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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월북·납북 문인들의 해금 조처가 이루어지면서 정지용 시인은 우리 곁에 다가왔다. 노래로 만들어진 그의 시 ‘향수’는 이른바 ‘국민 시’가 되었고 정지용 또한 사람들 사이에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납북 이후 4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어둠 속에서 잠자야 했던 정지용, 그가 살았던 흔적을 돌아본다.
마지막 거처
서울시 은평구 녹번동 126-10. 이곳은 시인 정지용이 1948년부터 1950년 납북되기 전까지 살던 집이 있었던 곳이다.
정지용이 살던 집은 ‘ㄱ’자 형태의 6칸 초가였다. 정지용은 녹번동으로 이사하기 전인 1947년에 경향신문사를 그만두었고, 1948년에는 이화여자대학교 교수직에서도 물러났다. 사회활동을 그만둔 그는 녹번동 초가에서 시를 쓰고 서예를 즐기며 살았다.
녹번동은 당시에는 녹번리였다. 정지용이 녹번리 초가에 살면서 쓴 시 가운데 ‘녹번리’라는 시가 있다. ‘헐려 뚫린 고개/상여집처럼/하늘도 더 껌어/쪼비잇 하다.’(시 ‘녹번리’ 중 일부) 어느 날 술 취한 정지용이 녹번리 초가로 가는 길목에서 그런 풍경을 보았을 것이다.
정지용이 살던 집은 사라지고 그 터에 빌라가 들어섰다. 조용한 주택가 골목 빌라 벽에 정지용이 살았던 곳을 알리는 표지판이 붙어 있다. 표지판 위에 ‘우리 동네는 은평, 귀가 길에 시 한편 읽고 가는 동네’라는 글귀가 적힌 걸개막이 걸렸다. 마을 주민이 기증한 긴 의자가 빌라 앞 전봇대 옆에 놓여 있다. 전봇대에는 정지용의 시 ‘고향’이 적힌 인쇄물이 걸려 있다.
시인의 고향
조지훈·박목월·박두진 등 대한민국 문학사에 거목으로 남은 시인들을 등단시킨 사람이 정지용이었다. 일상의 말들이 시에서 어떻게 빛나는지, 전통의 정서가 구태를 버리고 현재에 어떻게 발현되는지, 모국어가 어떻게 더 깊고 새로워지는지…. 정지용이 살았던 집터 앞에서 그를 생각하며 서 있었다. 정지용은 1902년 충북 옥천군 옥천읍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족과 후배, 고향 사람들이 뜻 모아 만든 생가, 시비, 기념비, 동상, 문학관 등 옥천에는 그의 흔적이 많다. 그중 국내에서 처음 세워진 정지용 시인의 시비가 옥천체육공원에 있다. 1989년 건립된 이 시비는 턱 낮은 기단 위에 화강암으로 만들었다. 시비로 쓰인 돌은 속리산 계곡을 대여섯 달 훑고 다니면서 찾은 것이다. 시인의 생가는 가족과 이웃 주민들의 고증을 통해 1996년에 옛 모습과 흡사하게 복원했다. 정지용은 1918년 서울에 있는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고향에서 살았다. 정지용문학관 자료에 따르면 정지용은 휘문고보를 졸업하고 1923년 일본 동지사(도시샤) 대학에서 유학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1929년 귀국해서 휘문고보에서 교편을 잡고, 서울 효자동에서 살기 시작했다. 노래로 만들어져 이른바 ‘국민시’가 된 ‘향수’는 1927년에 발표됐으니 아마도 일본 유학 시절에 고향을 생각하며 쓴 시가 아닐까? 정지용의 시 ‘향수’ 1연 ‘넓은 벌 동쪽 끝으로/옛이야기 지줄대는/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얼룩백이 황소가/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정지용의 시 ‘향수’ 1연. 민음사에서 출판한 <정지용 전집 1>에서 발췌) 같은 풍경이 그의 고향에 있다. 생가 앞에도 실개천이 흐른다. 생가가 있는 하계리에서 동쪽으로 3~4㎞ 정도만 가면 대청호로 흘러드는 금강 물줄기가 나온다. 그 물가에 수북리, 석탄리 등 마을이 있다. 