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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서울 노래는 북촌 중심으로
한강 소재는 격동의 한국사 증언
70~80년대는 명동, 종로, 광화문
박춘석 22곡으로 가장 많이 작곡
서울 지명 노래가 수록된 LP들. 지금까지 나온 서울 소재 노래는 1500곡이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서울 노래들은 시대별 풍경과 시민들의 삶을 진솔하게 담아냈다. 1908년 최남선의 창가 ‘경부철도가’로 시작된 서울 노래는 1926년 윤심덕의 ‘자라메라’, 1934년 채규엽의 ‘서울 노래’와 박부용의 ‘노들강변’, 강흥식의 ‘유쾌한 시골영감’으로 본격화되며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무수한 명곡이 대중의 사랑을 받아왔다.
지금의 서울은 한강을 중심으로 강남과 강북으로 분리되지만, 일제강점기에는 청계천을 경계로 북촌과 남촌으로 구분되었다. 북촌은 종로를 중심으로 한 조선인 거주 지역이고, 남촌은 충무로(당시 본정)와 명동(당시 명치정)을 중심으로 한 일본인 거주 지역이었다. 이에 일제강점기의 서울 노래는 조선인들의 삶의 터전이었던 북촌이 중심을 이뤘다.
1930년 발표된 김옥엽, 이진풍의 ‘한강물’ 이후 지금까지 서울 노래의 핵심 지역인 한강은 격변의 근현대사를 고스란히 증언한다. 1950년대의 한강은 현인의 ‘전우여 잘자라’처럼 전쟁의 격전지로, 국가 재건의 기운이 드셌던 60년대에는 ‘한강수에 배 띄어라’라는 황금심의 노래처럼 서울 시민들의 유원지로서 거듭났다. 1979년 혜은이의 ‘제3한강교’는 눈부시게 발전이 진행된 한강의 모습을 증언한다. 서울을 구분했던 강이 도심의 청계천에서 한강으로 이전되었음은 서울 인구의 양적 팽창을 말해준다.
해방의 감격을 표현한 서울 노래로는 현인의 ‘럭키서울’, 장세정의 ‘울어라 은방울’이 대표적이다. 1942년 발표된 진방남의 ‘꽃마차’는 발표 당시엔 가사에 등장한 지명이 중국의 ‘하르빈’이었지만 해방 후에 서울로 바뀐 특별한 노래이다. 해방되면서 서울 노래는 현인의 ‘서울야곡’처럼 일본인들이 사라진 남촌의 명동, 충무로로 옮겨가는 전이 현상이 포착된다. 또한 소공동, 남대문, 광화문, 세종로, 삼각산, 을지로, 마포 그리고 미아리고개와 우이동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확대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지역을 거점으로 서울 시내 곳곳에는 각종 극장과 라이브클럽 그리고 음악다방이 생겨나면서 대중음악의 중심지가 되었다. 60년대의 대표적인 서울 노래들인 이시스터즈의 ‘서울의 아가씨’, 은방울자매의 ‘요지경 서울’, 남진의 ‘서울 플레이보이’, 차은희의 ‘서울의 전차 차장’, 김상희의 ‘서울의 버스 여차장’, 유주용의 ‘서울 여대생’ 등 서울의 인물들을 밝고 해학적으로 묘사한 특징을 보인다. 당시 지방민들은 가난한 시골을 탈출해 성공을 꿈꾸며 무조건 서울로 향하는 이촌향도의 경향이 강력했다. 서울 사대문 안에 터전을 잡기 힘들었던 지방민들의 거주지였던 청계천이나 삼선교, 삼각지, 아현동, 용산, 노량진, 영등포, 마포 그리고 멀리 서울 외곽의 불광동이나 우이동, 도봉산까지 서울 노래에 등장하는 지명은 확대되었다. 1970년대 들어 청년 세대의 통기타 소리가 요란했던 명동은 서울 노래의 중심이었다. 군사정권의 통제와 억압에 저항하며 서울 시민의 빈부 차이를 노래했던 양병집의 ‘서울 하늘’, 서유석의 ‘파란 많은 세상’ 등 포크송은 금지의 멍에를 짊어지기도 했다. 분식집과 입시학원들이 넘쳐났던 70~80년대 종로와 광화문은 청소년들의 아지트였다. 당시의 분식집에는 ‘디제이(DJ) 박스’가 있었는데, 전인권도 그 시절 광화문의 한 분식집에서 디제이로 활동했다. 1972년 청년 세대의 감성을 대변했던 이장희의 ‘그건 너’, 1987년 이문세의 ‘광화문 연가’ 같은 새로운 감성의 서울 노래가 젊은 세대의 사랑을 받았다. 또한 80년대에 시위가 빈번했던 대학로를 주제로 한 ‘동숭로에서’도 새롭게 등장한 서울 노래였다. 90년대는 강남 지역이 주목받으면서 압구정동을 중심으로 하는 신세대 문화가 화두로 떠올랐다. 