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내리는 4·19민주묘지에서 시를 불러내다

전현주 기자의 ‘서울문학기행’ ‘문학의 집·서울’ 동행기

등록 : 2018-05-24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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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펜클럽 한국본부의

서울문학기행 매주 목요일

4·19민주묘지 시비 걷기 행사

문학의 집 시낭송도 매주 목요일

‘먼동이 트기 전에 가고만 사람들아 젊은 넋들아’ 강북구 수유동 ‘국립 4·19민주묘지’로 들어서면 묘역 좌우측으로 ‘수호예찬의 비’가 열 맞춰 서있다. 1960년 4·19혁명에서 죽은 이들을 위한 추모시가 빗물에 젖어 참배객들을 맞는다.

지난 17일 이른 아침, 강북구 수유동 국립 4·19민주묘지로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사방팔방 들이치는 늦봄의 빗줄기에 겉옷이 흠뻑 젖어버렸다. 아랑곳없이 툭툭 털며 앞으로 나아가는 40여 명의 사람은 국제펜클럽 한국본부를 통해 ‘서울문학기행’에 나선 시민들이었다.

함께 도시를 읽는 사람들 ‘서울문학기행’


“우리가 산다면 얼마나 살겠습니까. 궂은날 4·19민주묘지를 참배하는 의미가 있을 겁니다. 묘역 좌우측으로 ‘수호예찬의 비’가 있습니다. 함께 걷겠습니다.” 행렬을 이끄는 김경식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사무총장이 앞서갔다. 뒤따르는 무리는 각자 상념에 잠겼다.

국립 4·19민주묘지는 1960년 4·19혁명에 참가했던 희생자들을 위한 묘지다. 현재 315구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 4·19혁명 당시 사망자와 부상자 277명, 4·19혁명 유공건국포장 수상자 38명을 포함한 숫자다. 봄이면 꽃으로, 겨울이면 소복한 눈으로 동산을 이뤄 호젓한 경관을 이루지만, ‘수호예찬의 비’에 음각된 추모 시는 습한 과거의 기억을 그대로 불러낸다.

국립 4·19민주묘지 답사에 앞서 4·19혁명 희생자들에게 묵념을 올리는 참가자들

“분노는 폭풍, 폭풍이 휘몰아치던 그날을 나는 잊을 수 없다”로 시작하는 장만영의 <조가>부터 구상의 <진혼곡>, 박목월의 <죽어서 영원히 사는 분들을 위하여>, 조지훈의 <진혼가>, 김윤식의 <합장> 등 시비마다 비바람이 휘감았다. 서울문학기행에 2년째 참여 중이라는 한 중년 남성은 가장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비석 사이를 걷고 있었다. 그이는 “부산에서 50여 년을 살다가 재작년 서울로 이사했다. 서울을 배우고자 문학기행을 다니게 됐다”고 말했다.

“원래 서울문학기행이 산도 타고 언덕도 오르고 강도 건너고 온종일 많이 걷습니다. 그러면서 서울이 얼마나 문학적 유산이 많은 도시인지 배우니, 계속 문학기행에 나오게 됩니다. 햇볕이 쨍쨍하면 더 힘든데, 시원한 소나기 맞으며 걸으니 얼마나 좋습니까?”

강북구에는 국립 4·19민주묘지 말고도 문학인의 흔적이 곳곳에 숨어 있다. 잡지 <폐허>의 동인으로 신문학운동의 선구자이자 평생 독신으로 담배를 사랑했던 공초 오상순(1894~1963)의 묘소와 문학비, 민주화·통일 운동가로서 자유와 통일을 주제로 문학 활동을 활발히 펼쳤던 문익환(1918~1994) 목사의 시비(한신대) 등이다. 모두 일행들이 거쳐 갈 장소다.

김경식 사무총장 또한 시인이다. 그동안 <서울문학지도> <사색의 향기 문학기행> 등 저서에서 문학 관련 유적지를 글에 담아 엮었다. 김 총장은 “서울은 500년 이상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지만 환란과 전쟁으로 건축물 원형이 그대로 남아 있는 곳이 거의 없다”고 했다. 때문에 “역사와 그 시대 인물을 탐구하며 문학적 상상력으로 여행하는 문학기행은 문학을 넘어 이 땅의 지리와 역사를 몸으로 알게 한다는 점에서 의미 있다”는 것이다.

