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북 일부였던 잠실, 강남 된 뒤 아파트·스포츠 ‘대명사’

서울을 변화시킨 10대 사건 ⑥ 1970년대 본격화한 잠실 개발

등록 : 2023-06-01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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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누에치기 장려 위해 만든 곳

광진구 자양동 남쪽에 붙어 있던 잠실

두 번 대홍수 거치면서 ‘한강의 섬’ 된 뒤

1971년 육속화 작업 시작…‘육지’로 변신


택지 조성 위해 쓰레기 매립장 된 적도

75만 평 새로 조성…5개 기업 함께 공사


석유파동 때 넘친 실업자 건설로 유입

대단지 조성되며 새 아파트 문화 ‘산실’

송파구 잠실동은 본래 지금의 광진구 자양동 남쪽에 붙어 있던 반도였다. 그러니 강남이 아니라 강북의 일부분이었다는 소리다.

잠실이 강북이었다는 얘기는 지명을 살펴봐도 이해가 된다. 조선의 왕실에서는 누에치기를 장려하기 위해 한성부 동서 양쪽으로 잠실을 두었고 그곳에 동잠실을 설치했다. 지금의 ‘잠실’이란 명칭도 여기서 유래했다. 참고로 서잠실은 현재 연세대가 있는 연희궁 일대였다.

그러던 것이 중종 15년(1520)에 크게 홍수가 나서 가는 물길이 생겼고, 그것을 ‘새로 난 물길’이라 하여 한자로 ‘신천’(新川)이라 불렀다. 그런 이유로 현재 지하철 2호선 잠실새내역이 처음에는 ‘신천역’으로 이름 지어진 것이다.

그 후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그 물길은 더욱 확장돼 신천이 한강의 지류에서 본류로 바뀌고 본래 한강 본류였던 현재의 송파구 잠실동 석촌호수 일대의 물길이 지류가 된 것이다. 이리하여 잠실은 더는 육지가 아닌 섬으로 변했다. 하지만 본래 강북에 붙어 있던 육지였기에 행정구역은 여전히 강북에 속해 있었고, 1970년대 초까지 성동구 관할 지역이었다.

그러다 1971년 시작된 대공사로 다시 큰 변화가 일어났다. 잠실이 드디어 서울시의 한강 개발 소용돌이 속에서 잠실도의 남쪽 물길이 매립되고 강북을 떠나 완전히 강남에 소속되게 된 셈이다.

매립공사는 가장 난공사였던 물막이공사가 1971년 4월16일 성공한 이후에도 7년에 걸쳐 진행됐다. 그리고 1978년 6월29일 제방 축조가 완료돼 강북의 육지였던 잠실이 드디어 강남의 육지로 온전히 변신하게 된다.

롯데타워 잠실도를 육지화하는 과정에서 석촌호수만 남은 옛 한강 본류 부근에 건축한 롯테타워.

이렇게 제방 축조 공사는 모두 완성했지만 워낙 큰 규모라 택지가 조성될 만큼의 땅이 메워지지 못해 준공검사를 받을 수 없었다. 개발사는 몽촌토성의 언덕을 헐어 그것으로 매립하려 했지만 서울시가 반대해 그나마 지금의 몽촌토성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결국 이곳도 구의지구 공유수면매립 때 쓴 방식, 즉 쓰레기로 매립하는 방식을 이용해 당시 약 2년간 이곳은 쓰레기매립장이 됐고, 그 위에 서울 시내 건설공사 현장에서 배출되는 토사로 복토했다.

이렇게 얻어진 새로운 신규 택지는 75만 평으로 엄청났다. 이런 대규모 개발사업은 서울시가 주체가 되어 하는 것이 합리적이었지만, 당시 건설부는 이를 민간업자에게 맡겼다. 그 배후에는 정치자금 조성이 관련됐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많았다.

잠실 개발을 포함해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 전반에 걸친 한강 개발사업은 마치 이권쟁탈의 춘추전국시대를 방불케 했다. 기업들로서는 한강 개발과 관련해 여의도 개발과 이촌동 개발을 이미 진행하면서 이것이 엄청난 이권이라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잠실 개발은 어느 한 기업에 맡기기에는 그 규모가 엄청난 것으로, 1969년 하반기 당시 김학렬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이 대규모 건설업체(현대, 대림, 극동, 삼부, 동아)에 잠실지구 공유수면 매립공사를 허가해줬다고 한다. 이때도 정부에서 5개 기업 대표에게 정치자금을 요청했다는 얘기가 있다. 어쨌든 5개사는 그 이듬해 합작사인 경인개발주식회사를 만들어 이 공사를 진행했다.

