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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생활사박물관 1층 전시실에 전시된 해방과 한국전쟁 이후 서울 풍경 사진.
물지게 짊어진 아현동 달동네 주민들
우유 배급받으러 나온 만리동 아이들
서울에서 터를 잡고 가족 이룬 사람들
그들을 뛰게 한 건 ‘함께 꾸는 서울의 꿈’
노원구 공릉동 서울생활사박물관
서울생활사박물관을 구경하는 일은 시간을 거슬러가서 그때 그 사람들과 함께 살며 사랑하며 꿈꾸는 일이다. 옛 서울에 도착하면 그때부터 시간은 미래로 흐른다. 우리 자신 혹은 우리 어머니와 아버지,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살아온 세월을 오롯이 느껴보는 거다. 가난했지만 따듯했고, 힘들었지만 정겨웠던 날들이 오늘에 빛나는 이유는 지금 이곳에 사람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서울생활사박물관 1층 전시실에 전시된 포니원 택시와 승용차 브리샤.
시간 터널을 지나 도착한 옛 서울 서울생활사박물관 1층 전시실 입구에 적힌 ‘서울풍경’이라는 문구는 문패다. ‘지금부터 서울 시간 여행이 시작됩니다’라고 안내하는 상냥한 마중이다. 한쪽 벽에 보이는 커다란 화면에 그동안 신문에 실렸던, 시대의 이정표가 될 만한 기사가 한 장면씩 흘러간다. ‘들리는가 함성! 보았는가 붉은 전사의 힘’이란 기사 제목에 2002년 한·일 월드컵 때 광화문, 시청 거리를 가득 메운 붉은 악마의 함성이 들리는 듯하다. 1988년에 서울 인구가 1천만을 돌파했다는 소식도 보인다. ‘1975년 12월 현대 포니 출시’라는 기사 제목 위에 포니 자동차 사진이 ‘삐까번쩍’ 붙었다. 그해 서울 인구가 500만 명을 돌파했다는 소식도 있었다. 1974년 지하철 1호선이 개통됐고, 1962년에는 180명의 ‘베이비 서울’을 선발했다. 1958년 종암아파트가 준공됐다는 소식도 보였다. 그리고 1946년에 서울시 헌장이 반포됐다는 신문기사를 마지막으로 시간 터널을 빠져나오면 전시실 너른 공간 한쪽에 전시된 ‘포니 택시’와 ‘승용차 브리샤’가 사람들을 반긴다. ‘포니’와 ‘브리샤’로 가는 발길 앞에는 한국전쟁 이후 폐허 속 명동성당, 여의도로 가는 마포나루터, 물지게를 지고 아현동 달동네 계단을 오르내리는 사람들, 우유 배급을 받으러 나온 만리동 아이들 사진이 놓였다. 식량 배급을 받을 때 꼭 필요했던 서울특별시민증도 전시됐다. 그런 세월을 딛고 일어선 서울의 도로를 달리는 ‘포니’는 멋졌다. 긴 코트에 중절모를 쓴 남자들이 함박눈을 맞으며 1960년대 명동을 걷는 사진에 시선이 머문다. 중랑천에서 여름 한때를 즐기는 사진의 가족들 모습이 정겹다. 천호, 반포, 여의도, 잠실에 아파트가 들어섰던 1970년대 사진들에 이어 크레파스, 감기약 등 광고포스터와 삼양라면, 미원, 삐삐, 카폰, 시티폰으로 이어지는 눈길은 어느새 휴대전화가 등장한 1990년대에 도착해있었다. 서울의 봄, 여름, 가을, 겨울, 밤, 아침, 축제, 역사, 서울 시민들이 주인공인 다양한 사진을 끝으로 전시실 1층 ‘서울풍경’은 끝난다.
서울생활사박물관 2층 전시실의 웨딩드레스를 입은 마네킹들.
서울, 가족의 탄생
2층 전시실의 문패는 ‘서울살이’다. 광복과 전쟁, 폐허를 딛고 일어선 서울에 새로 지었던 건 집과 건물, 도로만이 아니다. 살며 사랑하며 이루어낸 ‘가족’, 그 이야기가 가득하다.
서울 사람들의 ‘서울살이’가 미디어아카이브월에 왁자지껄하다. 그 공간을 지나면 서울 토박이의 이야기가 그들이 남긴 유산과 함께 사람들을 반긴다.
서울로 모여든 사람들, 그들이 이룬 가족의 이야기가 ‘기회의 땅, 서울’이라는 제목의 전시실에 펼쳐진다. 남산 남쪽 기슭에 해방되면서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 그들 대부분은 평안도에서 내려온 사람들이었다. 노점상, 날품팔이로 생계를 잇거나 담배를 만들어 팔고, 스웨터를 짜는 일을 했다. 사람들은 그 마을을 해방촌이라고 불렀다. 해방되면서 생긴 마을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1960~1970년대에도 사람들은 ‘잘살아보세’를 외치며 서울로 모였다. <보리피리> <욕망> 등 당시 이야기를 다룬 영화의 대본이 전시됐다. 누군가 기증한 알루미늄 옷함은 당시에 실제로 사용했던 것이다.