시 낭송이 변화시킨 인생 ‘문학의 집·서울’

‘문학의 집·서울’에서 매주 목요일 열리는 ‘정오의 시읽기’

같은 날, 중구 예장동에 있는 ‘문학의 집·서울’에서는 점심시간을 활용한 ‘정오의 시 읽기’ 행사가 오후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이 방에 들어오면 시 한 수씩 읊고 가야 해!” 하며 시집을 건네주는 회원들이다. 이처럼 모르고 강의실에 들어섰다가는 시 낭송으로 ‘인사’를 나눠야 한다. 대신 향긋한 원두커피와 큼직한 빵이 ‘답사’로 돌아왔다.

명동역에서 남산 방향으로 걸어서 10분 채 못 되는 거리에 있다. 구불구불 골목 따라 가다보면 닿는 ‘문학의 집·서울’은 소담한 야외정원과 문학공원, 문학관, 북카페, 전시실 등이 있는 푸근한 주택이다. 2001년 문학인들과 서울시, 유한킴벌리가 뜻을 모아 옛 중앙정보부장 공관을 문화예술 교류의 자리로 만들었다. 2013년 서울미래유산으로 선정된 뒤, 2014년에는 한국문학관협회가 선정한 최우수문학관으로 선정될 만큼 정성 들여 꾸몄지만 다른 관광지만큼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래서 회원들은 큰길가로 나가 지나가는 젊은 직장인들을 모시느라 커피를 대접하며 애를 썼다. 이 공간이 마음에 여유가 없는 청년들에게 ‘힐링 공간’이 될 수 있으리란 믿음에서다.

중구 예장동 ‘문학의 집·서울’ 야외정원이 신록으로 물들었다.

젊은 날 ‘문청’(문학 청년)이 되기를 꿈꿨던 중·장년층들에게도 ‘문학의 집·서울’은 활발한 교류의 장이다. 2년째 문학의 집 ‘정오의 시 읽기’에 참여 중이라는 김세희씨는 “문학은 정년이 없잖아요. 회원 중에는 시를 700편을 넘게 외우는 이들도 있어요”라고 자랑스레 말했다. 안정윤씨는 “시를 외우기 시작한 후 일상이 행복해졌다”며 웃었다.

“시를 모방하며 살게 되니까요. 시를 닮아가니까 말이 부드러워지고 표정이 편안해졌죠. 한때 사업을 해서 말이 거칠어지기도 했거든요. 아이들에게 ‘간장 사와!’ 명령을 했다면, 지금은 ‘간장 좀 사다주면 안 될까?’ 하고 변한 거죠.”

‘문학의 집·서울’ 들머리에 있는 ‘시 읽는 방’에서는 커피 한잔 마시며 잠시 쉴 수 있다.

우리가 문학에 기대는 이유

김경식 사무총장은 “문학기행이 일반 여행과 뚜렷하게 구별되는 점은 ‘지적 탐구’에 있다”고 말한다. 익숙한 곳을 낯설게, 나아가 새롭게 보는 재미는 밋밋한 일상 속 활력이 된다. 친구들과 함께 서울문학기행에 두 번째 참여했다는 윤기숙(50)씨는 “문학기행은 해외여행하는 기분이 든다. 근처에 사는데도 잘 몰랐던 곳을 열정을 가지고 안내해주니 많이 배우고 돌아가는 게 좋다”고 말했다. 상반기 국제펜클럽 한국본부에서는 오는 6월21일까지 매주 목요일 답사를 할 예정이다. (참가 문의 02-782-1337~8)

문학의 흔적을 따라 서울을 걷고, 시인들 작품을 삶의 방향타로 삼는 건 고단한 일상에 작은 위로가 되기도 한다. ‘문학의 집·서울’의 이희자 운영위원은 “시 한 수 읊을 수 있는 사람은 뭔가 다르죠. 시를 만나 부드러워지는 인생이 많아요. 남산 기슭을 걷다가 편하게 들려서 전시도 보고 커피도 마시고 부디 쉬다가 가시라”고 전했다. 매주 목요일 정오에 열리는 ‘정오의 시 읽기’ 행사 외에도 6월21일까지 ‘남산시학당’에서 프랑스 시를 함께 읽는다. 6월 중 ‘자연사랑문학제’를 통해 서울의 공원, 휴양림 숲 체험이 열릴 예정이다. (문의 02-778-1026~7)

글·사진 전현주 객원기자 fingerwhale@gmail.com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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