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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 빼고는 다 바꾸겠다”
일본의 고급 화과자처럼
떡의 고급화·미식화 추구
3대 주인장의 야심찬 혁신 선언
조선 마지막 상궁 한희순에게
궁중 떡 제조비법 배운 홍간난 개업
전통과 브랜드 결합한 ‘보기 좋은 떡’
비원떡집은 소년 시절부터 떡집 일을 시작한 2대 주인 안인철(앉은 이)씨에서 아들 안상민(서 있는 이)씨에게로 가업으로 이어지고 있다. 상민씨는 대학을 1학년도 채 마치지 않고 떡의 세계에 뛰어들었다. 한산한 시간을 틈타 부자가 모처럼 함께 카메라 앞으로 왔다.
70년 가까운 역사를 지닌 떡집이 ‘시험’에 들었다. 전통의 맛에 현대의 디자인을 입히는 실험이다.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는 속담을 자기만의 브랜드로 만들겠다는 야심 찬 도전이기도 하다. 과연 예쁘게 낱개로 포장한 작은 한국 떡집이 수많은 베이커리의 숲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33살 청년 사장의 머릿속에는 매일같이 번개가 친다. 서울 종로구 안국동 네거리에서 경복궁 방향으로 50m쯤 걸어가면 승복 상점 건물 1층에 간판도 없는 조그만 가게를 만날 수 있다. 무심코 지나치면 떡집인가 싶을 정도다. 기왓장으로 이은 처마 아래 통유리창으로 된 진열장과 안쪽으로 들어간 미닫이 입구는 갤러리를 연상시킨다. 안으로 들어가면 진열대 안에 여러 종류의 떡들이 주얼리 가게의 보석처럼 손님을 맞이한다. 떡살, 절구, 부엌칼 등 옛날 주방 도구들도 가게 한쪽에 조용히 자리잡고 있다. 기존 떡집의 고정관념을 깨고 전통과 현대를 조화시키려는 주인의 생각이 숨은 듯이 드러난다.
궁중 떡을 만드는 비법이 오랜 세월 함께한 밀방망이와 유기잔 속에 녹아 있는 듯하다. 펜·수채화 김경래 기자 kkim@hani.co.kr
이 ‘무명’의 궁중 떡 갤러리가 ‘비원떡집’(종로구 율곡로 20)이다. 1949년 문을 열었으니 올해로 68년째다. 비원떡집은 “60년 전통의 수제 궁중 떡 명가”라는 홍보 문구대로 오랫동안 서울 북촌 양반가의 떡 맛을 대표한다는 소리를 들어왔다. 30년 이상 음식 비평을 한 김순경 음식 칼럼니스트는 “서울 북촌 떡을 어느 곳보다 얌전하게 한다는 입소문이 난 전통 떡 전문집”(<자랑스런 한식진미 100집>, 길과맛, 2013)이라고 소개했다. 최근에는 젊은층이 좋아하는 ‘맛집’으로 주목받고 있다. 텔레비전 유명 음식 프로그램에서 비원떡집이 “서울에서 가장 맛있는 떡집 중 하나”로 집중 조명을 받았고, 지난 9월에는 서울시가 선정하는 ‘서울시 오래가게’에 뽑히기도 했다.
이 유서 깊은 떡집 주인은 이제 곧 만 34살이 될 청년 안상민(33)이다. 11년째 떡에 미쳐 있고, 5년 전 아버지 안인철(63)에게 대표 명함을 넘겨받았다. 가게의 미래를 책임지게 된 청년은 비원떡집이 40년 넘게 떡을 만져온 아버지와 어머니의 손맛에 걸맞은 ‘외형’을 갖출 때가 되었다고 여겼다. 그는 가게를 ‘혁신’하기로 결심한다.
