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우의 서울 백년가게

서예·전각의 달인…“한국 인장 예술 한 차원 높여”

인예랑(印藝廊) since1979

등록 : 2017-10-19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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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공방 시작…46년 집념의 길

인장, 전각, 서예 모두 능해

대한민국 명장·신지식인 등에 뽑혀

“인장 기예 홀시는 무지의 소산”

전통문화 보전·장애인 취업에 필요

인감증명법 개정 “정부에 호소”

#사라져가는 도장가게


백년에 이르거나 백년을 향해 가는 가게를 소개하는 것이 마땅하건만, 이번 열한번째 이야기는 희미한 촛불의 잔영을 바라보는 애잔함으로 기사를 시작한다. 1999년 대한민국 정부는 “규제완화에 필요하다”며 도장을 새겨 판매하는 업종에 관한 법률인 ‘인장(印章)업법’을 폐지했다. 수많은 ‘도장가게’들과 인장공예 장인들이 한순간에 직업(인)으로서의 법적 근거를 잃었고, 도장을 파는 일은 기계만 있으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되고 말았다.

컴퓨터의 발달, 온라인거래의 활성화, 사인(서명) 제도 도입 등 한꺼번에 밀어닥친 시대의 변화는 수많은 ‘도장쟁이’들을 좌절의 나락으로 밀어넣었다. 1996년 현재 6700여명이던 인장인 단체 회원 수는 법 폐지를 기점으로 크게 줄기 시작해, 불과 10년 만에 2900여명 수준으로 떨어졌다.(사단법인 한국인장인업연합회 회원 통계) 인장공예기능사 자격시험(고용노동부 주관)도 2004년을 끝으로 “응시자가 없다”는 이유로 사실상 폐지됐다. 현재 2600여명으로 추산되는 인장공예기능사 자격증은 ‘장롱 면허’나 다름없이 방치돼 있다. 전각으로서의 예술성과 인증(印證)의 실용성을 겸비하면서 오랫동안 우리 전통기예의 하나였던 인장이 어느덧 절멸의 위기에 있는 셈이다.

1979년 인사동에서 첫선을 보인 인예랑은 예술성 높은 인장으로 일찍부터 명성을 쌓았다. 인각과 전각에 모두 능해 2012년 제5대 대한민국 국새 제작에 참여한 황보근 명장이 전각에 몰두하고 있다.

#황보근을 찾아가라

손으로 새기는 수제 인장은 정말 맥이 끊어지는 것일까? 서울의 도장가게들이 모여 있는 창신동 일대마저도 이제는 드문드문 도장가게와 재료상들이 눈에 띌 뿐이다. 손으로 정성껏 글자를 새긴 수제 인장을 더는 볼 수 없을지 모른다는 비관 속에서도 전통문화로서의 명맥이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 인장 명가로 이름이 높았던 신세계백화점 옥새당 대표 일연 이동일(78) 선생을 찾아갔다.

이동일은 가난에 쫓겨 초등학교를 채 마치지 못한 나이에 인장 일에 들어섰지만 일찍이 중국 전각서적을 섭렵하며 인장업계의 이론가로 주목을 받았고, “하루에 한개만 새긴다”는 작가주의 명인으로 유명했다. 63세 때인 2002년 대한민국 인장공예 명장에 선정된 그는 노경에 들자 가게를 접고, 자택에서 지인들의 부탁성 주문에만 응하고 있다. 인장업의 미래를 묻는 기자에게 그가 말했다. “나는 이미 늙었소. 인사동에 황보근이라고 있는데, 그에게 가보시오.”

평생 도장을 파는 장인의 도구는 생각보다 단순했다. 낡은 칫솔과 ‘양날 평끌’이 전부다. 펜·수채화 김경래

#보이차 상인이 된 인장 명장

이동일은 황보근에 대해 “예술적인 측면에서 당대 최고”라고 했다. “60대 중반의 완숙한 나이이고, 인장기능사회 회장도 맡고 있으니, 인장업계를 대표해 말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도 했다. 노인의 천거를 듣고 찾아간 곳은 뜻밖에도 인장가게가 아니라 보이차를 파는 가게였다. 오가면서 몇번 보기도 했던 보이차 상점 ‘푸어재’의 주인이 “우리나라 인장 예술을 한 차원 높였다”는 격찬을 받았던 동구 황보근(66)이었다.

