 연령층이 3040 남성이 아니라, 2030 여성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해당 영화의 성·연령별 예매 분포(2월24일 씨지브이 누리집 기준)를 보면 개봉 초반 30%였던 여성 관객 비중은 54%까지 올라 남성을 넘어섰고, 3040 관객이 전체 관람객의 61%를 차지하는 가운데 10%에 불과했던 20대 관객 비중도 26%까지 올라 있다. 엠제트(MZ)세대는 슬램덩크의 무엇에 이토록 빠져든 걸까.

지난 18일 오후 용산역 씨지브이 입구에 들어선 기자의 눈에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더 퍼스트 슬램덩크’라고 적힌 붉은색 클래퍼였다. 이날은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300만 관객 돌파를 기념해 씨지브이가 준비한 ‘팬심대전’이 열리는 날이었다. ‘팬심대전’은 작품 속 북산고 멤버 5인의 이름을 단 상영관에서 팬들이 함께 모여 자유롭게 응원하며 작품을 관람할 수 있는 특별 응원 상영회차다. 영화관 곳곳마다 클래퍼와 개인 응원 도구를 들고 삼삼오오 모인 사람들의 모습에서 슬램덩크의 뜨거운 인기를 느낄 수 있었다.

지난 18일 오후 용산역 씨지브이(CGV) 매표소에서 <더 퍼스트 슬램덩크> 응원 상영 관람객들에게 붉은색 클래퍼를 순차적으로 배부하고 있다.

오후 6시께 입장하는 팬심대전-정대만 상영관의 경우 247석 중 남은 자리는 10석 안팎이었다. 영화 시작 전 매표소 앞은 클래퍼를 수령하려는 관람객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이날부터 선착순으로 배부된 슬램덩크 포토카드 특전을 받으러 뛰어왔다가 아쉬워하며 빈손으로 돌아가는 사람도 종종 보였다. 직원에게 이유를 물어보니 “포토카드 특전은 오전 일찍 소진돼서 없다”고 했다.

이날 기자가 만난 슬램덩크 팬들은 모두 열성적인 ‘엔(N)차 관람러’였다. 매표소 근처에서 클래퍼를 들고 함께 사진을 찍던 김민주(20)씨와 이윤영(20)씨도 마찬가지였다. 이모를 통해 만화로 <슬램덩크>를 처음 접했다는 김씨는 “오늘로 세 번째 관람”이라며 “첫 번째 응원 상영을 못 갔는데, 오늘 다시 한다고 해서 왔다”고 말했다. 이씨는 “영화는 여섯 번 봤다. 지금 애니도 정주행하고 있다”며 “건강한 몸을 가진 미소년들이 운동하는 모습이 너무 좋다”고 했다. ‘최애’ 캐릭터를 묻자 동시에 “정대만이요!”를 외치며 까르르 웃던 김씨와 이씨는 “정대만이 체력의 한계를 이겨내면서 3점 슛을 넣는 모습이 정말 멋있다”며 “아이맥스 개봉하면 또 보러 올 것”이라고 말했다.

슬램덩크 포스터 앞에서 친구들과 스티커 등 굿즈를 주고받던 안나(25)씨는 “스포츠 만화에 전혀 관심이 없었는데 에스엔에스(SNS)에서 너무 많이 뜨길래 궁금해서 만화 시리즈를 한번 봤다가 그대로 완결까지 봤다”며 “영화가 자막판으로도 나오면 또 한번 보고 싶다”고 했다.

클래퍼를 들고 응원 상영 입장을 기다리는 관람객들이 벽 한 면에 길게 줄지어 서 있다.

부모님 손에 이끌려 영화를 봤다가 본인이 더 열광하게 된 경우도 있었다. 안나씨의 친구 이아무개(24)씨는 “벌써 네 번째 봤다. 처음엔 엄마가 젊었을 때 이 만화를 좋아하셨다면서 보러 가자고 해서 같이 봤는데, 제가 더 빠졌다”며 “엄마랑 더 많이 이야기하는 계기도 되는 것 같다”고 웃으며 말했다.

함께 있던 박아무개(24)씨도 비슷한 경험을 이야기했다. 박씨는 “회사에서 부장님들이 워낙 좋아하시고, 하도 재밌다고 하셔서 따라 보러 갔다가 재밌어서 한 번 더 보게됐다”며 “N차 관람할 때마다 감정이입하는 인물이 계속 바뀐다는 것도 재미 포인트”라고 강조했다.