#역사
서울의 북촌은 떡 문화가 발달했다. 궁궐을 중심으로 세족의 집들이 즐비했으니 본래부터 먹거리도 풍성하고 다양했다. 왕가의 떡이 북촌의 반가로 전해지고, 그 떡이 다시 민간으로 넘친 곳이 북촌과 가까운 시장 지역 낙원동 일대였다. 지금도 낙원동에는 역사가 100년이 넘은 ‘원조낙원떡집’을 비롯해 수십년 이상 떡장사를 해온 가게들이 모여 있다. 비원떡집도 이 낙원시장에서 역사를 시작했다.
1대 홍간난(1925 ~1999) 할머니 때부터 사용해온 목제 떡살.
70여년 전 17살 처녀 홍간난(1999년 작고)은 떡 빚는 솜씨가 남달랐다. 어느 날 창덕궁 낙선재에 주문한 떡을 들고 갔다가 훗날 궁중 음식 기능 보유자로 지정받은 ‘마지막 주방 상궁’ 한희순의 눈에 든다. 한 상궁으로부터 궁중 떡 빚는 법을 차근차근 배운 홍간난은 점차 “북촌 반가의 떡 맛에 궁중 특유의 기품과 규범을 더할 수 있게 되었다.”(김순경) 1949년 홍간난은 지금의 낙원상가 자리인 낙원시장 길가에 작은 천막을 치고 떡집을 차린다. 비원떡집의 첫걸음이다.
20여년 후인 1970년대 초반부터 한 소년이 이 떡집에서 떡메를 들게 된다. 2대 주인 안인철이다. 이모 홍간난에게 떡 만들기와 떡집 운영을 배운 안인철은 1984년 결혼한 최정옥과 함께 떡집을 물려받는다. 20대 초반부터 본격적으로 떡 만들기에 나선 큰아들 상민이 ‘3대 경영’을 시작한 것은 2012년부터였다. 비원떡집이 낙원동에서 익선동, 운니동 시절을 거쳐 지금의 수송동 자리에 전시·소매점 형태의 가게를 연 것도 이 무렵이다. 성공의 핵심은 떡의 고급화·미식화다. 1대 주인 홍 할머니의 손맛에서 탄생한 전통의 비원떡집이 60여년 만에 새로운 변화에 도전한 것이다. 혁신의 과제는 맛에 멋을 더하는 것이다.
#혁신
상민은 어려서부터 종일 부엌에서 힘들게 일하는 부모를 보며 자랐다. 어린 마음에도 아버지와 어머니가 고생하는 것에 비해 떡집에 돌아오는 보상이 너무 적다고 여겼다. 그렇다고 떡집을 하는 부모를 부끄럽게 여긴 적은 없었다. 대학에 들어갔지만 공부에 의미를 느끼지 못했다. 1학기를 마치고 군대를 다녀와 복학했지만 역시나였다. 대학을 떠난 그가 간 곳은 떡집 부엌이었다. 본격적으로 ‘떡 공부’를 시작했다. 20~30여 가지 떡을 마음껏 만들 수 있을 만큼 시간이 흐르자, 비원떡집의 미래가 걱정됐다. 비원떡집의 이름에 갇혀 점점 우물 안 개구리가 되는 건 아닐까? 어쩌면 더 거둘 수 있는 결실을 모르고 있는 게 아닐까?
안상민씨의 어머니가 주방에서 대추, 땅콩, 호두, 잣 등을 유자꿀에 버무려 두텁떡 소를 만들고 있다.
변화가 필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한 상민은 아버지에게 말했다. “맛 빼고 다 바꾸고 싶습니다.”
앉아서 주문만 기다리는 영업 방식은 비전이 없어 보였다. 비원떡집이란 브랜드로 새로운 고객을 발굴할 필요가 절실했다. “맛은 잘 지키되, 맛을 더 잘 표현하는 방식을 고민하자.” 상투적인 포장이나 스티로폼 용기 등을 과감히 버리고 세련되고 품격 있는 포장과 디자인을 모색했다. 일본 화과자점, 국내외 유명 베이커리들을 찾아다녔다. “요즘 사람들의 감각과 취향에 맞는 디자인 요소를 가미하려고 노력했다.” 수송동에 궁중 떡 갤러리를 열어 고객의 반응과 흐름을 직접 살펴 변화에 반영한다는 생각도 같은 맥락이었다.
