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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둥성 칭다오시 황다오구에 있는 칭다오랑야타이주업유한공사. 진시황과 서복의 ‘불로초’ 전설에서 이름을 따온 랑야타이주를 생산한다. 최근에는 황해의 풍부한 해양 미생물 효과를 활용해 ‘중국 해양생태 바이주’를 자처하고 있다.
산둥반도 남서쪽 해안의 대중적 바이주
진시황이 마신 ‘랑야주’를 술 이름으로
전통 랑야술 기법에 해양생태 기술 접합
30~40도 농향형이 주종…70도짜리도
“예물 주면 신선에게 불사약 받아 오겠다” 진시황 속여먹고 돌아오지 않은 서불
서불 부러운 중국인, 이름 서복으로 바꿔 신나는 전설 떠올리면 마실수록 술맛 “업” 산둥반도 내륙의 술을 맛본 ‘바이주 나그네’의 발길은 ‘시선’ 이백처럼 술향기를 따라 동쪽 바닷가(황해는 중국 입장에서는 동해이다)에 이르렀다. 나그네의 코끝을 홀린 주향의 발원지는 아름다운 칭다오(靑島). 한반도를 향해 뾰족하게 튀어나온 산둥반도 남서쪽 해안의 최대 항구도시 칭다오는 술에 관한 한, 오늘날에는 맥주의 고장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백이 “신선”을 찾아왔을 때는 칭저우 운문춘(1회 운문진량 편 참조)이 일품이었고, 이백보다 더 아득한 옛날에는 서복(徐福)이라는 희대의 방사가 진시황을 홀린 랑야(琅琊)의 ‘어주’(御酒)가 있었다. 칭다오는 근세의 청일전쟁 전까지는 산둥반도 자오저우완(膠州灣·교주만)의 이름 없는 어촌이었다. 전후 처리에 교묘히 끼어든 독일이 일본 대신 칭다오 일대를 개발하기 전에는 랑야가 청나라 북방 해안의 최대 항구도시였다. 지금의 칭다오시 남쪽 랑야타이(琅琊台)가 옛 영화의 자취를 간직하고 있다.
“예물 주면 신선에게 불사약 받아 오겠다” 진시황 속여먹고 돌아오지 않은 서불
서불 부러운 중국인, 이름 서복으로 바꿔 신나는 전설 떠올리면 마실수록 술맛 “업” 산둥반도 내륙의 술을 맛본 ‘바이주 나그네’의 발길은 ‘시선’ 이백처럼 술향기를 따라 동쪽 바닷가(황해는 중국 입장에서는 동해이다)에 이르렀다. 나그네의 코끝을 홀린 주향의 발원지는 아름다운 칭다오(靑島). 한반도를 향해 뾰족하게 튀어나온 산둥반도 남서쪽 해안의 최대 항구도시 칭다오는 술에 관한 한, 오늘날에는 맥주의 고장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백이 “신선”을 찾아왔을 때는 칭저우 운문춘(1회 운문진량 편 참조)이 일품이었고, 이백보다 더 아득한 옛날에는 서복(徐福)이라는 희대의 방사가 진시황을 홀린 랑야(琅琊)의 ‘어주’(御酒)가 있었다. 칭다오는 근세의 청일전쟁 전까지는 산둥반도 자오저우완(膠州灣·교주만)의 이름 없는 어촌이었다. 전후 처리에 교묘히 끼어든 독일이 일본 대신 칭다오 일대를 개발하기 전에는 랑야가 청나라 북방 해안의 최대 항구도시였다. 지금의 칭다오시 남쪽 랑야타이(琅琊台)가 옛 영화의 자취를 간직하고 있다.
전설의 랑야타이를 브랜드화해서 1990년대 이래 생산해온 여러 종류의 랑야타이주. 지금의 랑야타이는 칭다오를 대표하는 바이주이다.
랑야타이는 진시황이 동해를 바라보기 위해 랑야산에 쌓은 넓은 대이다. 진시황은 이곳에서 ‘제나라 방사’ 서복의 알현을 받고 그가 바친 “신비한 맛의 술”에 감탄한 나머지, 불로초를 구해오겠다는 서복의 ‘삼신산 항해’를 허락한다.
답사단이 찾아간 칭다오 랑야타이 주창(칭다오랑야타이주업유한공사)의 바이주는 바로 그 ‘랑야타이 어주’에서 이름을 딴 술이다. 산둥성 140여 개 바이주 중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지역 명산품으로, 산둥반도 남쪽 일대에서 대중적인 바이주로 인기가 많다.