서울 노래도 주현미의 ‘신사동 그 사람’ ‘영동 부르스’, 유영석의 ‘압구정동’, 신성우의 ‘rock'n roll+압구정동 공주병’ 김지애의 ‘밤 깊은 서초동’ ‘방배동의 밤’ 등 강남의 유흥가를 소재로 한 노래가 대거 등장했다.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김흥국의 ‘59년 왕십리’, 한동준의 ‘내 고향 삼선교’, 동물원의 ‘혜화동’, 오월의 ‘종로에서’ 등 훈훈한 인간미를 그리워하는 강북 노래들도 부활했다. 90년대 중반 이후에는 핫 플레이스로 급부상한 인디음악 신(무대)이 형성된 홍대 인근이 서울 노래로 사랑받기 시작했다. 2010년 조사에서 서울 노래는 1940년대까지 70곡, 1950년대 58곡, 1960년대 151곡, 1970년대 101곡, 1980년대 202곡, 1990년대 209곡, 2000년대 206곡 등 총 1142곡이 확인되었다. 또한 1930년대 44명, 1940년대 6명, 1950년대 30명, 1960년대 109명, 1980년대 152명, 1990년대 172명, 2000년대 186명 등 800명에 가까운 가수들이 서울을 노래했다. 제목에서는 가장 많은 544곡이 ‘서울’을 넣었고, 명동 85곡, 한강 70곡, 서울역 55곡, 남산 40곡, 종로 39곡, 청계천과 여의도 24곡, 이태원 21곡, 영등포 17곡의 순이었다. 서울 노래를 가장 많이 부른 가수는 14곡의 나훈아와 이미자가 공동 1위, 오기택 13곡, 설운도 12곡, 도미와 윤일로 11곡, 은방울자매와 주현미가 10곡으로 뒤를 이었다. 서울 노래를 가장 많이 작사한 작사가는 반야월이 31곡으로 가장 많으며, 이철수 23곡, 김병걸 18곡, 손로원과 장경수 17곡 등 순이다. 서울 노래를 가장 많이 작곡한 작곡가는 22곡을 지은 박춘석이다. 서울 지명이 가장 많은 곡은 1984년 설운도의 ‘나침반’으로 종로, 명동, 청량리, 을지로, 미아리, 영등포 등 모두 6곳이 등장한다. 2010년 청계천문화관의 ‘대중가요 서울을 노래하다’ 전시회 이후 서울 지명송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었다. 이에 유재석의 ‘압구정 날라리’, 유브이의 ‘이태원 프리덤’, 자이언티의 ‘양화대교’, 신현희와 김루트의 ‘홍대 블루스’ 등 서울 노래들이 급증해 현재 1500곡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2012년 지구촌을 강타했던 싸이의 ‘강남스타일’로 인해 서울 강남은 세계적인 명소로 떠올랐다. 이처럼 서울 노래들은 밝고 희망찬 찬가 형식을 띠거나 서울에서 부대끼며 살아가는 서민들의 애환과 시대별로 핫 플레이스로 떠오르는 지역의 특성을 녹여내며 다채롭게 발표되고 있다. 지명송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서울뿐 아니라 전국의 지명이 재킷에 표기된 가요 엘피(LP)의 가격이 폭등하고 있다. 글·사진 최규성 대중문화평론가ㅣ한국대중가요연구소 대표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해방의 감격을 표현한 서울 노래로는 현인의 ‘럭키서울’, 장세정의 ‘울어라 은방울’이 대표적이다. 1942년 발표된 진방남의 ‘꽃마차’는 발표 당시엔 가사에 등장한 지명이 중국의 ‘하르빈’이었지만 해방 후에 서울로 바뀐 특별한 노래이다. 해방되면서 서울 노래는 현인의 ‘서울야곡’처럼 일본인들이 사라진 남촌의 명동, 충무로로 옮겨가는 전이 현상이 포착된다. 또한 소공동, 남대문, 광화문, 세종로, 삼각산, 을지로, 마포 그리고 미아리고개와 우이동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확대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지역을 거점으로 서울 시내 곳곳에는 각종 극장과 라이브클럽 그리고 음악다방이 생겨나면서 대중음악의 중심지가 되었다. 60년대의 대표적인 서울 노래들인 이시스터즈의 ‘서울의 아가씨’, 은방울자매의 ‘요지경 서울’, 남진의 ‘서울 플레이보이’, 차은희의 ‘서울의 전차 차장’, 김상희의 ‘서울의 버스 여차장’, 유주용의 ‘서울 여대생’ 등 서울의 인물들을 밝고 해학적으로 묘사한 특징을 보인다. 