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 여성들, 우리 술 ‘수작 부리기’에 빠지다

맛·감성 사로잡는 서울 속 전통주 체험 공간…전통주 갤러리·막걸리학교 젊은이들로 북적

등록 : 2018-03-29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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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3일 금요일 저녁, 서울 남산 막걸리학교 ‘금요시음회’를 찾은 손님들이 허시명 교장과 함께 전국 양조장에서 올라온 전통주를 시음하고 있다.

‘수작 부리다’는 말은 원래 술에서 기원했다. 술 따를 수(酬)에 술 받을 작(酌)을 써서, 술잔을 주고받으며 이야기 나눔을 뜻한다. 한동안 ‘혼술’이 유행이더니, 서울은 지금 ‘우리 술’ 찾아 수작을 부리는 젊은이들이 생겨나는 중이다.

나만의 운치를 찾아서 ‘전통주 갤러리’

전통주 갤러리

강남구 한복판에는 도시 속 우물 같은 ‘전통주 갤러리’가 있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낮부터 목 축이러 온 손님들이 입맛을 다신다.

전통주 갤러리는 농림축산식품부와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가 전통주의 맛과 멋을 알리고자 설립했다. 양조장과 소비자를 바로 이어주는 풍류 공간이다. ‘농림축산식품부 지정 대한민국 식품 명인주’ ‘대한민국 우리술 품평회 수상작’ 등 국내 유명 술 경연대회에서 상을 받고, 서울에서 맛보기 힘든 전국 전통주를 한자리에 모았다.

전통주 갤러리 ‘우리술 시음회’


다달이 주제를 바꿔 하루 세 번씩 예약제로 하는 시음회가 인기다. 지난해부터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타고 슬슬 번지더니, 올해는 2030 세대가 5060 세대를 누르고 주요 방문객층 자리를 꿰찼다.

“지금은 손님들 중 약 60%가 20~30대 청년들인데, 그중에서도 여성들이 많지요.” 시음회를 담당하는 하영 전통주 소믈리에가 시음주 한잔을 권하며 말했다. 4월부터 상에 올릴 ‘황진이’다. 농익은 오미자 맛이 입안 가득 퍼졌다가 아득히 사라진다. 맛있다! 더구나 ‘무료’다.

전통주 갤러리 이현주 관장은 “새로운 트렌드로 자리잡아가는 단계”라며 “전에는 밤새워 ‘부어라 마셔라’ 하는 술 문화가 있었다면, 이제는 술 한잔하더라도 운치 있게 즐기고 싶어 한다. 전통주만의 그윽한 꽃 향, 맛, 이야기가 늘 새로움을 좇는 젊은층에 잘 맞았다”고 했다.

금요일 밤 어른들 교실 ‘막걸리학교’

막걸리학교

남산 자락 골목에 있는 ‘막걸리학교’는 술을 빚고자 찾아오는 학생들이 해를 거듭해 이어져 올해로 37기를 맞이했다. 지난 금요일 오후 7시, ‘허시명의 100대 명주를 찾아서’ 첫 시음회에 온 한종진(29·사진가)씨도 집 안에 ‘막걸리를 키우느라’ 방 하나를 내줬다. 한씨는 “좋은 막걸리를 만드는 막걸릿집을 운영해보는 게 꿈”이라 고백한다.

막걸리학교가 금요일 저녁마다 여는 ‘금요시음회’를 찾는 손님들은 젊은층을 중심으로 60대까지 폭이 넓은데, 직업도 회사원, 공무원, 예술가, 창업 준비생 등 다양하다. ‘백련막걸리, 입장탁주, 풍정사계 춘, 고소리 술’ 등 지난해까지 상복 가득했던 술이 시음잔을 채워갔다.

“‘송명섭 막걸리’는 슴슴하고 담백해, 고집 있는 사장님이 만드는 평양냉면 같다.” “허브 막걸리는 지중해 섬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이 생각난다.” “같은 안동소주지만 이쪽이 ‘나쁜 남자’라면 저쪽은 ‘결혼하고 싶은 남자’ 아니겠는가.” 품평 따라 술 몇 병쯤이야 금방 동난다.

전통주 명인 송명섭씨.

막걸리학교 ‘금요시음회’에선 운이 좋으면 명인을 직접 만나는 호사도 누릴 수 있다. ‘죽력고’와 ‘송명섭 막걸리’로 유명한 태인합동주조장 송명섭 명인(전통술 담그기 무형문화재6-3호, 식품명인 48호)이, 그 귀하다는 막걸리 ‘원주’를 직접 들고 서울로 올라오기도 했다.

명인들이 인생을 걸어 빚는 ‘작품’을 알아주고, 인생의 추억으로 삼는 이들이 있으니, 늘 반갑다. 막걸리학교 허시명 교장은 “시음회가 추구하는 건 새로움을 이해해가는 것”이라며 “귀하게 알고 마신다면, 이 땅에서 나는 술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가치도 올라선다. 직접 생산자가 되고 싶어 한다. 사람 사는 ‘다양성’에 기여하는 술이 막걸리”라며 잔을 들었다.

스스로 만들고 나누는 재미, 전통주

한국 농림축산식품부가 지난 2월 소셜 웹 빅데이터와 온·오프라인 판매 데이터를 통해 최근 2년간 주요 소비 트렌드를 발표한 결과, 2017년 7월 전통주 온라인 판매 허용 이후 20~30대층에서 전통주 소비가 늘어난 가운데 여성 비중이 30대(40.0%)와 20대(9.7%)로, 절반에 이르렀다. 막걸리학교에서 만난 박아무개(35·회사원)씨 역시 전통주를 ‘탐닉하는’ 여성으로 “아이티(IT) 계열에서 일해 사무실에 있는 경우가 많은데, 내 손으로 술을 빚는 것도 재밌고, 지인들과 나누는 재미가 가장 크다”고 말하기도 했다.

청년들이 전통주에 관심을 가지자 현장에선 종종 새로운 아이디어가 튀어나오고, 그대로 상품에 반영되기도 한다. 전통주 갤러리 이현주 관장은 “조선 3대 명주로 꼽히는 ‘감홍로’를 먹어보더니, 다음에 와선 ‘아이스크림에 뿌려 아포가토처럼 먹으니 맛있다’고 제안하더라. 청년들이 ‘내가 참여해 즐길 수 있는 문화’로 전통주 문화를 받아들이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막걸리학교 허시명 교장은 “도시농부 개념과 같은 것 아니겠나. 직장생활이 대부분인 서울 사람들은 자연에 대한 동경을 품고 몸을 쓰는 재미를 찾게 된다. 아파트는 1년 내내 온도 관리가 쉬워 막걸리 빚기도 편하다는 장점이 있다”고 설명했다.

허 교장은 “일제강점기와 현대를 거쳐 전통주 맥이 뚝 끊겼다가 90년 군사정권이 끝나고서야 가양주(집에서 빚은 술) 빚는 전통이 다시 이어졌다. 우리 전통주는 28년 남짓 된 청년 시기에 있다”며 “앞으로도 개성 있는 전통주가 현대인의 생활 다변화에 영향을 줄 것”이라고 평했다.

글·사진 전현주 객원기자 fingerwhale@gmail.com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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