가정부, 버스 차장, 노동자, 음식점 종업원 등 궂은일을 하며 생계를 꾸려가던 사람들, 그들을 지탱한 건 삶의 터전을 지키려는 의지였고, 그들을 꿈꾸게 한 건 청춘의 희망이었다. 가난했지만 따듯했고, 힘들었지만 정다웠던 시절, 살며 사랑하며 삶의 동반자를 만나 가정을 꾸렸던 그들에 의해 서울의 가족이 탄생하게 된다. 너른 전시 공간 가운데 웨딩드레스를 입은 마네킹은 가족의 탄생을 상징하는 결혼, 그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다.
1955년 올린 결혼식 주인공들은 결혼식에서 하늘에 결혼을 알리는 ‘고천문’ 낭독을 빼놓지 않았다. 폐백도 중요한 의례였다. 1968년 올린 결혼식 주인공들은 양복점 일을 하며 만난 청춘 남녀다. 가위 하나면 기술자가 될 수 있어서 양복 기술을 배운 신랑이었다. 2000년 올린 결혼식 주인공들은 이른바 ‘삐삐세대’ ‘엑스(X)세대’다. 삐삐로 연락을 주고받고, 피시(PC)통신으로 소식을 주고받기도 했다. 그렇게 가족은 탄생했고, 아기는 소중한 선물이었다.
가족계획사업 표어는 시대상을 반영한다. 1961~1965년 ‘덮어놓고 낳다보면 거지 꼴을 못 면한다’, 1966~1975년 ‘딸 아들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 1976~1980년 ‘하루 앞선 가족계획 십 년 앞선 생활안정’, 1981~1985년 ‘잘 키운 딸 하나 열 아들 안 부럽다’, 1986~1990년 ‘낳을 생각 하기 전에 키울 생각 먼저 하자’. 아이들은 자랐고 서울은 더 커져만 갔다.
서울생활사박물관 3층 전시실. 옛 부엌 모습을 재현했다.
그 아이들이 자라는 서울
3층 전시실의 문패는 ‘서울의 꿈’이다. 가족이 모여 사는 집, 아이들은 공부하고 어른들은 가족을 위해 일하며 서울의 꿈을 꾼다.
개량한옥의 안방과 아파트 거실을 꾸며 나란히 배치했다. 그 옆에는 연탄아궁이와 입식 개수대, 곤로와 선반, 양은밥상 등이 있는 옛 부엌과 냉장고, 전자레인지, 가스레인지, 믹서기, 싱크대가 있는 아파트 주방을 나란히 배치했다. 시대에 따른 생활상이 한눈에 보인다.
연탄으로 난방하고 조리도 했던 1960년대는 연탄가스 사망률이 전염병 사망률보다 높았다. 구멍이 19개 뚫린 연탄, 이른바 19공탄을 만들던 틀과 연탄집게, 연탄통 등과 함께 연탄 그을음 제거용 비누인 ‘이쁜이 비누’, 연탄가스로 인한 두통에 먹던 약 ‘명랑’, ‘뇌신’, 연탄가스 배출기와 경보기가 전시됐다.
1955년 서울 인구는 약 157만 명이었고 28만2천 채의 집이 필요했다. 당시 서울의 주택은 17만3천 채였다고 한다. 주택난은 심각했다. 인왕산, 안산, 낙산, 답십리, 청계천 등지에 판잣집, 천막촌이 들어찼다.
1970년대 ‘영동·잠실지구 신시가지조성계획’이 발표됐고, 구도심에 있던 관공서와 명문고를 이전시켰다. ‘강남’과 ‘강북’이란 말이 이때 생겼다. 1970년대 중반부터 부동산 투기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나타났다. 가족의 보금자리여야 할 집이 부동산 투기의 대상이 된 것이다.
광복 직후, 한국전쟁 뒤 나타난 베이비붐 현상은 ‘콩나물 교실’이라는 말을 낳았다. 이런 현상은 1970년대 말까지 이어졌다. 한 학급 학생 수가 80명이 넘었으며, 3부제로 나눠 배워야 했다. 그 시절 취학통지서, 건강기록부, 성적통지표, 생활통지표, 받아쓰기 채점지, 기성회비 징수 봉투가 학용품 등과 함께 전시됐다. 1960년대 각성제 광고는 그 시절 중학교 입시부터 시작됐던 치열한 입시전쟁을 말해주고 있었다.
부모들은 가족을 위해 헌신했다. 1936년 밤섬에서 태어나 배 만드는 목수 일을 하게 된 사람과 1945년에 태어나 변리사가 된 사람, 1966년 이용사 면허를 딴 사람의 이야기 등 당시 사람들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소품과 글을 보면 자연스레 가족이 생각난다. 유물이 된 시내버스 회수권과 토큰 앞에 서서 학창시절을 떠올리며 괜스레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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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람정보>
관람시간: 오전 9시~오후 6시(입장 마감 오후 5시30분) 휴관일: 공휴일을 제외한 매주 월요일. 1월1일 관람요금: 없음 문의전화: 02-3399-29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