정지용은 고향에 머무를 때면 수북리 금강, 집 뒤 일자산 등으로 산책을 다녔다. 시인의 발자국을 따라 가본 시인의 고향 풍경이 시 같다. 정지용이 살았던 마을들 정지용이 옥천에 살 때는 시를 쓰지 않았다. 정지용문학관 자료에 따르면 휘문고보에 입학하면서 습작을 시작했다. 그때는 소설을 썼다. 휘문고보를 졸업하고 시를 쓰기 시작했다. 1926년에 <학조> 창간호에 시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문단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1929년 일본 유학생활을 접고, 귀국해서 살던 곳이 효자동이었다. 이후 재동으로 이사했고, 1936년에 북아현동에 둥지를 틀었다. 오래전에 정지용 시인의 큰아들 정구환 씨를 만난 적이 있었는데, 그는 이사한 집 주소를 서대문구 북아현동 1-64로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에는 기와집이었다는 말 뒤에 기억을 더듬으며 말을 이었다. “당대의 유명한 시인, 문사 등 많은 사람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아버지를 찾았습니다. 아버지는 말씀이 없는 편이었는데, 한마디 하시면 좌중이 다 웃을 정도로 해학에 능통했습니다. 웃음이 섞인 말도 날카롭고 시적이었던 걸로 기억됩니다.” 정지용 시인이 살았던 북아현동 집터는 흔적 없이 다른 건물이 들어섰다. 정지용 시인이 서울을 떠나 3년 동안 살던 곳이 경기도 부천시 소사구 소사본동 89-14다. 경기도 부천 복사골문학회 구자룡 시인은 부천 천주교의 역사를 글로 남기기 위해 자료를 모으던 중 어떤 사람에게서 정지용이라는 이름을 듣게 된다. 뜻밖의 일이었다. 구자룡 시인은 정지용 시인의 큰아들 정구환 씨를 만나서 정지용 시인이 1943년부터 3년 동안 살았던 곳을 확인했다.(정지용문학관 자료에는 제2차 세계대전 말기인 1944년 서울 소개령으로 부천군 소사읍 소사리로 이사했고, 1946년에 서울 돈암동으로 다시 이사했다고 나온다.) 정지용 시인이 살던 소사본동 집터에 세워진 상가건물 벽에 1993년 복사골문학회가 만든 안내판이 붙어 있다. 안내판에는 ‘여기는 한국 현대시의 큰 별인 정지용 선생이 가장 어두웠던 시대에 약 3년 동안 은거하면서 시심(詩心)을 키우던 곳입니다.’라고 적혀 있다. 정지용 시인은 1946년에 서울 돈암동으로 이사를 한 뒤 1948년에 녹번동에 생의 마지막 안식처를 마련하고 살다가 1950년 납북됐다. 그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여러 가지가 있으나, 한국전쟁 때 서대문형무소에 수용되었다가 평양감옥으로 이감되었는데, 그곳에 수감 중에 폭사당한 것으로 추정한다는 내용이 정지용문학관 자료에 나와 있다.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조지훈·박목월·박두진 등 대한민국 문학사에 거목으로 남은 시인들을 등단시킨 사람이 정지용이었다. 일상의 말들이 시에서 어떻게 빛나는지, 전통의 정서가 구태를 버리고 현재에 어떻게 발현되는지, 모국어가 어떻게 더 깊고 새로워지는지…. 정지용이 살았던 집터 앞에서 그를 생각하며 서 있었다. 정지용은 1902년 충북 옥천군 옥천읍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족과 후배, 고향 사람들이 뜻 모아 만든 생가, 시비, 기념비, 동상, 문학관 등 옥천에는 그의 흔적이 많다. 그중 국내에서 처음 세워진 정지용 시인의 시비가 옥천체육공원에 있다. 1989년 건립된 이 시비는 턱 낮은 기단 위에 화강암으로 만들었다. 시비로 쓰인 돌은 속리산 계곡을 대여섯 달 훑고 다니면서 찾은 것이다. 시인의 생가는 가족과 이웃 주민들의 고증을 통해 1996년에 옛 모습과 흡사하게 복원했다. 정지용은 1918년 서울에 있는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고향에서 살았다. 