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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공민왕 사당 입구에
푯돌, 존재감 없이 놓여 있고
내용도 불친절하기 짝이 없어
푯돌 내용 대대적으로 손봐야
광흥창, 단순한 녹봉 창고 아니라
녹봉 지급 운영하던 호조 관아
6호선 지하철 광흥창역명 ‘신의 한 수’
공민왕, 알고보면 광흥창과 여러 인연
서울 마포구 창전동 공민왕 사당은 고려 공민왕과 노국공주를 모신 사당이다. 매년 음력 10월 초하루 사당문을 열고 향제를 거행한다.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노주석 제공
서울 마포구 창전동 42-17 광흥창 터 푯돌을 찾아 떠난다. 지하철 6호선 광흥창역 1번 출구로 나오면 지상용 엘리베이터 앞에 ‘공민왕 사당 가는 길’ 안내 팻말이 맞이한다. 교통표지판으로 보면 광흥창역 사거리에서 상수역 방향으로 가는 독막로다. 서강쌍용예가아파트를 따라 직진하면 109동이 나오고 서강감리교회 간판이 앞을 막는다. 여기서 우회전해 독막로21길 언덕을 100여m 오르다가 아파트 단지를 끼고 내려가면 전혀 예상치 못한 풍경을 만난다.
거대한 회화나무와 느티나무 대여섯 그루가 깊은 그늘을 드리운 틈에 한옥 대문이 정갈하게 솟아 있다. 고려 31대 공민왕(1330~1374) 사당이다. 사당 밖에는 회화나무 세 그루가, 안에는 느티나무 두 그루가 사당 안팎을 호위하고 있다. 키가 30m 넘고, 둘레 3m 이상인 200~300년 묵은 신령한 나무가 지키는 형국이다. 전통문화공간이라는 이름의 신축 한옥 광흥당이 경건한 분위기에 거슬린다. 사당 주변에 보이는 정자와 체육시설은 주변 아파트와 빌라 주민용 사랑방인 듯하다.
회화나무와 느티나무 노거수에 둘러싸인 공민왕 사당 출입문 아래에 광흥창 푯돌이 초라하게 놓여있다.
서울시등록문화재 제231호인 사당 뒤편에 와우근린공원이 푸른 띠를 두르고 머리를 내밀고 있다. 마포구에서 지정한 ‘걷고 싶은 길’ 출입구 나무계단이 가파르다. 나무계단은 중앙하이츠아파트로 가는 길이다. 꼭대기엔 4개 동의 아파트가 막다른 골목을 이루고 있다. 1970년 무너진 와우아파트 15동 등 5개 동을 철거한 자리에 와우근린공원이 조성됐고, 나머지 14개 동은 1976년부터 1991년까지 차례로 재개발돼 이제는 낯선 이름을 달고 공원을 둘러싸고 있다. 1968년 여의도 개발을 위해 밤섬이 폭파되면서 고향을 잃은 밤섬 주민 62가구 443명이 강제 이주해온 곳도 이 산 아래였다. 해마다 이곳에서는 실향의 아픔을 되새기는 밤섬 부군당 도당굿이 열린다.
광흥창 푯돌은 존재감 없이 사당 입구에 있는 듯 없는 듯 놓여 있다. 광흥창을 찾아왔지만 영접은 공민왕 사당이 하는 격이다. 공민왕 사당이 주인이고, 광흥창은 손님 모양새다. 어쩌면 푯돌 하나 덩그렇게 놓여 있는 것보다 나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홀대의 흔적이 역력하다. 네이버 지도를 검색하면 광흥창이나 광흥창 터, 광흥창 표석은 나오지 않고, 공민왕 사당만 나온다. 광흥창 터는 지번도 없이 공민왕 사당에 더부살이하고 있다.
광흥창 터(廣興倉址) 푯돌에는 “조선시대 관원의 녹봉(祿俸)으로 쓰일 양곡(糧穀)을 저장하던 창고 터”라고 쓰여 있다. 예의 불친절한 거두절미 문법이다. 기본 정보를 제공하니 나머지는 알아서 하라는 뜻이다. 얼마 전 문재인 대통령이 불친절한 청와대 경내 문화재 안내판을 지적한 뒤 문화재청이 국민 눈높이 수준으로 안내판을 뜯어고치기로 했다는 신문기사를 읽었다. 불친절한 서울 시내 푯돌도 대대적으로 손봐야 할 때가 온 성싶다.
광흥창 푯돌 문구에는 세 가지 의문점이 있다. 첫째, 광흥창은 조선시대가 아니라 고려시대부터 관리들의 녹봉을 주던 기관이었다. 1308년 충선왕 때 기존의 ‘좌창’이란 이름을 광흥창으로 바꿨다. 고려시대부터 내려온 오래된 관아의 기록을 제외할 온당한 이유가 있는지 묻고 싶다. 고려를 빼니 광흥창과 공민왕의 관계를 잇기 어렵다.