낱개 포장을 한 패키지 세트. 왼쪽부터 약식, 단자, 두텁떡, 쌍개피떡, 잣설기. 비원떡집의 대표 떡들이다.
“서울 북촌 떡 맛을 제일 잘 낸다”는 전통적인 명성에 현대적인 멋을 입히려는 비원떡집의 시도는 성공했을까? “매출이 배가량 늘었다. 고객은 기존 단골과 신규 고객이 반반을 이룬다. 새로운 고객층이 늘어나는 동안 기존 단골들의 맛에 대한 불만은 거의 없었다.”
#미래
비원떡집의 대표 메뉴는 ‘쌍개피떡’과 ‘두텁떡’이다. 모두 궁중과 반가에서 즐긴 고급 떡이다. 메뉴에도 변화가 있을까?
“개피떡은 팥고물 껍질을 벗겨 소를 만든다고 해서 ‘거피’(去皮)라 하고, 소에 설탕과 계핏가루를 섞으면서는 ‘계피떡’이라고도 한 것이 유래가 되었다. 개피떡 두 개를 붙인 것이 ‘쌍개피떡’이다. 개피떡은 먹을 때 바람이 피식 나온다고 해서 ‘바람떡’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서울 고유의 떡이다. ‘두텁떡’은 궁중에서 먹던 떡이다. 고종이 즐겨 먹었다고 한다. 찰떡 안에 호두, 밤, 잣, 대추 등 견과류와 유자꿀을 넣고 고물을 얹어 쪄서 만든다. 손이 많이 가고 만드는 방식도 다른 떡과 사뭇 다르다. 이 밖에 약식, 단자, 잣설기 등이 핵심 메뉴다. 만들 수 있는 떡 종류는 수십 가지가 넘지만 가장 반응이 좋은 5가지 떡에 집중하고 있다. 새 메뉴 개발은 다음 과제다.”
값은 조금 비싸 보인다.
“보통 시장 떡집의 배 정도 된다. 비슷한 콘셉트의 다른 떡집 시세와 맞춘 점도 있지만, 재료 단가의 차이가 크다. 국내 생산이 거의 없는 계핏가루(베트남 산)만 빼고 팥, 잣, 호두, 유자 등 모든 재료가 국산이다. 경동시장에 오랜 거래처가 있어 물량 확보에는 큰 문제가 없다.”
소량생산체제로 가게 경영이 유지될 수 있을까?
“일반적인 떡집이라면 어려울 것이다. 반대로 우리도 쌀 몇 가마씩 떡을 만들 수는 없다. 우린 수제 떡이라는 콘셉트에 충실해야 한다. 그래야 비원떡집이다. 비원떡집은 외부 인력을 쓰지 않는다. 주문이 넘치면 남동생과 고모가 거든다.”
84년생 미혼이다. 미래를 함께할 사람이 필요하지 않을까?
“아직 혼자서 할 만하다. 절실해지면 여자도 나타나지 않을까?”
5년째 간판이 없는 게 특이하다. 이유는?
“특별한 이유는 없다. 불편을 느끼지 못하니까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 다만 비원떡집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간판을 생각한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내가 만족할 수 있는 수준을 얻고 싶다.”
상민씨는 디자인을 정식으로 배운 적 없지만 스스로 감각이 있다고 생각한다. 비원떡집의 로고도 본인이 직접 글자꼴을 골라 만들었다. 간판 자리가 아직도 비어 있다는 것은 아마도 비원떡집의 미래에 대한 종합 설계도를 지금도 그리는 중이라는 뜻일 것이다. 비원떡집의 혁신은 계속되고 있다.
글 이인우 선임기자 iwlee21@hani.co.kr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