랑야타이 주창은 자오저우만을 사이에 두고 칭다오 건너편 황다오(黃島)에 자리잡고 있다. 칭다오시 황다오구는 총길이 41.58㎞로 세계에서 가장 긴 해상 다리인 자오저우완대교와 9.47㎞의 해저터널로 칭다오와 연결돼 있다.
랑야타이 주창 양조공장 내부. 큰솥에 술의 원료가 되는 곡식을 찌고 있다.
랑야타이 주창은 바이주로는 낮은 도수대인 30~40도의 농향형 바이주를 주로 생산한다. 와신상담의 고사로 유명한 고대 춘추전국시대 월나라 왕 구천의 랑야 천도(현재의 장쑤성 롄윈강시 일대로 추정) 때 전래한 것으로 여겨지는 전통 랑야 양조 기법을 바탕으로, “풍부한 구덩이 향(窖香), 입안에 도는 청량감, 부드러운 목넘김, 긴 여운의 뒷맛”을 만들어내고 있다고 자부한다. 최근에는 상대적으로 취약했던 고도수 제품 개발에도 나서 중국 바이주 시장에서 처음으로 70도짜리 바이주를 상품화했다. 2007년 출시한 72도짜리 농향형 바이주 ‘샤오랑가오’(小琅高)가 이 주창 고도주의 대표작이다.
주창의 역사는 다른 주창에 비해 조금 늦은 편이다. 주창은 개혁개방 초기인 1985년 ‘칭다오 제일양주창’이란 이름으로 민영화 수순을 밟기 시작해 1994년 주식회사 형태를 갖췄다. 랑야타이를 대표 브랜드로 내세운 것도 이때부터이다. 2000년대 들어서는 주창이 해안에 있는 점을 활용해 양조 기술에 해양 미생물을 접합한 식품과 미용품 개발에도 나서고 있다. 술 상품도 “중국 해양 생태바이주”를 전면에 내세운다. 주창은 넓은 부지에 번호가 매겨진 건물들이 줄지어 서 있다. 공정별 공장과 원료 및 누룩 저장고들이다. 중국 양조장 규모는 어디나 보는 이를 놀라게 한다.
답사단이 주창 홍보관에 마련된 시음장에서 여러 도수의 랑야타이를 맛보고 있다.
랑야타이는 마실 때 이런 사람들을 기억하며 마시면 더 맛있을 거라고 지은 이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과, 천하의 진시황을 멋지게 “속여먹은” 서복이란 사내이다.
랑야타이에서 진시황을 알현하는 데 성공한 서복과 그의 동료들은 “저 바다 건너에 신선이 사는 삼신산이 있고, 그곳에 장생불로초가 있다”고 하면서 일찍이 진시황이 맛보지 못한 “지극히 신비로운 향미(香味)”의 술을 바친다. ‘진시황에게 많은 배와 사람을 얻어 불로초를 찾아 떠난 뒤 돌아오지 않고 동쪽 나라의 왕이 되었다’는 서불(徐市. 사마천의 <사기>에 기록된 서복의 본명)의 기막힌 대모험 이야기의 서막이다.
랑야타이 주창의 누룩 저장고. 춘추전국시대 월나라에서 전래된 전통기법으로 누룩을 빚는다고 한다. 우리나라 메주처럼 만들어 적정 온도에서 발효·저장하고 있다.
진시황 영정(瀛政)의 성 영은 바다를 뜻한다. 고대사 연구자들은 본래 동해 바닷가에 살던 영씨가 어느 시기에 중국 내륙으로 이주해 진나라를 세운 것으로 본다. 영씨 후예로서 진시황의 랑야 방문은 조상의 본향을 찾은 것 같은 감격스러운 귀향이었을 것이다. 바다를 처음 본 진시황의 행동도 그런 정서를 바탕에 깔고 있었다. 그리고 그 마음 상태는 고스란히 “바다 건너 신선의 땅”에 대한 환상으로 이어졌다. 이때 서복은 신비한 술맛뿐 아니라 바다에서 일어나는 신기루나 용오름같은 자연현상을 “삼신산의 증거”로 황제에게 각인시켰다.