정지용문학관 자료에 따르면 정지용은 휘문고보를 졸업하고 1923년 일본 동지사(도시샤) 대학에서 유학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1929년 귀국해서 휘문고보에서 교편을 잡고, 서울 효자동에서 살기 시작했다. 노래로 만들어져 이른바 ‘국민시’가 된 ‘향수’는 1927년에 발표됐으니 아마도 일본 유학 시절에 고향을 생각하며 쓴 시가 아닐까? 정지용의 시 ‘향수’ 1연 ‘넓은 벌 동쪽 끝으로/옛이야기 지줄대는/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얼룩백이 황소가/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정지용의 시 ‘향수’ 1연. 민음사에서 출판한 <정지용 전집 1>에서 발췌) 같은 풍경이 그의 고향에 있다. 생가 앞에도 실개천이 흐른다. 생가가 있는 하계리에서 동쪽으로 3~4㎞ 정도만 가면 대청호로 흘러드는 금강 물줄기가 나온다. 그 물가에 수북리, 석탄리 등 마을이 있다. 정지용은 고향에 머무를 때면 수북리 금강, 집 뒤 일자산 등으로 산책을 다녔다. 시인의 발자국을 따라 가본 시인의 고향 풍경이 시 같다. 정지용이 살았던 마을들 정지용이 옥천에 살 때는 시를 쓰지 않았다. 정지용문학관 자료에 따르면 휘문고보에 입학하면서 습작을 시작했다. 그때는 소설을 썼다. 휘문고보를 졸업하고 시를 쓰기 시작했다. 1926년에 <학조> 창간호에 시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문단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1929년 일본 유학생활을 접고, 귀국해서 살던 곳이 효자동이었다. 이후 재동으로 이사했고, 1936년에 북아현동에 둥지를 틀었다. 오래전에 정지용 시인의 큰아들 정구환 씨를 만난 적이 있었는데, 그는 이사한 집 주소를 서대문구 북아현동 1-64로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에는 기와집이었다는 말 뒤에 기억을 더듬으며 말을 이었다. “당대의 유명한 시인, 문사 등 많은 사람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아버지를 찾았습니다. 아버지는 말씀이 없는 편이었는데, 한마디 하시면 좌중이 다 웃을 정도로 해학에 능통했습니다. 웃음이 섞인 말도 날카롭고 시적이었던 걸로 기억됩니다.” 정지용 시인이 살았던 북아현동 집터는 흔적 없이 다른 건물이 들어섰다. 정지용 시인이 서울을 떠나 3년 동안 살던 곳이 경기도 부천시 소사구 소사본동 89-14다. 경기도 부천 복사골문학회 구자룡 시인은 부천 천주교의 역사를 글로 남기기 위해 자료를 모으던 중 어떤 사람에게서 정지용이라는 이름을 듣게 된다. 뜻밖의 일이었다. 구자룡 시인은 정지용 시인의 큰아들 정구환 씨를 만나서 정지용 시인이 1943년부터 3년 동안 살았던 곳을 확인했다.(정지용문학관 자료에는 제2차 세계대전 말기인 1944년 서울 소개령으로 부천군 소사읍 소사리로 이사했고, 1946년에 서울 돈암동으로 다시 이사했다고 나온다.) 정지용 시인이 살던 소사본동 집터에 세워진 상가건물 벽에 1993년 복사골문학회가 만든 안내판이 붙어 있다. 안내판에는 ‘여기는 한국 현대시의 큰 별인 정지용 선생이 가장 어두웠던 시대에 약 3년 동안 은거하면서 시심(詩心)을 키우던 곳입니다.’라고 적혀 있다. 정지용 시인은 1946년에 서울 돈암동으로 이사를 한 뒤 1948년에 녹번동에 생의 마지막 안식처를 마련하고 살다가 1950년 납북됐다. 그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여러 가지가 있으나, 한국전쟁 때 서대문형무소에 수용되었다가 평양감옥으로 이감되었는데, 그곳에 수감 중에 폭사당한 것으로 추정한다는 내용이 정지용문학관 자료에 나와 있다.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