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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주·박성철·연형묵도 들른 곳
분단 장벽도 우리의 맛 막지 못해
숱한 정치인·문인·언론인 등이
작취미성의 사자후를 토해
최초의 용금옥은 20대 초반
손맛 좋은 새댁 홍기녀가 창업
1997년 이후 두 집으로 분화
다동 용금옥은 곱창 육수 전통
통인동 용금옥은 사골 육수로
통인동 용금옥은 사골 육수로
용금옥은 1997년 창업주 홍기녀의 큰아들네와 막내며느리네로 나뉘었다. 각자의 개성에 따라 맛 차이도 있다. 1960년대부터 자리한 다동 큰아들 집.
신영복의 글씨로 간판을 삼은 통인동 막내며느리 집.
지금은 절판된 <다큐멘터리 용금옥 시대> (1993)라는 책이 있다. 해방 후 김일성의 동생 김영주가 김일선(金日鮮)이라는 이름으로 중국에서 귀국해, 서울에서 추어탕 한 그릇 먹고 서울역에서 기차로 평양 간 이야기가 담겨 있다. 수주 변영로와 공초 오상순 등 당대 기인들의 상상을 절하는 기행 기담도 수두룩하다. 그러나 이 책의 진짜 주인공은 제목처럼 ‘용금옥’(湧金屋)이다.
책을 쓴 중국항일유격대 출신의 시인 이용상(2005년 작고)은 이렇게 적고 있다. “8.15 해방이 되고 양풍이 불어닥치고 우리 고유의 송편보다는 초콜릿으로 입맛이 변해가던 시대에도 끝까지 추탕으로 버티고 있는 노포 용금옥은 그 자체가 우리의 저항처럼 보인다. 때문에 나는 해방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를 용금옥 시대라고 구분 지은 것이다.” 한 개인의 회고담이라지만 일개 음식점이 한 시대의 대명사로 당당히 명명된 것은 영광이 아닐 수 없다.
시인 이용상이 1993년 출판한 . 해방 후 여러 기인들의 비사가 용금옥을 무대로 펼쳐져 있다.
이야기 속의 추(어)탕집 용금옥은 장장 86년째 ‘실존’하며 지금은 흔치 않은 서울식 추탕집의 명맥을 잇고 있다. 비슷한 시기에 문을 연 안암동의 ‘곰보추탕’이 얼마 전 아쉽게 문을 닫았고, 평창동 ‘형제추탕’도 무슨 까닭인지 임시휴업 중인지라, 추탕 애호가에게는 용금옥의 존재가 더욱 소중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용금옥이 또 두 군데의 용금옥으로 ‘분화’해 있다. 본래의 중구 다동 자리에는 용금옥 큰집이, 서촌 통인동에는 분가한 용금옥이 있다. 다동 용금옥은 창업주의 큰아들네가, 통인동 용금옥은 막내며느리네가 하고 있다. 한 뿌리에서 나와 각자의 사정을 좇아 독자적인 용금옥으로 나뉘었다.
노포의 명맥이 오직 한줄기로만 이어져야 한다는 법은 없다. 누가 계승하든 몇 개로 가지를 쳤든, 중요한 것은 손님에게 환영받는 이유일 테니까.
#최초의 용금옥은 1932년 당시 20대 초반의 새댁 홍기녀(1982년 73살로 타계)가 창업했다. 음식 솜씨가 좋았던 홍기녀는 10살 위 남편 신석숭(1966년 타계)의 한량 기질 탓에 가계를 꾸리기가 쉽지 않자 추탕을 끓여 팔기 시작했다. 이용상의 회고에 따르면, 홍기녀는 당시 여성치고는 거침없는 말씨에다 “무엇이든 주물럭대기만 하면 기가 막힌 맛으로 변하는” 손맛을 지녔다. 용금옥은 금세 유명해져 전성기에는 가게(현재 서울시청 옆 코오롱빌딩 자리인 무교동 45번지) 규모가 100여 평이나 됐다고 한다.