진시황은 서복이 가르쳐준 바다의 신비에 빠져 무려 석 달이나 랑야에 머물렀다고 한다. 이때의 이미지가 너무 강렬했던지, 진시황은 총 다섯 번의 전국 순유 중 세 차례나 랑야를 찾았다.
칭다오 주변에서 발굴된 고대시대의 청동 술 항아리와 술잔.
이 지방 전설에 따르면, 서복의 조상은 남쪽 월나라 궁정의 양조장인이었다. 구천이 오나라를 멸하고 패왕을 자처하기 위해 도읍을 랑야로 옮길 때 이주해 왔다고 한다. 서복은이 집안의 8대손으로 당연히 술의 장인이었을 뿐 아니라 화학, 생물학, 천문지리학은 물론 항해술에도 능통한 만물박사였다. 그가 진시황에게 승부수로 내놓은 ‘어주’가 얼마나 심혈을 기울인 명작이었을지는 상상이 가고도 남을 것이다. 거친 내륙의 유목지방 출신인 진시황은 이 섬세하고 신비한 동방의 술과 박학다식한 서복의 현란한 세 치 혀에 감쪽같이 넘어가 그에게 “많은 배와 사람”을 허락했다.
그러나 서복은 1차 항해에 실패하고 꽤 오랫동안 잠수를 탔던 것 같다. 그사이 수도 함양에서는 분서와 갱유로 선비들이 죽어 나가는 사건이 일어난다. 멀리 달아나 숨어버린 줄 알았던 서복은 대담하게도 랑야를 다시 찾은 진시황 앞에 모습을 나타낸다. 그리고 선수를 친다. 1차 항해의 실패 원인을 “신선의 땅을 지키는 무서운 상어 때문”으로 돌린 뒤 “아름다운 동남동녀를 신선에게 예물로 주시면 그 대가로 불로초를 받아 오겠다”고 장담한다. 이 “황당한” 시나리오가 진시황에게 먹힌 이유는 무엇일까? 당시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 동남동녀는 신선을 위한 희생물이다. <심청전>에서 심청이 서해 용왕에게 몸을 던져 눈먼 아비를 구한다는 신화 구조를 이해하면 진시황이 왜 서복의 제의를 의심 없이 수락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동남동녀 3천 명, 각종 분야의 기술자들, 오곡의 씨앗을 수십 척의 배에 예물로 싣고” 바다로 나간 서복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산둥박물관의 서복 전시물. 서복이 불로초를 찾아 항해한 한반도 연안의 추정 항로를 그려놓았다.
이어진 전설에 따르면, 서복 일행은 한반도 서해안과 제주도를 거쳐 일본열도 규슈에 들어가 정착했으며, 서복은 ‘동쪽 나라’ 왕이 되어 백 살이 넘도록 “행복하게” 살았다고 한다.
사람들은 서복이 끝내 불로초를 구하지 못했고, 진시황의 책임 추궁이 두려워 돌아오지 않았다고 생각했지만, 훗날의 어떤 사람들은 사실 이 모든 것이 서복을 비롯한 제나라 반체제 지식인들이 꾸민 주도면밀한 엑소더스(대탈출)였다고 본다. 동남동녀와 기술자들도 실상은 서복과 동지들의 일족이었다는 것이다.
칭다오시 야경. 관광객을 위해 빌딩에 빛을 쏘아 야경을 연출한다.
오늘날 랑야타이는 산둥반도의 유명한 관광명소 중 하나이다. 새로 조성한 관광지 랑야타이에는 진시황과 서복의 조각상도 볼 수 있다. 중국인들은 사마천이 기록한 이 서복 이야기를 역사적 사실로 확고히 믿고 있다. 산둥성박물관에 서복의 대항해에 관한 전시관이 별도로 꾸며져 있을 정도이다.
서불의 이름이 언제부터 서복으로 불리게 됐는지 알 수 없지만, 진시황을 멋지게 속이고 대탈출에 성공해 동쪽 나라 왕이 되어 백 살이 넘도록 살았다는 ‘전설’은 중국인들의 뇌리에 ‘福’(복) 한 글자로 요약됐음이 틀림없다.
진시황이 마시고 “뿅 갔다”는 전설의 랑야타이 어주를 맛보듯 칭다오 랑야타이주를 한 모금 마셔본다. 서복의 스펙터클 대모험을 떠올리는 순간 “신묘하게도” 술맛이 “업되는” 신나는 바이주다.
글·사진 이인우 저술·번역가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