인장의 명인이 도장이 아니라 차를 팔고 있는 이유에 대해서는 더 묻지 않기로 하자. 명장의 입으로 “도장만으로 밥 먹고 살기 힘들다”는 말을 꼭 들어야 필요는 없으니까. 그는 2012년 대한민국 인장 명장에 선정된 뒤 인장가게를 인사동 골목 안 빌딩 속에 숨겼다. 명장이 보이차 장사를 하면서 인장가게도 열고 있는 게 스스로도 보기가 좋지 않았다.

건국빌딩(인사동4길 17) 본관 2층에 있는 황보근의 인예랑(印藝廊)은 인장가게라기보다는 서(書, 붓글씨)와 각(刻, 전각)의 공방이자 시인·묵객들의 사랑방 같은 분위기다. 작업탁자를 둘러싼 공간에는 그동안 그가 새긴 수많은 명품 도장과 전각, 서예 작품들이 즐비하다. 황보근은 전각뿐 아니라 붓글씨에서도 일가를 이룬 사람이다. 그가 젊은 시절 한·중·일 30~40대 청년작가 초대전(1997)에 출품한 한글서예 ‘오우가’, 올해 예술의 전당 주최 오늘의 한국서예전 출품작 ‘반야심경’은 얼핏 봐도 예사롭지 않은 명품이다.

황보근 명장이 새긴 명품 도장들과 한글 국새 인쇄본과 전각 작품.

#모방에서 예술로

황보근의 이력은 화려하다. 그는 30대 초반의 나이에 전국 인각기술경연대회에서 사상 처음으로 각인부와 고무인부에서 모두 대상(1985)을 탄 인물이다. 인장인을 대표하여 제5대 대한민국 국새 제작·감리위원(2012)을 맡으며 대한민국 명장의 반열에 올랐다.

황보근은 서예를 잘하는 아버지가 고무도장에 낙관을 새기는 것을 흉내 내며 성장했다. 그는 모방의 귀재였다. 한번 본 것은 어김없이 모사했다. 부산에서 고교를 다니다 말고 서울에 올라와 훗날 인장공예 명장(2008)에 오른 대선배 유태흥의 지도를 받으며 인장업계에 입문했다. 1971년 군 제대 후 인예랑의 모태가 되는 개인 공방을 열면서 독자적인 경지를 개척하기 시작했다. 이 무렵부터 인장의 기초가 되는 서예와 전각에도 눈을 돌렸다.

“정식으로 글씨를 배우라고 권하는 분들이 있었지만 나는 시큰둥했다. 웬만한 글씨는 대충 흉내 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을 할수록 그게 아니었다. 정통 서법을 익히지 않고서는 인장에서도 더 높은 차원을 열기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무슨 일이건 최고가 아니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 성격도 그를 “미친 듯이” 각의 세계로 몰아넣었다.

“인사동에 인예랑 간판을 건 직후인 80년대 초, 한복 치맛단에 들어가는 금박문양 원판을 새기는 일을 맡게 되었는데, 원판 하나에는 보통 40~50가지의 글씨와 무늬가 들어간다. 이런 원판 제작을 130여 차례 반복하면서 나도 모르게 각의 기술에 완전히 눈을 떴다.”

한번 칼을 들면 만족할 때까지 며칠씩 밤을 새우는 집념과 서예·전각으로 다진 기본기가 합쳐지면서 그의 인장 기예는 한 차원 높은 경지로 들어서게 되었다.

수많은 선배를 제치고 불과 31살에 인장기능사 1급 자격증(1981)을 딴 그는 4년 뒤 한국 인각 작품 공모전 종합대상을 받으며 일약 인장계의 총아로 발돋움했다. 이후 대한민국 미술대전 전각 부문 최고상(1994), 대한민국 미술대전 서예 부문 심사위원장(1995) 등을 거치면서 인장, 전각, 서예 각 분야에서 모두 대가의 반열에 올라섰다. 인장가로서는 드물게 과천국립현대미술관, 예술의 전당, 서울시립미술관 등에서 모두 초대작가로 작품을 전시했다. 

