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규성의 LP 이야기

서울 동경하던 강릉 소년, 45년째 LP 수집 ‘덕후’의 길

연재를 시작하며

등록 : 2018-03-15 14:48 수정 : 2018-03-15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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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부터 TV 보며 상경 꿈꿔

71년 첫 상경해 대연각 화재 목격

초등 졸업 무렵 음반 수집의 길로

다음 회에 서울 노래 보따리 풀어

한국 대중음악 중 서울을 배경으로 한 노래가 1천 곡 이상 작곡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만큼 서울은 대중음악의 친숙한 소재였다. 사진은 서울 노래가 수록된 1960~90년대에 나온 엘피(LP) 모음. 대중음악평론가이자 LP수집가인 최규성씨가 모은 것이다.

아날로그 LP 시절, 한국인을 위로하며 한국인의 기쁨과 슬픔을 노래한 대중가요 이야기를 앞으로 격주로 풀어가려 한다. 첫 번째 주제는 <서울&>의 매체 정체성에 걸맞게 ‘서울을 노래한 대중가요’로 정했다. 본격적인 서울 노래 이야기보따리를 풀기 전에 지방에서 태어나 서울로 이사 왔던 필자의 어린 시절 이야기부터 시작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 같다.


지방 사람들의 로망 서울

필자는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나 성장한 지방 사람이다. 운 좋게도 취학 전에 강릉 한국방송공사(KBS) 어린이 합창단원이 되어, 보릿고개가 엄혹했던 1960년대 중반부터 금성 진공관 라디오를 끼고 살며 드라마의 매력에 푹 빠져 살았다. 일찍부터 대중문화를 향유하는 ‘특권’을 누렸던 당시를 생각하면 꽤나 행운아란 생각이 든다. 1968년 강릉에 처음으로 KBS가 개국했을 때, 우리 집은 몇백 대에 불과했던 강릉의 텔레비전 수상기 보유가정이었다. 그때 밤색 가구로 꾸며진 멋들어진 일제 소니 티브이는 친구들이 부러워했던 우리 집 자랑 1호였다.

티브이 수상기는 이전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세상의 다양한 모습을 체험시키는 마술 상자 같았다. 티브이를 통해 처음 바라본 서울은 초등학교에 갓 입학한 아이에겐 환상이었다. 고층 건물이라곤 3층짜리 건물이 전부였던 강릉과 달리, 목이 뒤로 넘어가도록 올려다봐야 할 만큼 하늘로 치솟은 고층 빌딩들이 즐비했던 서울의 모습은 어린 가슴을 벌렁거리게 했다. 강릉에서는 본 적 없는 ‘허공에 달린 도로’(육교)와 ‘대낮처럼 밝은 지하세계’(지하도)는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텔레비전을 통해 자연스럽게 생겨난 서울에 대한 로망 때문에 서울에서 누가 내려왔다고 하면 만사 제쳐놓고 구경을 갔던 촌스러운 기억이 웃음을 머금게 한다.

불발로 끝난 첫 상경 기회

오매불망 그리던 서울 방문 기회가 찾아왔다. 서울에서 버스 사업을 준비했던 아버지가 함께 서울에 가자고 했다. 버스나 기차가 아닌 비행기를 타고 서울에 간다는 생각에 잠이 오질 않았다. 하지만 서울로 가는 당일, 동네 친구들과 노는 데 정신이 팔려 사고를 쳤다. 철부지 아들 때문에 서울행 비행기를 타지 못한 아버지는 머리끝까지 화가 나셨다. 그때 죽도록 혼이 났던 기억은 지금도 선명하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1969년 12월11일 낮 12시25분 승객 47명과 승무원 4명 등 총 51명을 태우고 강릉을 떠나 서울로 향하던 대한항공 YS-11기가 이륙 11분 만에 납치되어 북한으로 끌려가는 초유의 항공기 납치사건이 터졌다. 아버지와 내가 서울로 가려고 타려 했던 항공기다. 철부지 아들의 어처구니없는 사고 덕에 더 큰 사고를 피한 아버지는 안도하셨지만, 첫 상경의 꿈이 깨진 나의 슬픔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별천지 같았던 서울

2년 뒤인 초등학교 4학년 겨울방학을 맞은 1971년 12월25일에 드디어 서울에 입성했다. 서울에 다녀온 친구들과 어른들께 귀동냥으로 듣고 상상만 했던 서울의 모습은 역시나 별천지였다. 먼저 그 시절 지방에서는 공영방송 KBS만 시청할 수 있어 <뽀빠이>가 전부였던 강릉과는 달리, 서울은 민영방송인 MBC와 TBC에서 <황금박쥐> <요괴인간> <서부소년 차돌이> 등 비교 불가 수준의 재미난 만화영화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황홀했다. 아버지와 함께 스카라극장 옆 진고개 식당을 가려고 탄 버스에서 촌스럽게 멀미로 고생하던 중에 대연각호텔 화재 사건 현장을 직접 보았다.