을축년 대홍수기념비 1925년 대홍수를 알리는 기념비로 송파초등학교 옆 근린공원에 있다.

한편 송파구 잠실지구 도시개발의 첫 의도는 1960년대 말 당시 서울 시내 무허가주택들을 정리하는 방법으로 기획된 광주대단지(현 경기도 성남시 중원구·수정구 일대) 조성과 관련된다. 당시 서울시는 광주대단지를 건설해 10만 가구, 55만 명을 수용하는 인공도시를 만든다는 계획이었다. 1969년 입주가 시작됐는데 입주자들의 생활기반시설은 전혀 마련되지 않은 상황에서 그들은 서울로 출퇴근해야 했기에 서울로 가는 길에 있는 송파구의 도로 개선이 시급했다. 이에 따라 광주대단지에서 서울로 쉽게 접근하기 위해 1970년 광주대단지에서 말죽거리(현 양재역)까지 도로(헌릉로)를 개설했고 1972년 잠실대교가 건설됐다. 하지만 모든 것이 ‘행차 뒤 나발’이라고 광주대단지사업은 실패로 끝났다.

광주대단지 사건이 수습될 즈음 잠실도의 남쪽 물길 매립작업은 진행 중이었고, 1973년 제1차 석유파동으로 1974년만 하더라도 실업자가 넘치고 국내 경기는 불경기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1975년 2월 잠실지구 아파트단지 건설이 시작되면서 분위기는 하루아침에 바뀌었다. 여기에 더해 건설업의 중동 진출이 본격화하면서 경기가 되살아났다.

잠실아파트단지를 건설하면서 연인원 280만 명에게 일자리를 창출했다. 이런 상황에서 숙련공의 몸값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뛰었으며 자재 파동까지 생길 정도였다. 당시까지 10만 명 단위의 아파트단지를 건설한다는 것은 세계적으로 드문 경우였다. 그저 일본에 3개, 영국에 2개, 독일과 미국에 몇 개가 전부였을 정도의 대규모 건설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잠실1~4단지 1만1660가구와 시영아파트 3천 가구가 1976년 거의 같은 시기에 준공됨으로써 일시에 1만5천 가구가 잠실로 이사를 오는 진풍경이 연출되기도 했다.

부리도 잠실도 옆에 있던 작은 섬. 잠실 개발을 하며 사라지자 부리도가 있던 현 잠실 7동에 그 기념비를 세워두었다.

마지막으로 건설한 5단지는 규모도 가장 컸을 뿐 아니라 1~4단지와 달리 고층·고급·대형으로 건설됐다. 이 5단지가 1978년 11월에 완공되는 시점을 잡아 그에 앞서 완공된 1~4단지와 함께 잠실지구 종합준공식이 거행됐다. 이렇게 하여 섬마을이었던 잠실이 강남의 10만 명 주거단지로 새롭게 태어나게 됐다.

잠실아파트단지는 새로운 아파트 문화도 만들어냈는데 국내 최초로 단지별 부녀회를 탄생시켰다. 이것은 앞서 건설된 동부이촌동과 여의도 아파트단지에도 없었던 조직이다. 입주자 부인들의 연령이 30살 전후의 젊은층이었고, 아파트로 획일화된 거주 조건상 소득계층도 비슷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렇게 새로운 주택지구로 탄생한 잠실 일대지만 사실 개발 초기부터 스포츠 대단지로 구상됐다. 그것이 실현된 계기가 1986년 아시아경기대회와 1988년 서울올림픽 개최다. 이 두 대회의 개최가 1981년 확정되면서 잠실종합운동장 등 지금의 잠실 스포츠시설이 제 모습을 갖추게 됐다.

참고로 1960년대 북한은 신금단 선수가 세계 육상계를 휩쓸었고, 1966년 잉글랜드월드컵에서는 북한 축구팀이 아시아 최초로 8강에 진입함으로써 두각을 드러내던 시기다. 이에 박정희 정권은 무리하여 1970년 아시안게임을 유치했고, 국내 최고의 축구선수들로 구성된 중앙정보부 산하 ‘양지팀’을 창단하기도 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무리였다. 이후 아시안게임은 이전 개최국인 타이에 반납해야 했고 그것으로 발생한 적자 25만달러를 부담했으며, 양지팀도 그 후 흐지부지 해체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이랬던 한국 스포츠의 어두운 과거사를 묻어버리고, 새롭게 한국의 스포츠 역사를 다시 쓰게 된 장소가 바로 이곳 잠실지구이다.

글·사진 유영호 <서촌을 걷는다> <한양도성 걸어서 한바퀴> 저자

그림 김경래 기자 kkim@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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