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도둑이 따로 없다

바지락볶음 김작가의 해먹거나 사먹거나

등록 : 2016-04-21 16:19 수정 : 2016-04-22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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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의 날개처럼 얇은 외투를 걸치고 밖으로 나선다. 햇빛은 눈부시고 바람은 선선하다. 벚꽃은 절정을 지나 흩날려도 벚꽃이다. 짧고 화려해서 봄이 아름답다. 겨우내 영양을 축적했던 바다의 산물들도 봄을 맞아 맛을 한껏 끌어올린다.

저녁 약속에 으레 소주잔을 비우곤 하는 술꾼들의 입맛도 이맘때면 화색이 돈다. 만취를 부르는 제철 해산물들이 하나둘 등장하기 때문이다. 바다가 주는 봄맞이 선물은 많다. 봄철 주꾸미를 펄펄 끓는 육수에 살짝 담가 탱글탱글해진 다리를 먹고, 몸통을 좀 더 익혀 입에 넣으면 고소한 알이 혀와 입천장에서 뛰논다. 딱 한잔만 마시겠다던 다짐은 이미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다.

섬진강 하구에서 올라오는 벚굴, 아는 사람은 안다. 벚꽃이 필 때만 먹을 수 있다 하여 벚굴이다. 어른 손으로 한뼘을 왔다갔다 하는 크기에 일단 압도된다. 구워야 제맛이다. 불 힘으로 벌어진 껍질 안에 우윳빛 속살이 자태를 드러낸다. 겨울 굴에 비할 수 없는 화사한 육즙과 식감은 압도적이다. 그리고 오늘의 주인공, 바지락이 있다.

주꾸미, 벚굴에 비하면 너무 평범하다. 식탁의 주연이라기보다 조연에 가까운 이미지다. 동네 마트만 가도 널리고 널린 게 바지락 아닌가. 천만의 말씀! 봄이 되면 갯벌을 나와 선수들을 찾아 다니는 자연산 바지락을 몰라서 하는 말이다. 사시사철 볼 수 있는 양식 바지락은 보통 손가락 한 마디만 하다. 다 크기도 전에 캐서 그렇다. 서해의 뻘 속에서 양껏 산 놈들은 보통 4㎝, 크면 6㎝까지 자란다.


이런 바지락으로 조개탕을 끓이면 다른 게 필요 없다. 껍질이 벌어질 때까지 끓인 뒤 다진 마늘 조금만 넣으면 끝이다. 간을 더하지 않아도 충분히 짭조롬할 뿐 아니라 시원한 감칠맛이 극에 달한다. 남는 화이트와인이 있으면 봉골레파스타를 해 먹어도 좋을 것이다. 다른 봄철 해산물에 비하면 값도 훨씬 싸다. 인터넷을 조금만 찾아보면 산지 직거래로 살 수 있는 곳들이 꽤 있다.

 

그렇게 봄철 바지락을 샀다. 5㎏ 정도였다. 탕을 끓이고 봉골레파스타를 했다. 그래도 넉넉히 남았다. 또 뭘할 수 있을까. 잠깐 생각해 보고 바지락볶음을 골랐다. 바지락 자체의 감칠맛이 워낙 강하니 센 불에 볶는 것만으로도 맛의 팔할은 끌어올릴 수 있다. 양념은 그저 거들 뿐이다. 간장과 고춧가루만 살짝 더해도 충분하다.

그래도 조금만 더 나가자. 기름 두른 팬이 달궈지면 불을 살짝 줄이고 다진 마늘과 두반장, 굴소스를 찻숟가락 하나 정도씩 넣는다. 중식 바람이 불면서 중국식 양념들이 출시되고 있으니 노추간장을 살짝 더하면 때깔과 맛을 더할 수 있다. 그다음, 바지락을 넣은 뒤 다시 불을 올려 볶는다. 꽃이 피듯 껍질이 벌어진다. 배어 나온 육즙이 양념과 뒤섞인다. 불을 끈다. 너무 오래 볶으면 조갯살은 질겨진다. 주걱으로 살살 젓는다. 육즙과 양념이 고루 바지락 살에 묻는다. 부추나 미나리 같은 봄철 채소를 얹는다. 마지막 잔열에 숨이 죽으면 끝이다. 10분이 걸리지 않는다.

이렇게 볶아낸 바지락은 보기에도 근사하지만 맛도 기가 막히다. 중국 양념들이 좋은 바지락의 살맛을 맛있게 받쳐 준다. 술도둑이 따로 없다. 바지락을 골라 먹은 후 남은 양념에 소면을 비비면, 선주후면이 한방에 해결된다. 잘 마셨다. 잘 먹었다. 그제서야 게걸스럽게 먹고 마시던 일행들의 표정을 살폈다. 술에 취해 있었다. 봄바다에 취해 있었다. 봄볕처럼 행복해 보였다.

글·사진 김작가 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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