대연각호텔 화재 사건에 연루된 가수들

당시 세상을 발칵 뒤집어놓았던 대연각호텔 화재 사건으로 사망하거나 피해를 본 대중가수들이 있다. 1970년 제1회 동경국제가요제에서 한국 가수 최초로 상을 받은 정훈희는 당시 대연각호텔 스카이라운지에 고정출연하고 있었다. 국제적인 가수로 위상이 높아진 그녀는 자신의 백밴드가 사용할 고가의 악기와 앰프를 새로 장만했지만, 화제로 모든 장비를 잃었다. 그때의 충격으로 정훈희는 활동을 중단했다.

아버지의 사업 때문에 온 가족이 서울로 이사 온 1972년 초여름, 겨우내 칩거했던 정훈희가 야심하게 발표한 컴백곡 ‘빗속의 연인들’이 매일같이 라디오와 티브이에서 흘러나올 만큼 히트를 기록했다. 그런데 그해 서울은 기록적인 폭우로 도시 저지대가 거의 물에 잠기는 대홍수가 났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듯 날마다 쏟아지는 비 때문에 고통받던 사람들은, 라디오에서 쉼 없이 흘러나오는 ‘비가 오는데에에에, 비가 오는데’ 하고 반복되는 노랫말에 그만 폭발해 방송사로 항의 전화를 해대었고, 각 방송사는 항의 전화벨 소리가 한동안 요란히 울렸다 한다. 그 바람에 대중가요 사상 최초로 ‘빗속의 연인들’은 ‘눈속의 연인들’로 제목과 가사를 수정하는 해프닝까지 생겼다.

대연각호텔 화재로 사망한 ‘젊은 연인들’의 작곡가, 민병무

대연각 화재 사건으로 희생된 가수들도 있다. 1977년 제1회 MBC 대학가요제 동상 수상곡인 ‘서울대 트리오’의 ‘젊은 연인들’도 사연 많은 노래다. 이 노래의 작사가는 방희준이고 작곡가는 민병무다. 서울대 공대 출신인 작곡가 민병무는 같은 팀 멤버 민병호의 친형이다. 원래 ‘젊은 연인들’은 노래를 만든 포크 듀오 ‘훅스’가 가장 먼저 대학가에서 불렀다. 대연각호텔에 불이 났을 때, 방희준의 생일잔치를 하느라 함께 숙박했던 민병무가 사망했다. 몇 년이 지난 1976년 남성 듀엣 ‘아도니스’(호와 섭)가 ‘다정한 연인들’로 제목을 수정해 음반을 처음 냈지만 별 반응을 얻지 못했다. 이에 민병호는 고교 동창인 서울대 농대생 민경식과 미대생 정연태와 함께 ‘서울대 트리오’를 결성해 형의 유작을 들고 대학가요제에 출전했던 것. ‘젊은 연인들’은 대학가요제 수상 이후 노래에 얽힌 애틋한 사연이 알려지며 큰 화제를 모았다.

음반 수집 ‘덕후’의 길

초등학교 졸업을 앞둔 1973년 12월 어느 날, 동네 친구 형이 틀어놓은 전축 위에서 빙빙 돌아가는 동그란 검은 물체에서 흘러나오는 영국의 하드록 밴드 ‘딥 퍼플’(DEEP PURPLE)의 ‘하이웨이 스타’(HIGHWAY STAR)를 들었다. 그때까지 즐겨 들었던 대중가요와는 사뭇 다른, 강렬하게 질주하는 그 노래를 듣고 온몸에 소름이 돋는 충격을 맛봤다.

이후 음반수집의 길로 접어들어 45년 동안, 음악 없이는 못 사는 제법 유명한 ‘덕후’ 음반수집가가 되었다. 그때 서울은 사대문 안에 사는지, 밖에 사는지로 빈부차를 구분한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나는 비록 사대문 밖인 영등포구 상도동(이후 관악구를 거쳐 동작구로 지명 변경)에 살았지만 동네마다 레코드 가게가 넘쳐났다. 가게에 진열된 다양한 음반을 보려고 매일같이 상도동에서 노량진까지, 줄지어 있던 레코드 가게를 순례하기 시작했다. 다음 편에는 서울의 구체적 지명을 노래한 대중가요 노래비들을 찾아 떠나보겠다.

글·사진 최규성 대중문화평론가ㅣ한국대중가요연구소 대표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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