도장 일에서 시작해 전각 예술과 서예로 예술 영역을 확장해간 그는 “손과 머리와 마음이 함께 움직일 때 예술은 아름답다”(J.러스킨)는 말을 좋아한다. “손으로 할 수 있는 능력만으로는 기술이나 기능에 불과하다. 손기술에 그 분야에 대한 지식(머리)과 사랑(마음)이 함께할 때 예술의 경지에 들어갈 수 있다고 믿는다.”

그는 인장 부문에서 유태흥이 스승이라면, 전각과 서예에서는 전각가 김양동(전 계명대 교수), 인간과 예술이 하나가 되는 경지는 장일순(1928~1994)이나 김구용(95) 같은 철학자, 시인과의 교유에서 가르침을 얻었다고 말한다. “무위당(장일순)으로부터 인향만리의 품격을 배웠다”는 그는 인예랑의 중앙 벽에 무위당의 글씨 ‘석각락’(石刻樂:돌을 새기는 즐거움) 을 걸어두고 “각을 할 때마다 ‘즐거움’을 생각”한다.

황 명장이 인예랑에 전시한 주요 작품들의 제작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인감만은 손으로 만든 도장으로

그런 그에게 인장일은 단순한 생업만은 아니다. “도장도 하나의 상품이다 보니 상업적인 측면을 무시할 수 없다. 도장에서 길상(운수가 좋을 조짐)을 따지는 일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인장이란 그것을 새긴 사람의 정성과 자세, 그것을 주문한 사람의 인품과 심미안이 교감할 때 명품이 되는 것이다. 그런 인장에 길상과 화복도 담기게 된다.”

“인장예술이 돈이 안 되는 지금” 그는 예술가로서 자신의 가치와 예술성을 좋아하고 높이 평가해주는 고객들을 좋아하고, 그런 고객들에게 작품을 만들어준다고 한다.

“값도 마찬가지다. 사회적 지위나 재부가 있는 분은 그에 걸맞은 값으로 대우하는 것이 예의이고, 순수하게 제 각이 좋아서 찾아오는 분들에게는 그분의 사정에 맞는 가격으로 예우하는 게 서로 간의 예의라고 생각한다. 작품에 기울이는 정성에는 차이가 있을 수 없다.”

인예랑은 또 좋은 인장 재료를 찾는 사람들이 자주 찾는 곳이다. ‘벼락 맞은 대추나무’나 상아 같은 고급 희귀 재료, 회양목 같은 도장용 나무 등은 대중들에게 많이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는 “더욱 저렴하면서도 좋은 작품을 새길 수 있는 새로운 인장 재료를 찾으려는 노력은 멈추지 말아야 한다”며 다양한 명인 재료를 발굴해 새롭고 좋은 작품이 탄생하도록 돕는 일도 하고 있다.

그는 앞으로 할 일에 대해 두 가지를 강조한다. 개인적으로는 그동안 자신이 추구한 인장공예의 기술과 미학을 집대성한 책을 내는 것이고, 인장업계 차원에서는 수제 인장으로만 인감을 제작하도록 명시하는 인감증명법 개정을 관철하는 것이다.

“한·중·일 인감 제도는 서양의 공증 제도보다 비용이 싸고, 위·변조 방지 기능도 탁월한 제도이다. 기계로 제작한 인장은 위변조를 할 수 있지만, 사람 손으로 새긴 것은 불가능하다. 오죽하면 변호사와 공증 단체들도 인감 제도의 필요성을 주장하겠는가?”

그는 인장 기능은 “주로 앉아서 일하는 장애인에게도 좋은 직업”이라며 전통문화 보전과 함께 일자리 확보 차원에서도 인장공예의 보호 필요성을 정부에 꼭 알리고 싶다고 말했다.

글 이인우 선임기자 iwlee21@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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