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우의 서울 백년가게

빽빽한 서적과 음반, 한국의 ‘벨 에포크’ 꿈꾸는 공간

고서점·음반가게 ‘클림트’ since1996

등록 : 2018-03-15 15:49

크게 작게

클래식 LP 가게로 이름 얻은 뒤

평생 모은 문사철·예술 서적 수만 권

10평 남짓 공간에 천장까지 가득 진열

고서·음반 동시 판매 가게로 거의 유일

서른 살 무렵 독일의 중고 LP 가게

문화예술 해박한 지식 자랑하는 쥔장

만나 언젠가 이런 가게 운영 꿈꿔

유럽 예술 황금기 벨 에포크 시대 좋아해


‘클림트’는 2011년부터 음반과 고서를 함께 팔았다. 주인 김세환씨는 지난 40여 년 동안 수만 장의 음반을 거래하고, 4만여 권의 책을 모았다. 명동 문화지킴이를 자임하는 그는 “판 팔아 책 살 돈만 되면 이 일을 계속할 것”이라고 한다.

지난해 초겨울 무렵 어떤 이유로 한 사람의 서재가 소멸되었던 것 같다. 트럭째 책들이 고물상에 실려와 파지가 되기 위해 물세례를 받기 직전, 한 눈썰미 있는 ‘나카마’(중간상인)가 극적으로 구조했다. 죽음을 면한 책들은 트럭에 되실려 청계천 헌책방거리의 한 서점에 도착했다. 책 꾸러미를 살펴본 서점 주인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김 사장, 시간 되면 한번 들르시오.” 다시 ‘김 사장’이 추린 일어 원서들은 상자 10개에 담겨 청계천을 떠나 명동지하상가의 10평 남짓한 김 사장의 고서점으로 옮겨졌다. 생환한 책들이 분류를 거쳐 서가에 꽂힌 첫날, 일본 민속학자 야나기다 구니오(1875~1962)의 37권(부록 1권 포함)짜리 전집이 곧바로 새 주인을 만났다. 책을 손에 넣은 서치(書癡·책벌레)가 기쁨에 겨워 외쳤다. “야나기다의 하드커버 전집을 통째로 얻다니! 대박이군!” 얼마 뒤, 함께 생환했던 책 가운데 근대 일본 사상가 고바야시 히데오의 <모토오리 노리나가>가 뒤따라 서점을 떠났다.

오늘도 숱한 양서들이 파지가 되는 치욕을 겪으며 사라져가겠지만, 변변한 간판조차 달지 않은 지하상가의 헌책방에는 강물이 흐르듯 책이 흐르고 있다. 소멸의 운명에 처한 각종 서물(書物)들이 흘러들어와 자신을 편애하는 ‘광’(狂)과 ‘벽’(癖)을 만나 재생을 얻는 곳. 명동 회현지하쇼핑센터 다-19-20 소재의 고서점 ‘클림트’도 그런 부활의 성소 가운데 하나다.

통로까지 책이 쌓여 간판조차 눈에 잘 띄지 않는 클림트. 마니아들에겐 보물창고 같은 곳이다.

#충무로 신세계백화점 쪽이나 명동 서울중앙우체국 앞에서 지하로 내려서면 회현지하쇼핑센터다. 옛날 음반을 거래하는 엘피(LP) 전문점이 모여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중에 복도까지 책과 엘피·시디가 쌓여 있고, 유리문 위로 화가 클림트의 사인을 옥호치고는 무성의하다 싶을 정도로 간단하게 붙여놓은 가게를 발견할 수 있다. 총 10평 규모의 가게 안으로 들어서면 한 사람이 겨우 다닐 정도의 좁은 통로를 빼고 책들이 천장까지 쌓여 있다. 이곳이 1996년 문을 연 ‘세컨드 핸드’(중고품) 책·음반가게 클림트(대표 김세환)다.