당시 지방민들은 가난한 시골을 탈출해 성공을 꿈꾸며 무조건 서울로 향하는 이촌향도의 경향이 강력했다. 서울 사대문 안에 터전을 잡기 힘들었던 지방민들의 거주지였던 청계천이나 삼선교, 삼각지, 아현동, 용산, 노량진, 영등포, 마포 그리고 멀리 서울 외곽의 불광동이나 우이동, 도봉산까지 서울 노래에 등장하는 지명은 확대되었다. 1970년대 들어 청년 세대의 통기타 소리가 요란했던 명동은 서울 노래의 중심이었다. 군사정권의 통제와 억압에 저항하며 서울 시민의 빈부 차이를 노래했던 양병집의 ‘서울 하늘’, 서유석의 ‘파란 많은 세상’ 등 포크송은 금지의 멍에를 짊어지기도 했다. 분식집과 입시학원들이 넘쳐났던 70~80년대 종로와 광화문은 청소년들의 아지트였다. 당시의 분식집에는 ‘디제이(DJ) 박스’가 있었는데, 전인권도 그 시절 광화문의 한 분식집에서 디제이로 활동했다. 1972년 청년 세대의 감성을 대변했던 이장희의 ‘그건 너’, 1987년 이문세의 ‘광화문 연가’ 같은 새로운 감성의 서울 노래가 젊은 세대의 사랑을 받았다. 또한 80년대에 시위가 빈번했던 대학로를 주제로 한 ‘동숭로에서’도 새롭게 등장한 서울 노래였다. 90년대는 강남 지역이 주목받으면서 압구정동을 중심으로 하는 신세대 문화가 화두로 떠올랐다. 서울 노래도 주현미의 ‘신사동 그 사람’ ‘영동 부르스’, 유영석의 ‘압구정동’, 신성우의 ‘rock'n roll+압구정동 공주병’ 김지애의 ‘밤 깊은 서초동’ ‘방배동의 밤’ 등 강남의 유흥가를 소재로 한 노래가 대거 등장했다.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김흥국의 ‘59년 왕십리’, 한동준의 ‘내 고향 삼선교’, 동물원의 ‘혜화동’, 오월의 ‘종로에서’ 등 훈훈한 인간미를 그리워하는 강북 노래들도 부활했다. 90년대 중반 이후에는 핫 플레이스로 급부상한 인디음악 신(무대)이 형성된 홍대 인근이 서울 노래로 사랑받기 시작했다. 2010년 조사에서 서울 노래는 1940년대까지 70곡, 1950년대 58곡, 1960년대 151곡, 1970년대 101곡, 1980년대 202곡, 1990년대 209곡, 2000년대 206곡 등 총 1142곡이 확인되었다. 또한 1930년대 44명, 1940년대 6명, 1950년대 30명, 1960년대 109명, 1980년대 152명, 1990년대 172명, 2000년대 186명 등 800명에 가까운 가수들이 서울을 노래했다. 제목에서는 가장 많은 544곡이 ‘서울’을 넣었고, 명동 85곡, 한강 70곡, 서울역 55곡, 남산 40곡, 종로 39곡, 청계천과 여의도 24곡, 이태원 21곡, 영등포 17곡의 순이었다. 서울 노래를 가장 많이 부른 가수는 14곡의 나훈아와 이미자가 공동 1위, 오기택 13곡, 설운도 12곡, 도미와 윤일로 11곡, 은방울자매와 주현미가 10곡으로 뒤를 이었다. 서울 노래를 가장 많이 작사한 작사가는 반야월이 31곡으로 가장 많으며, 이철수 23곡, 김병걸 18곡, 손로원과 장경수 17곡 등 순이다. 서울 노래를 가장 많이 작곡한 작곡가는 22곡을 지은 박춘석이다. 서울 지명이 가장 많은 곡은 1984년 설운도의 ‘나침반’으로 종로, 명동, 청량리, 을지로, 미아리, 영등포 등 모두 6곳이 등장한다. 2010년 청계천문화관의 ‘대중가요 서울을 노래하다’ 전시회 이후 서울 지명송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었다. 이에 유재석의 ‘압구정 날라리’, 유브이의 ‘이태원 프리덤’, 자이언티의 ‘양화대교’, 신현희와 김루트의 ‘홍대 블루스’ 등 서울 노래들이 급증해 현재 1500곡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2012년 지구촌을 강타했던 싸이의 ‘강남스타일’로 인해 서울 강남은 세계적인 명소로 떠올랐다. 이처럼 서울 노래들은 밝고 희망찬 찬가 형식을 띠거나 서울에서 부대끼며 살아가는 서민들의 애환과 시대별로 핫 플레이스로 떠오르는 지역의 특성을 녹여내며 다채롭게 발표되고 있다. 지명송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서울뿐 아니라 전국의 지명이 재킷에 표기된 가요 엘피(LP)의 가격이 폭등하고 있다. 글·사진 최규성 대중문화평론가ㅣ한국대중가요연구소 대표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