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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가출, 미군부대서 실력 연마
1971년 ‘선데이서울컵’ 가수왕 등극
그해 4곡 담긴 컴필레이션 앨범 데뷔
1980년 전까진 다양한 음악적 시도
가왕 조용필의 초창기 앨범들과 사진. 조용필의 노래 4곡이 담긴 데뷔 앨범 <여학생을 위한 뮤지칼 “사랑의 일기”>(1971년)
데뷔 50주년을 맞은 가왕 조용필의 전국투어가 한창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대중가수라는 존재가치에 걸맞게 그의 음악과 영상을 만날 수 있는 음반 미디어는 엘피(LP)를 시작으로 카세트테이프, 시디(CD), 레이저디스크, 비디오테이프, 디브이디(DVD) 등에 이르기까지 스펙트럼이 넓다. 국내외에서 발매된 LP만 해도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조용필의 수많은 LP 중에는 음반 수집가들이 탐내는 희귀 앨범이 무수하다. 그의 전성기였던 1980년 이후 히트 음반보다는 데뷔 시절 음반들은 실물을 보기 힘든 희귀 음반이 대부분이다. 가왕으로 성장하기 전, 조용필이 데뷔하던 무렵에 발매된 희귀 LP 음반 몇 장을 소개한다.
조용필은 고등학교를 다니던 1968년에 음악 활동을 하려고 가출했다. 음악하는 친구 3명과 서울 동대문 근처 허름한 창고를 손보아 내놓은 월세방에서 살며 록밴드 ‘애트킨즈’를 결성했지만, 일자리를 구하기 쉽지 않아 경기도 문산의 용주골에 있는 기지촌 클럽을 찾아갔다. 그곳에서 1년 동안 흑인 병사와 양공주들이 던져주는 팁으로 생활했다. 그 시절은 가왕 조용필의 음악 여정에서 가장 가혹한 시절이라 할 수 있다. 1969년 팀이 해체되면서 화양 소속 록밴드 ‘화이브 핑거스'에 잠시 몸담았고, 미8군 등지에서 활동한 록 밴드 ‘비스’의 오디션에서 탈락했을 정도로 데뷔 시절 조용필은 연주력이나 자신의 곡을 창작할 음악 내공이 부족했다.
당시 조용필은 하숙방과 업소에서 틈만 나면 라디오나 음반으로 들은 외국곡의 선율을 그려가며 음악 내공을 기르려는 열성을 보였다. 업소로 찾아온 가족들에게 붙들려 고향 화성으로 돌아가 원치 않았던 대학입시 준비로 잠시 활동을 중단하기도 했다. 또다시 가출을 시도한 조용필은 경기도 광주의 무명 하우스 밴드에 합류했다. 연주만 했던 그는 밴드 보컬리스트가 입대하는 바람에 갑자기 대타로 노래를 부르는 터닝 포인트를 맞이했다. 마침 생일을 맞은 한 미군 병사가 바비 블랜드의 <리드 미 온>(Lead Me On) 음반을 건네며 노래를 신청했다. 밤새 음반을 듣고 연습해 다음날 멋지게 연주하고 노래해 박수갈채를 받았다. 이후 조용필은 백인, 흑인, 라틴계 미군 병사들의 전혀 다른 음악 취향에 맞춰 솔, 리듬&블루스 등 다양한 장르의 노래들을 섭렵하는 소중한 경험을 한다. 1970년 서울로 온 그는 국제호텔 ‘레인보우’, 조선호텔 ‘투모로우’ 등에서 밤무대 활동을 시작했다. 또한 최이철과 함께 ‘김대환과 김트리오 악단’의 멤버가 되어 1971년 5월 서울 시민회관에서 열린 제3회 선데이서울컵 전국 그룹사운드 경연대회에 참가해 이변을 일으켰다. ‘길 잃은 철새’와, ‘언체인드 멜로디’(Unchained Melody)를 부른 조용필이 히식스, 키보이스 등 인기 밴드의 리드 싱어들을 제치고 가수왕이란 대어를 낚아버린 것. 가수로서 가창력과 가능성을 인정받은 조용필은 자연스럽게 정식으로 음반 발매의 기회를 잡았다. 1971년 최초로 조용필의 노래 4곡이 담긴 데뷔 음반 <여학생을 위한 뮤직칼 “사랑의 일기”>가 오스카레코드-사에서 나왔다. 이 음반은 조용필, 영트리오, 유미려 등이 함께한 컴필레이션(편집) 음반이다. 재킷 뒷면에 표기된 ‘푸레이보이 컵쟁탈가수왕 조영필의 사랑의 자장가’란 부제는 신인 가수 조용필에 대한 기대감을 말해준다. 조용필이 노래한 팝송 번안곡 4곡은 히트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재킷 뒷면에는 21살 청년 조용필의 풋풋한 흑백 사진이 실려 있는데, 이름이 ‘조영필’로 잘못 표기돼 있다.