클림트는 애초 엘피 전문점으로 유명했으나, 엄청난 책 수집광이기도 한 주인의 ‘꿈’을 좇아 2011년부터 문사철·예술 전문 고서점으로 진화했다. 국내외 인문사회과학, 철학, 예술 분야의 헌책들이 2만 권쯤 매장에 나와 있고, 2만 권 정도가 더 주인집 서고를 채우고 있다. 원서는 일어를 중심으로 독어, 불어, 영어책들이 주류를 이루고, 중국 책도 3천여 권 정도 있다. 자기계발서나 경제경영서, 교양 잡서류 따위는 물론이고, 값비싼 희구서나 희귀본류도 팔지 않는다. 내부를 흐르는 분위기는 전형적인 아날로그의 시간이다. 가게에는 늘 클래식 음악이나 재즈가 흐르고 은색 장발의 중년 사내가 앉아 있는 안쪽 모서리 테이블에는 캔맥주가 떠나지 않는다.

1996년 문을 열었으니 음반가게로는 22년, 고서점 겸영으로는 불과 7년밖에 안 되는 짧은 역사지만, 클림트는 아주 특별한 존재다. 유럽이나 일본과 달리 문화 토양이 척박한 우리나라에서 이만한 깊이와 넓이로 고서와 음반이 함께 수집되고 거래되는 책방은 어쩌면 거의 유일할지 모른다. 이런 희소성과 문화적 가치를 소중히 여긴다면, 음반·고서점 클림트가 백 년을 향해 쌓아갈 역사는 지금부터가 시작이다.

#취재 도중 만난 나이 든 손님이 말했다. “나는 그를 진심으로 ‘쓰부’(사부)라 부르지. 평생 음악과 책을 좋아해 숱한 책방과 음반점을 돌아다녔지만, 김세환만 한 내공을 보지 못했어.”

클림트 주인 김세환(57)은 40년 경력의 ‘오타쿠’다. 충남 금산의 부유한 인삼 상인의 아들인 그는 대입재수 시절 진학 대신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과 더불어 살기로 한다. 그가 제도교육의 ‘혜택’을 미련 없이 버리고 황학동 레코드가게 점원이 된 이야기는 지난 13회 ‘돌레코드’ 편에서 소개한 바 있다.

엘피점으로 명성 높았던 클림트가 고서점이 된 사연은 이렇다. ‘음반계의 고수’ 김세환은 수장한 4만 권의 책이 포화 상태에 이르고, 우연인지 필연인지 엘피 수집도 한계에 부닥치면서 그동안 가슴속에서만 키워온 모험을 감행하기로 한다. “서른 살 무렵 음반 수입을 위해 처음 외국에 나가봤다. 정말 새로운 세계였다.” 그 황홀한 세계 중에서도 김세환에게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긴 것은 독일의 중고 음반점이었다. “퀄리티 있는 가게들은 대부분 고서류를 함께 팔았다. 종사자들도 대부분 머리 희끗한 중년 남자 아니면 노인들이었는데, 음악과 책에 관한 그들의 지식은 경악스러울 정도였다. 강렬한 동경이 싹텄다.”

클림트는 본래 엘피(LP)가게로 유명했다.

그 문화 충격이 김세환을 책의 세계로 인도했다. “한 1만 권쯤 쌓이자 비로소 책읽기를 넘어 책 그 자체의 디테일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책을 둘러싼 맥락들이 궁금해지자, 책의 역사라고 할 서지학과 문헌학 쪽으로 관심이 옮아갔다.” 음반을 모으고 흩는 데 고수인 그에게 4만 권쯤 책이 모였다면 그것을 흩뜨리는 쪽으로도 마음이 움직이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이행이었다. 고서점 클림트의 탄생이었다.

 

#2018년의 클림트는 그렇게 젊은 날의 김세환에게 문화 충격을 안겼던 백 년쯤 된 독일의 어느 음반 고서점을 닮아가고 있다. 오늘도 클림트의 좁은 통로에는 책과 음악을 사랑하는 ‘광’과 ‘치’들의 그림자가 석고처럼 드리워 있다. 대개 그들은 자신만의 ‘초월하는 시공’을 가지고 있기 일쑤다. 클림트는 그들을 태운 타임머신이다.

책은 어떻게 수집하나?

