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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림산방 포스터
향기로운 봄 내음과 함께 인사아트프라자 갤러리에서 특별한 전시를 기획했다. 조선 말기 이후 가난과 고행에서도 줄곧 한 우물만 판 소치 허련(1808-1893) 선생의 집안 전시다. 전라남도 진도에 소재한 운림산방 기념관에서도 보기 어려운 5대에 걸친 화업을 한자리에 모은 ‘林田 허문 초대전과 운림산방 5대전’이 서울 종로구 인사동길 인사아트프라자 갤러리(관장 구본호) 1층과 2층에서 오는 4월8일까지 열리고 있다.
운림산방은 전라남도 진도군 의신면에 있는 조선후기 본채 · 사랑채 · 연못 등으로 구성된 주택이다. 조선 말기 남화(南畵)의 대가이던 소치 허련이 만년에 기거하며 작품을 제작하였던 곳이다. 허련이 49살 때인 1857년(철종 8)에 귀향하여 건립한 것이다.
1대, 소치 허련, 추경산수도, 지본 수묵담채, 초년대, 43x31cm.
천하의 피카소도 자신의 재능을 자식에게 그대로 나누어 줄 수 없는 게 예술의 오묘함인데, 한 화가를 기점으로 하여 5대손까지 200여 년의 화업을 이어오는 건 세계미술사에서도 그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사례다. 단순한 기능이나 기술의 전수로 이어지는 전통공예가 아닌 순수한 창의성을 기반으로 하는 순수예술 분야에서 대물림한다는 건 더욱 희귀한 일이다. 직계 화맥 5대에 걸쳐 모두 한국미술사에 큰 획을 그을만한 작품을 남기고 있으니 더욱더 경이롭다.
2대, 미산 허형, 운중석양, 지본 수묵담채, 중년대, 36x27cm.
이런 운림산방 5대를 한 자리에 모은 것은 인사아트프라자 갤러리가 국내 최초로 기획한 전시이다. 전남 진도에 위치한 운림산방은 1대 소치 허련(小痴 許鍊) 선생이 그림을 그렸던 화실 이름, 즉 당호이나 지금은 허씨 일가가 일군 장구한 화맥을 상징하는 당호를 일컫는다. 소치 허련을 시작으로 하여 2대 미산 허형(1861~1938), 3대 남농 허건(1908~1987), 임인 허림(1917~1942), 4대 임전 허문(1941~) 그리고 5대 허진(1962~)와 허재(1973~) 등 조선 말기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한국 미술사에 큰 획을 이루었다.
3대, 남농 허건, 하산계류, 지본 수묵담채, 1959, 115x84cm
인사아트프라자 갤러리 1층 그랜드관에는 전통적인 수묵산수의 기법을 초월하는 독자적인 선염기법의 <운문산수화>를 창안한 4대 ‘임전 허문 초대전’을 특별하게 구성했다. 운림산방의 전통을 기반으로 하되 거기에 안주하지 않고 자신만의 조형적인 해석, 즉 개별적인 형식의 완성을 목표로 해왔기 때문이다. 미술평론가 신항섭은 “1980년대부터 새로운 수묵화 기법을 연구하기 시작하여 마침내 전대미문의 독자적인 조형기법을 완성했다. 이른바 ‘운무산수’라는 선염기법을 중심으로 하는 초현실적인 산수풍경이다.”라고 했다.
3대, 임인 허림, 농가일우, 지본 수묵담채, 1941, 55x44cm
2층 전시장에는 많이 알려지지 않은 운림산방 5대에 걸친 작품이 세대별 5~8점씩 총 40여점을 감상 할 수 있다. 이 자리는 한국 남화의 전통을 세운 1대 소치 허련을 비롯해, 남종 문인화의 품격을 세운 2대 미산 허형, 서정적인 실경으로 신남화를 제창한 3대 남농 허건, 타고난 미적 감각의 요절한 천재화가 3대 임인 허림, 독창적 선연법의 운무산수 4대 임전 허문, 역사인식과 인간의 내면적인 욕망을 형상화 한 5대 허진, 실경의 틀을 깬 5대 허재 등 운림산방 5대 작가 7명의 독창적인 작품 성향을 만날 수 있다. 무엇보다 이 자리는 남종산수화의 변화과정과 한국 근대미술사의 흐름을 읽을 수 있는 보기 드문 좋은 기회라 할 수 있다.
4대, 임전 허문, 산운, 지본수묵담채, 2021, 60x45cm.
인사아트프라자 박복신 회장은 “한국 남종화의 대를 잇는 운림산방 5대 전시를 통한 한국의 근현대미술사를 공부할 새로운 기회의 장이 될 것입니다.”라고 하며, “유화와 채색 한국화 중심으로 변해가고 있는 현재 미술문화에, 운림산방 5대 전시는 수묵화에 뜻을 두고 있는 후학들에게는 새로운 용기와 돌파구를 열어주는 계기가 될 것이며, 한국 수묵화의 위상을 다지는 데 큰 도움이 되리라 짐작합니다.”라고 말했다.