당시 조용필은 하숙방과 업소에서 틈만 나면 라디오나 음반으로 들은 외국곡의 선율을 그려가며 음악 내공을 기르려는 열성을 보였다. 업소로 찾아온 가족들에게 붙들려 고향 화성으로 돌아가 원치 않았던 대학입시 준비로 잠시 활동을 중단하기도 했다. 또다시 가출을 시도한 조용필은 경기도 광주의 무명 하우스 밴드에 합류했다. 연주만 했던 그는 밴드 보컬리스트가 입대하는 바람에 갑자기 대타로 노래를 부르는 터닝 포인트를 맞이했다. 마침 생일을 맞은 한 미군 병사가 바비 블랜드의 <리드 미 온>(Lead Me On) 음반을 건네며 노래를 신청했다. 밤새 음반을 듣고 연습해 다음날 멋지게 연주하고 노래해 박수갈채를 받았다. 이후 조용필은 백인, 흑인, 라틴계 미군 병사들의 전혀 다른 음악 취향에 맞춰 솔, 리듬&블루스 등 다양한 장르의 노래들을 섭렵하는 소중한 경험을 한다. 1970년 서울로 온 그는 국제호텔 ‘레인보우’, 조선호텔 ‘투모로우’ 등에서 밤무대 활동을 시작했다. 또한 최이철과 함께 ‘김대환과 김트리오 악단’의 멤버가 되어 1971년 5월 서울 시민회관에서 열린 제3회 선데이서울컵 전국 그룹사운드 경연대회에 참가해 이변을 일으켰다. ‘길 잃은 철새’와, ‘언체인드 멜로디’(Unchained Melody)를 부른 조용필이 히식스, 키보이스 등 인기 밴드의 리드 싱어들을 제치고 가수왕이란 대어를 낚아버린 것. 가수로서 가창력과 가능성을 인정받은 조용필은 자연스럽게 정식으로 음반 발매의 기회를 잡았다. 1971년 최초로 조용필의 노래 4곡이 담긴 데뷔 음반 <여학생을 위한 뮤직칼 “사랑의 일기”>가 오스카레코드-사에서 나왔다. 이 음반은 조용필, 영트리오, 유미려 등이 함께한 컴필레이션(편집) 음반이다. 재킷 뒷면에 표기된 ‘푸레이보이 컵쟁탈가수왕 조영필의 사랑의 자장가’란 부제는 신인 가수 조용필에 대한 기대감을 말해준다. 조용필이 노래한 팝송 번안곡 4곡은 히트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재킷 뒷면에는 21살 청년 조용필의 풋풋한 흑백 사진이 실려 있는데, 이름이 ‘조영필’로 잘못 표기돼 있다.
솔로 데뷔 앨범 뒷면에 실린 젊은 시절의 조용필.
1980년대 들어 조용필의 1인 독주 시대가 시작되면서 무수한 편집 음반이 여러 음반사에서 쏟아졌다. 데뷔 음반에 수록한 노래들도 원곡에 여러 악기를 더빙한 세련된 버전으로 두세 차례 재발매했다. 간단한 통기타 반주에 맞춰 담백하게 노래하는 오리지널 버전의 감흥은, 오직 데뷔 음반에서만 느낄 수 있다. 조용필의 데뷔 앨범은 상태가 좋은 경우 300만원이 넘는 고가에 거래되는 희귀 앨범이다. 조용필이라는 브랜드 파워와 더불어, 무엇보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음반 숫자가 극소량이기 때문이다.
기타연주자로 참여한 김대환과 김트리오 악단의 앨범 <드럼!드럼!드럼! 엠프키타 고고!고고!고고!> (1972년)
이어 1972년 아세아레코드사에서 기타리스트로만 참여한 ‘김대환과 김트리오 악단’의 LP도 발매되었다. 음반에는 창단 멤버 최이철이 빠지고 이남이(밴드 ‘사랑과 평화’)가 참여했다. 김대환은 회고록에서 “김트리오의 인기는 높았다. 그만큼 연습도 많이 했다. 게으름을 피우면 가차 없이 주먹이 날아갔다. 용필이도 고백하지만 나를 떠올리면 매 맞은 기억밖에 없다고 할 정도였다”라고 말했다. 최근 재발매된 이 희귀 음반은 조용필, 이남이가 국민적인 인기를 얻기 이전에 함께한 유일한 연주 앨범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김대환과 김트리오 악단’ 시절 김대환과 최이철과 함께한 조용필(오른쪽).
조용필은 1972년 전반적으로 팝 스타일의 노래들로 구성된 첫 독집을 발표했다. 조용필의 첫 창작곡들인 ‘내 마음속의 그림자’ ‘옛일’ 그리고 ‘돌아와요 부산항에’의 첫 버전이 수록된 음반이란 점에서 가치가 있다. 진성과 가성을 넘나드는 조용필 노래에다 효과음까지 더빙한 2면 첫 트랙 ‘일하지 않으면 사랑도 않을래’는 조용필의 첫 금지곡이다. 금지 사유는 “가사 저속”과 “퇴폐”로 알려졌는데 금지되는 바람에 널리 알려지지 못했다. 국방홍보원 자료실이 소장한 이 앨범을 보면, 1975년 10월26일에 ‘표절’로 방송 금지되었음이 확인된다. 이 노래의 원곡은 1970년 개최된 이탈리아 산레모 가요제에서 1위를 차지한 아드리아노 첼렌타노의 ‘일하지 않는 사람은 사랑도 못하네’(Chi Non Lavora Non Fa L'Amore)이다.
첫 독집 앨범 <조용필 스테레오 힛트앨범>(1971년)
조용필의 첫 독집은 팝 번안곡들과 조용필의 창작곡을 다채롭게 구성한 음반이다. 훗날 그의 대표곡이자 국민가요가 된 ‘돌아와요 부산항에’의 첫 버전도 여기에 실렸다. 하지만 이 곡은 앨범의 다른 수록곡들과는 음악적으로 어울리지 않았다. 이렇게 데뷔 시절의 조용필 앨범들은 자신의 앨범을 통제하지 못했던 폐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조용필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1980년 이전의 음반들에 대해 “솔직히 그 시기의 음반들을 생각하면 부끄럽다. 내가 이런 음반들을 내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제작자가 주문했기에 떠밀려서 했다. 직접 신경을 쓴 1980년 이후 음반부터가 진짜 내 음악이다”라고 말했다.
글·사진 최규성 대중문화평론가ㅣ한국대중가요연구소 대표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