“청계천 헌책방들을 돌기도 하지만 그쪽에서 연락이 오기도 한다. 내 취향을 아니까. 그렇게 연락이 오면 그 사람들 수고를 봐서 구해온 책의 3분의 1쯤을 사준다. 단, 한권 한권 꼼꼼하게 살펴서 고른다. 그래야 그들도 나를 존중하고 내게 맞는 책을 구하려고 애쓰게 된다. 그게 비법이라면 비법이다.”

나름의 수집 체계가 있는가?

“나는 자유롭게 읽고 내 마음에 드는 책을 산다. 체계적인 전문교육이 부족한 내 열등감의 소산이겠지만, 대신 어떤 카테고리에도 갇히지 않는 지적 야생성이 책을 보는 감을 만든다.”

책값은 어떻게 정하나?

“정가에서 30~40% 정도 내린 범위에서 결정한다. 기준은 한마디로 내 맘이다. 지금까지 내 가격을 불평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엘피와 책을 병행하면서 달라진 점은?

“글쎄… 분명한 것은 찾아오는 손님이 늘었고, 내 주량도 늘었다는 것. 음악·책, 이런 거 좋아하는 사람들 대개 술도 좋아한다. 하물며 동시다발이니, 하하. 책 장사를 해보니 책의 세계가 음악보다 더 무궁무진하다. 이야기꽃을 피우면 끝이 없다. 남자들의 수다가 얼마나 센지 모를 거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분야나 작가는?

“경계인, 소외인, 디아스포라(이산자) 의식의 지식인, 저작을 좋아한다. 시대적으로는 ‘벨 에포크’(19세기 말~1차대전 전의 유럽의 문예 황금기) 시대의 문화와 예술을 좋아한다. 화가 클림트를 옥호로 삼은 것도 그 시대에 대한 개인적인 찬미다.”

요즘 즐겨 듣는 음악, 읽고 있는 책을 소개한다면?

“늘 그렇지만 여태껏 안 들어본 곡을 좋아한다. 베토벤 ‘심포니’가 곡은 하나지만, 얼마나 많은 지휘자, 오케스트라, 연주회, 녹음 회사, 녹음 시기가 있는가? 하나만 달라도 다른 곡이고 새로운 연주다. 책은 김화영 교수의 에세이를 읽다가 꽂혀서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기 시작했다. 7권짜리인데 어쩌나 싶다.”

한참 높은 연배에게서 ‘사부’ 소리를 듣는다. 고수가 될 수 있었던 비결이 있다면?

“비결이랄 게 없지만, 늘 열등감에 시달린 것. 일찍이 혼자 놀기의 즐거움을 안 것.”

그는 독신이다. 나이 50에 뒤늦게 시작한 결혼 생활이 1년 남짓 만에 끝났다. “결혼은 책이나 음악과 달랐다. 그러나 후회는 없다. 모험을 했는데, 단지 결과가 안 좋았을 뿐이니.” 그런 그에게 이미 오래된 질문이 되어버린 종이책의 미래를 물었다.

“나는 확신한다. 어느 인터뷰 기사에선가 움베르토 에코가 서재 높은 곳에서 <장미의 이름> 종이책과 전자책을 떨어뜨려 비교하는 걸로 답을 대신한 걸 본 적이 있다. 저장 장치는 그때보다 더 발전했지만 불멸하는 것은 오히려 종이책이란 뜻일 것이다. 종이책을 좋아하는 사람 역시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엘피의 부활이 증거 아닌가? 나는 판 팔아서 책 살 돈만 되면 이 길을 계속 갈 거다. 결국 책이 말해줄 것이다.”

지하상가 생활이 22년째인데, 건강에 나쁠 것 같다. 클림트가 지하에서 나올 계획은 없나?

“네버. 명동은 타락했지만 내겐 고향 같은 곳이다. 원래의 문화와 예술이 숨 쉬던 거리를 지하에서나마 지키고 있고 싶다. 임대료도 견딜 만하고, 공기도 사실 그리 나쁘지 않다. 나라는 무명의 존재가 나름대로 세상에 기여하는 방식이다.”

명동 한복판 지하 음반·고서점 클림트, 빼곡한 책 사이로 등 하나가 길을 밝히고 있다. 펜·수채화 김경래 기자 kkim@hani.co.kr

글 이인우 선임기자 iwlee21@hani.co.kr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