홍기녀 할머니. 추어탕 한 그릇으로 종로를 주름잡던 여장부의 모습이 느껴진다. 펜·수채화 김경래 기자 kkim@hani.co.kr
용금옥은 서울시청과 야당인 민주당사가 가까이 있었다. 주요 언론사 대부분도 부근이었다. 담장을 사이로 무교양조장이 있어서 밀주 단속 시대에는 담을 뚫은 호스로 막걸리를 대놓고(단골 중엔 시청 공무원이 많았다) 먹을 수 있었으니, 조병옥을 비롯한 숱한 야당 정치인, 변영로를 비롯한 숱한 시인·예술가, 장안의 숱한 기자, 칼럼니스트들이 작취미성(어제 마신 술이 아직 깨지 않음)의 사자후를 토하는 웅변장 같은 곳이었다. 소설가이자 언론인 선우휘는 “해방 후 서울의 언론인·문화예술인치고 용금옥을 모르면 가짜”라고 자기 칼럼에 공언할 정도였다.
해방 공간부터 5·16 쿠데타 뒤 무교동 재개발로 본래의 용금옥 한옥이 헐리고 현재의 다동 한옥(홍기녀가 점심 일 끝낸 뒤 쉬려고 산 집이었다 한다)으로 옮긴 1960년대 중반까지, 용금옥은 근대 서울의 이면사이자 인물지의 무대였다.
해방 공간에는 좌우익을 불문한 술집이었고, 6·25 휴전회담 때는 교수 출신의 북쪽 통역관(김동석)이 남쪽 기자들에게 용금옥 주인의 안부를 물어대 유명해졌다. 20년 후인 1973년 서울에 온 박성철 북쪽 대표가 “서울에 아직도 용금옥이 있습니까?”라고 물어서 또 유명해졌다.(아마도 직접 서울에 오지 못한 김영주를 대신한 질문이었을 것이다.) 1990년에는 북한 총리 연형묵이 서울 체류 동안 두 번이나 용금옥 추탕을 먹고 간 일도 있었다. 남북이 갈라지기 전 ‘경성의 추억’을 공유한 제제다사(뛰어난 여러 선비)들에게 용금옥 추탕은 좌우 대립도, 분단 장벽도 막지 못한 ‘우리’의 별미였던 것이다.
용금옥이 다시 장안의 명소로 주목받게 된 것은 1980년대. 홍기녀의 사망으로 갑작스럽게 가게를 떠맡은 막내며느리 한정자에게 시어머니의 부재는 큰 타격이었다. 손님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던 무렵, <조선일보>와 한국방송(KBS) 등 매스컴에서 한국 전통문화의 하나로 용금옥을 조명해준 것이다. “고유 문화와 민족 전통을 무슨 구름 위에 뜬 무지개인 것처럼 고상한 것으로만 생각하는 폐단이 있지만, 추탕 같은 서민적인 맛의 전통을 지키는 것은 가장 문화적이며, 그런 솜씨를 지닌 사람들을 인간문화재로 지정해도 좋다고까지 나는 생각한다.”(선우휘)
용금옥의 명성은 홍기녀의 반세기가 가장 큰 영향을 미쳤겠으나, 이처럼 당시 유명 언론인들이 단골로 드나들 수 있었던 입지 조건도 무시할 수 없었다. 이후 용금옥은 한정자를 중심으로 10여 년 이상 성업하다가, 1997년 두 곳의 용금옥으로 분가했다. 다동 용금옥은 큰아들의 손자 신동민(56)씨가 맡게 되었고, 한정자(75)씨는 근처 무교동으로 분가했다가 10년 후 통인동으로 옮겨와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서울식 추어탕은 이름도 ‘추탕’으로 다르지만, 무엇보다 조리법이 남도식, 원주식 등 지방과 차이가 난다. 사골과 양지, 내장 등 소고기를 끓인 육수에 각종 부재료를 넣고 끓이다가 삶은 미꾸라지를 채로 거르지 않고 통째로 넣어 한번 더 끓여 내놓는다. 현대에는 손님의 요구에 따라 미꾸라지를 갈아넣은 탕도 내놓는다. 곱창과 목이·느타리·싸리 등 버섯류와 파, 호박 등 다양한 부재료가 들어가 탕 한 그릇만으로도 식사뿐 아니라 술안주로도 그만이다. 이런 특징은 서울이 직접 농사를 짓지 않고 이동인구가 많은 도시라는 점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용금옥은 서울식 추탕의 전통 아래 자기만의 개성도 발전시켰다. 서울식 추탕 중 가장 정통에 가까왔다는 곰보추탕이 양지를 위주로 한 육수를 냈다면, 홍기녀의 용금옥은 내장(곱창)을 차별점으로 삼았다. 현재도 다동의 용금옥은 “할머니 손맛을 지키는 게 원칙”이라는 신념 아래 곱창 육수를 쓰는 전통을 고수하고 있다. 반면 통인동 용금옥은 영양 구성과 위생을 고려해 곱창 육수 대신 사골 육수를 내고 있다. 곱창은 완전히 기름기를 뺀 것을 부재료로 쓴다. 서울식 추탕은 본래 맵기로 소문났으나, 시대 변화에 따라 매운맛을 많이 뺐다. 용금옥은 탕 이름도 보편화된 추어탕이란 표기 대신, 미꾸라지 ‘추’(鰍)자 하나만 쓰는 ‘추탕’이란 전통적 표기법을 고집한다. 추탕과 추어탕을 구분한 것은 ‘족’(足)과 ‘족발’의 차이를 따지는 것만큼 의미 없는 일이라고 두 집 모두 생각한다.