5대, 허진, 이종융합동물+유토피아2020-2, 한지에 수묵채색 및 아크릴, 2020, 162×130cm×2개
운림산방 5대 그림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는 기회가 또 있을까? K-문화가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으면서 우리의 전통 수묵화와 사상 또한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한국화 복고 바람을 일으킬 수 있는 뜻 깊은 전시이며, 5대에 걸쳐 200여 년간 화업 활동을 이어온 운림산방은 우리의 문화유산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인사아트프라자 갤러리는 1~4층은 갤러리이며 5층은 커피를 마시며 그림을 감상할 수 있는 카페갤러리, B2층은 인사동 유일한 대극장으로 구성된 문화예술인을 위한 복합문화공간이다. 각 층마다 126평의 넓은 공간이다. 이곳 1층에 4대 ‘임전 허문 초대전’, 2층은 ‘운림산방 5대전’으로 구성하여 전시된다. 남종산수화의 5대 200여 년의 화업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최고의 기회라 할 수 있다.
5대, 허재, 202311, 한지에 수묵, 아크릴, 2023, 24x19cm.
‘5대손 200여 년 화업’ 세계미술사에서도 전례 찾기 어려워
소치 허련부터 이어진 운림산방 5대 화맥
한국 남화의 전통을 세운 운림산방의 시조인 1대 소치 허련(小痴 許鍊, 1808∼1893)은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다. 윤씨 가문이 소장하고 있는 윤공재가의 3대 명화첩을 임묘하려 해남으로 갔다. 그곳 대흥사의 초의선사(草衣禪師)와 인연이 되어 인격과 학문을 익히고 초의선사의 소개로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의 문하에 입문해 그림을 배웠다. 그 후 소치의 명성이 헌종에게 알려져 어전에서 그림까지 그렸다 하여 명성이 더 높아졌다. 49살 때인 1857년에 귀향하여 건립한 곳이 운림산방이다. 이곳에서 만년까지 기거하며 작품을 제작하였다.
2대 미산 허형(米山 許瀅, 1861∼1938)은 소치의 네 아들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농사일을 거들며 살다가 늦은 나이에 그림을 시작했다. 그래서인지 산수보다는 화조를 즐겨 그렸다. 특히 노매(老梅)와 노송(老松) 등의 문인화풍은 부친을 능가하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뛰어났다. 62살이 되어서야 허준이라는 이름으로 조선미술전람회에 <하경산수도>를 출품, 입선한다. 넷째아들 남농 허건과 막내 임인 허림을 통하여 가문의 화맥을 이어주는 기교역할을 하였다. 의재 허백련도 유년시절 미산의 지도를 받았다.
3대 남농 허건(南農 許楗, 1908∼1987)은 전통양식을 현대적인 감각으로 승화시켜 향토적인 풍경을 실경화한 갈필산수의 화풍을 일구어 남농 특유의 신남화(新南畵)라는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1944년 조선미술전람회 최고상인 조선총독상을 수상함으로써 실력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나, 힘든 생계를 꾸려나가던 처지여서 한겨울 냉방에서 작업을 하다가 그만 동상에 걸렸고, 그로 인해 한쪽 다리를 절단하는 불행을 겪어야만 했다. 1946년 남화연구원을 개설하여 많은 후학을 지도하는 등 한국화 화단의 중흥을 이끄는 데 기여했다. 1982년 대화맥의 산실인 운림산방을 복원하였으며 동생 임인의 아들 허문에게 4대 화맥을 계승케 하였다.
3대 임인 허림(林人 許林, 1917∼1942)은 미산 허형의 5남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18살인 1935년 제14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처녀 출품한 <아침(朝)>이 입선, 이래 5년 연속 입선함으로써 천재 화가의 등장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조국에서 가져온 황토흙을 짓이겨 독창적인 토점화의 화법과 조형미로 일본 문부성전람회에 연이어 입선하였다. 그러나 천부적인 재능에서 불구하고 애석하게도 40여 점의 작품을 남기고 25살에 요절하였다. 그의 재능은 4대의 화맥을 잇는 임전 허문을 통해 다시 피어나고 있다.
4대 임전 허문(林田 許炆, 1941∼)은 생후 11개월에 부친을 여위었다. 임전은 25세에 요절한 임인의 독자다. 7살이 되던 해에 백부인 남농 허건의 슬하에 들어가 성장했다. 남농은 형편이 어려운 자신의 처지를 생각해 극구 말렸다고 하나, 고등학교 시절 문득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때문인지, 그림을 시작하여 홍익대학을 졸업했다. 실경 기반에 학문적 이론을 근거하여 동적인 매체를 주제로 한 운무산수화라는 독창적인 화풍을 일구어 안개작가라는 별칭을 얻었다. 대한민국미술대전 심사위원과 운영위원을 역임한 그는 운무산수로 운림산방 4대 화맥을 이어가고 있다.
5대 허진(許塡, 1962∼)은 남농 허건의 손자이며 서울대학교 회화과를 졸업했다. 운림산방의 후손으로 초창기엔 임전 화실을 드나들며 변형적인 수묵산수를 그렸으나 대학 졸업 직후부터 산수화와는 다른 길을 택했다. 정적인 이미지의 산수가 아니라 동적인 존재로서의 인간과 동물에의 관심을 가져 역사 인식 및 인간의 내면적인 욕망을 형상화하고 있다. 현재 전남대학교 예술대학 미술학과 한국화 전공 교수로 재직 중이다.
5대 허재(許在, 1973∼) 역시 남농 허건의 손자로서 홍익대학교 동양화과를 졸업했다. 전통적인 남도 문인화 풍과 실재하는 풍경을 사생이라는 방식을 도입하여 수묵산수의 존재감에 자신만의 현대미학을 가미한 작품을 하고 있다. 그의 조형세계는 자연의 풍경을 기반으로 하되 기존의 정형화된 형식과는 완연히 다른 형식미를 탐색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김보근 선임기자 tree21@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