둘째, 녹봉 지급품은 양곡에 한정되지 않았다. 녹봉은 녹(祿)과 봉(俸)을 합친 용어인데, 녹은 3~6개월 단위로 주어졌고, 봉은 월 단위로 주어진 관리들의 관직 복무에 대한 대가였다. 녹은 연봉 개념이고, 봉은 월급 개념으로 이해된다. 쌀 이외에 명주와 저화(지폐)까지 모두 8종류를 지급했으니 양곡이란 표현은 지나치게 제한적이다.
셋째, ‘저장하던 곳’이란 표현에는 오해의 소지가 있다. 왜 광흥창이 와우산 아래 후미진 언덕에 자리잡았으며, 또 공민왕 사당과 함께 있는지를 설명할 길이 없다. 장소의 역사를 무시한 단순화다. 무엇보다 광흥창은 단순히 녹봉을 저장하던 창고가 아니라 녹봉 지급을 운영하던 호조 소속의 당당한 관아였다. 조선의 양반관료제를 재정적으로 지탱하던 왕조의 근간이었다.
김정호의 경조오부도 중 광흥창이 있던 서강 지역을 확대한 사진.
고산자 김정호의 경조오부도(사진)중 마포 부분을 확대한 지도를 보면 의문이 풀린다. 옛사람들은 한강을 하나의 강으로 보지 않았다. 한강을 3강, 5강, 8강, 12강으로 세분했다. 또 한강을 서호(서강), 남호(용산강), 동호(두모포) 등 3개의 호수로 여기고 풍류를 즐겼다. 양화진, 서강, 마포, 용산, 한강진으로 나눈 5강 분류가 가장 대중적이다. 지도 속 율도(밤섬)와 수철리(신수동·구수동)에서 두 갈래로 나뉜 창천 물길이 와우산 아래 광흥창을 지나 서강으로 흘러들어가는 것을 볼 수 있다.
<대동지지>와 <동국여지비고>에 “창천은 무악(안산)에서 발원해 와우산과 광흥창을 경유해서 서강으로 들어간다”고 적혀 있다. 창천과 한강이 만나는 지점이 서강이다. 창천이란 말 그대로 창고 앞의 하천인데 여기서 창고란 광흥창을 이른다. 광흥창이 창천이라는 하천 이름을 만들었으며, 창전동(창고 앞 동네)이라는 지명의 유래가 됐다. 광흥창의 존재가 이 지역을 생성·진화시켰다.
서강에 닻을 내린 팔도의 조운선(세곡을 실은 배)이 창천의 물길을 이용해 사대문과 가장 가까운 내륙에 접근, 짐을 부린 곳이 바로 지금의 광흥창이다. 지금은 복개돼 독막로 아래로 사라진 창천을 눈으로 보지 못하니 실감이 나지 않는 것이다. 서강나루를 통해 쌍용예가아파트 앞까지 배가 들어왔고, 광흥창은 홍수를 피해 와우산 아래 올려 지었다. 6호선을 개설하면서 지하철역명을 ‘광흥창(서강)’이라고 작명한 것은 ‘신의 한 수’였다. 죽었던 광흥창을 관에서 꺼낸 셈이다. 우리 주변에는 북창동·남창동·평창동·동빙고동·서빙고동·창동 등 창고에서 유래된 지역명이 많다.
광흥창과 공민왕 사당이 함께 있는 이유는 단순하다. 공민왕 사당 안내판에는 공민왕이 재위 때 한강을 찾아 유흥을 즐겼다고 적어놓았다. 서울에 고려 유적이 별로 없고, 고려의 유서 깊은 관아 이름을 그대로 딴 광흥창이 있으니 고려 왕을 이곳에 모시는 게 자연스럽다. 또 공민왕은 고려를 무너뜨린 태조와 태종이 특별하게 여긴 인물이었다. 역대 왕의 신전인 종묘에 공민왕 사당을 따로 둬 노국대장공주와 함께 모신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종묘에 따로 모셔져 있는 공민왕과 노국공주 영정.
공민왕이 광흥창사(광흥창의 우두머리)의 꿈에 나타나 사당을 짓고, 제사 지낼 것을 계시했다는 설화는 ‘믿거나 말거나’다. 고려 숙종이 1104년 지금의 청와대 근처에 남경행궁을 지어 행차한 뒤 역대 왕들이 수시로 남경 나들이를 즐겼으니 근거 없는 이야기는 아니다. 땅의 기운이 쇠한 개성에서 서울로 수도를 진작 옮기지 못한 게 고려 멸망의 원인이라는 풀이도 있다.
화약을 개발·제조해 왜구를 무찌른 최무선이 광흥창사를 지낸 최동순의 아들로 소개되거나, 공민왕 사당에 노국공주와 최영 장군을 함께 배향한 점도 흥미롭다. 일제가 남산에서 인왕산으로 옮긴 국사당에도 최영 장군이 모셔져 있다. 공민왕 사당은 매년 음력 10월 초하루에 향제를 모신다고 한다. 무엇보다 광흥창과 공민왕 사당의 관계가 역전된 점을 눈여겨봐야 한다. 백관에게 내리던 녹봉을 수급·운영하던 관아 광흥창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광흥창에 기대 향을 피웠던 공민왕 사당은 살아남은 것이다. 장소의 유전이다.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 원장ㅣ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