세 사람은 “최애 캐릭터가 서로 다 다르다”며 강백호, 서태웅, 정대만 등 주인공들의 이름을 신나게 언급했다. 이씨는 “내일은 수원에 있는 롯데시네마 컬러리움 상영관으로 예매해놨다”며 기대감을 드러냈다.

북산고 유니폼을 맞춰 입고 온 관람객도 왕왕 있었다. 영화관 퇴장로에서 만난 조하림(34)씨와 임건진(34)씨 커플은 영화를 각각 13번, 11번 관람한 슬램덩크의 열혈 팬이었다. 두 사람은 극중 정대만의 등번호인 ‘14’가 적힌 유니폼과 강백호가 그려진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임씨는 “어렸을 때부터 봐온 명작이 영화로 개봉한다는 소식을 듣고 여자친구한테 만화 정주행을 추천했다”며 “제가 끌고 왔다가 여자친구도 같이 빠지게 된 케이스”라고 했다. 이들은 “명장면·명대사가 정말 많고, 한 가지에 열정적으로 집중하는 주인공들의 모습이 좋게 보여서 빠지는 것 같다”며 “아이맥스 개봉을 기다리고 있다”고 웃으며 말했다.

한 관람객이 극중 서태웅의 등번호 11이 적힌 유니폼을 입고 상영관에 입장하고 있다.

슬램덩크 열풍이 식지 않고 이어지자 씨지브이 쪽은 오는 4월 아이맥스 상영을 확정하고 앙코르 응원 상영을 준비하는 등 각종 이벤트를 진행 중이다. 지난 23일 씨지브이 관계자는 한겨레 <서울&>과의 전화 통화에서 “설 연휴 기간 입소문을 많이 탄 것 같다”며 “국내 개봉 일본 애니메이션 중 역대 흥행 2위인 <하울의 움직이는 성>(261만 명)은 이미 넘겼고, 이 정도 추이가 이어진다면 역대 1위인 <너의 이름은>(379만 명)에 근접하거나 뛰어넘을 수도 있지 않을까”라고 조심스럽게 예측했다. 이어 “개봉 초기에는 3040 관객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았다면 3주차부터 20대 비율이 올라오는 게 보인다”며 “전체 극장가에 레트로 열풍이 불고 있어 신기하다고 생각했다”고 전했다.

영화의 흥행에 힘입어 원작 만화책도 덩달아 인기다. 영화 개봉 이후 만화 슬램덩크 단행본은 100만 부 이상 판매됐으며 각종 도서 사이트 베스트셀러 순위에 이름을 올렸다. 18일 오후 용산역 영풍문고를 방문해 슬램덩크를 찾는 사람이 많은지 물었다. 현장 직원은 “지금 영화가 잘되고 있기도 하고, 위층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고 내려오는 분들이 많이 사서 이 지점은 품절이 더 빠른 편”이라고 답했다.

지난 21일 오후 광화문 교보문고 <슬램덩크> 코너에 책들이 쌓여 있다.

이런 슬램덩크 열풍 현상에 김헌식 대중문화평론가는 “콘텐츠 자체가 복고적 차원에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면서도 “한편으로는 잃어버린 꿈과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김 평론가는 “지금 젊은 세대는 불확실한 미래로 인해 무기력증에 시달리고 있다”며 “지난 카타르 월드컵에서도 ‘중꺾마’(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 신드롬이 있었지 않나. 현실적으로 어려운 환경에서도 꿈과 희망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지금 1020세대에도 반영되고 있다”고 바라봤다.

김 평론가는 “거꾸로 케이(K)-콘텐츠의 한계일 수도 있다”고도 지적했다. 한국의 학교 콘텐츠는 학교폭력 같은 부정적이고 우울한 단면을 주로 보여주며, 능동적·주체적으로 팀워크를 활용해 목표를 이뤄가는 모습은 고리타분하다는 이유로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는 최근 재개봉한 <타이타닉>을 언급하며 “학원물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고전적인 낭만성, 지금 이 시대에 우리에게 결핍된 무엇인가가 투영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글·사진 이화랑 객원기자 hwarang_lee@naver.com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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