서울식 추탕의 기원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다. 한양 내 각설이 조직인 ‘꼭지’들이 집단으로 만들어 먹었다는 ‘꼭지딴 해장국’에서 유래했다는 설, 가축 도살을 업으로 하는 계층(백정)의 음식이라는 설, 관노들의 음식이었다는 설 등이 있다. 각자 근거가 있는 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면서 나중에는 양반가에서도 즐기는 추탕의 형태가 갖추어진 것으로 보는 것이 사실에 가까울 것 같다.
다동 주인 신동민씨와 통인동 주인 한정자씨가 추탕을 끓이는 모습이다.
#음식이란 원래 사람에 따라 호오가 갈릴 수 있는지라, 용금옥의 추탕 맛에 대한 평가도 입맛따라 다를 것이다. 오랜 단골 중에서도 어떤 이는 다동, 어떤 이는 통인동으로 발길이 갈린다. 그러나 두 집이 모두 한입으로 말하는 것은 대략 다음과 같다.
“분가할 때 서로에 대한 원망이 왜 없었겠는가? 그러나 지금은 서로가 각자의 자리에서 다 잘됐으면 하는 마음이다. 아버지 형제들이 모두 돌아가신 뒤로는 서로 왕래마저 끊어졌지만 용금옥의 전통을 이어간다는 정신만큼은 똑같을 거라고 보기 때문이다.”
다동 용금옥은 주방 위에 ‘큰집’임을 알리는 한글 두 자가 손님을 맞이하고, 통인동의 용금옥 간판은 명필로도 유명한 신영복 선생의 글씨다.
맛에 대해서는 어떨까? “둘 다 각자의 개성을 가지고 용금옥의 전통을 잇고 있으니, 나머진 손님의 선택이 아니겠는가?”
같은 생각의 두 집 모두 장사는 점심이 중심이다. 100~150그릇이면 평균 매상은 했다고 친다. 다음 대로 가업을 이어간다는 생각에도 차이가 없다. 다동 주인 신동민씨는 “조카 중에 하나가 싹수가 있는 것 같아 가게 일을 가르쳐볼 생각”이라고 했고, 통인동은 이미 딸 신정림씨가 어머니를 돕고 있다. “하면 할수록 더욱 책임감이 커진다”는 신씨의 말에 가업 승계에 대한 의지가 강하게 묻어 있다.
#용금(湧金)은 ‘금이 솟아난다’는 뜻이니, 용금옥은 ‘황금이 샘솟듯이 돈을 많이 벌어라’는 덕담이 담긴 옥호이다. 수주 변영로가 지었다는 설이 있으나, 이름 없던 개업 초기에 이름 모를 나그네가 추탕이 너무 맛있다며 지어준 이름을, 활 잘 쏘는 한량이던 주인 신석숭이 무릎을 치고 받은 것이란 게 정설인 듯하다. 용금은 중국 항저우의 유명한 호수 서호에 유래가 있다. 서호의 물을 끌어들여 만든 연못이 ‘용금지(池)’인데, 연못 밑바닥에서 황금소가 나왔다는 ‘금우출수’(金牛出水)의 전설이 깃든 곳이다. 미꾸라지도 논이나 개천 밑바닥에서 솟아나는 것이니 추어탕집으로는 다시없는 이름이다.
86살의 용금옥은 이제 ‘불과’ 14년이면 백살이다. 두 집 모두 “돈보다 용금옥이다. 100주년을 꼭 직접 보고 싶다”고 말한다. “금이 샘솟듯 하라”는 최초의 덕담대로 두 집 모두 번창해 백 살이 되는 어느 화창한 날 오랜 단골들과 더불어 함께 자축의 연을 베풀 수 있기를.
글 이인우 선임기자 iwlee21@hani.co.kr
사진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