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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동대문 가정집서 미군 녹음기로
마이크 1대의 척박한 환경서 녹음
1968년 펄시스터즈 대박 이후 재반 거듭
1990년대 후반 “일본인에 400만원 팔려”
대중음악 평론가 최규성씨가 최초로 언론에 공개한 ‘짹키와 그 일행’ 에드포 극장쇼 포스터.
신중현의 활동 초기와 전성기에 발매된 음반들은 대중가요 엘피(LP) 컬렉션의 화두로 평가받는다. 하나같이 그의 음악적 색채와 향기가 선명한 창작곡에다 금지돼 폐기된 희귀 음반들이기 때문이다. 그중 대중가요 LP의 최고가 기록을 경신하고 있는 데뷔 앨범 <히키-신 키타-멜로듸>와 그에게 ‘한국 록의 대부’란 찬사를 안겨준 에드포(발표 당시엔 ‘에드·훠’로 표기) 첫 앨범은 재발매를 거듭한 희귀 LP이다. 이제껏 한 번도 소개된 적 없는 신중현의 첫 밴드 에드포의 진귀한 극장쇼 포스터와 밴드 에드포 시절에 발매했던 앨범들을 소개한다.
신중현은 미8군 무대에서 ‘히키신’ 혹은 ‘짹키’란 애칭으로 활동했다. 비틀스가 첫 싱글앨범을 낸 1962년에 그는 테너 색소폰 신지철, 드러머 김대환과 이름을 모르는 콘트라베이스 연주자 2명과 미8군 4인조 패키지 쇼 악단 ‘클럽 데이트’를 결성했다. 신중현은 인터뷰에서 “그 시절 키 작은 내가 장대같이 큰 신지철의 가랑이 사이를 넘나들며 기타를 연주해 기립박수까지 받을 만큼 쇼맨십이 대단했었다”고 당시를 증언했다. 신중현은 인기가 많았던 클럽 데이트를 해체하고 당시 선풍적이었던 비틀스 음악에서 모티브를 얻어 한국적인 록음악을 시도하려는 야망을 품었다.
신중현은 비틀스의 애칭 ‘fab4'와 비슷하게 밴드 이름을 ‘애드포’(Add4)로 정하고 유니폼 콘셉트까지 벤치마킹했다. 멤버 영입에 나선 그는 4인조를 이뤄, 밤에는 동두천 미 7사단 클럽에 출연해 생활비를 벌었고 낮에는 작곡과 연주 연습에 몰두했다. 이번에 처음 공개한 포스터에서 보듯 미8군 밴드 에드포는 극장 쇼와 음악감상실 같은 일반 무대에서는 ‘짹키와 그 일행’이란 이름으로 활동했다. 김시스터즈의 오빠 김영조의 주선으로 이난영, 이봉룡 남매가 운영한 LKL레코드에서 에드포의 첫 앨범 제작이 결정되었다.
에드포의 데뷔 앨범인 <빗속의 여인>의 여러 버전.
앨범을 제작할 음반사가 정해졌지만 녹음은 지연되었다. 수도 없이 교체된 멤버 구성도 문제였지만 무엇보다 녹음할 곡이 부족했다. 당시는 싱글 개념이 없어 무조건 10곡이 넘는 앨범만 제작했다. 한국 최초의 창작 록 앨범에 수록할 곡 창작과 연습을 위해 2년의 세월이 더 필요했다. 1964년 최종적으로 리드기타 신중현, 보컬 서정길, 드럼 권순근, 베이스기타 한영현이 녹음에 참여했다. 그동안 에드포 첫 앨범 녹음은 ‘일반 가정집을 녹음실로 이용했던 장충녹음실의 카펫이 깔린 응접실에서 진행되었다’고 알려져 있었다.
이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최근 캐나다에서 귀국한 에드포의 드러머 권순근은 필자와 인터뷰에서 “장충동이 아닌 동대문에서 녹음했다”고 증언했다. ‘크래이지 드러머’로 명성을 떨쳤던 권순근은 1961년 공군 군악대 출신들로 결성된 밴드 ‘블루 스카이’와 ‘아카데미’를 거쳐 에드포의 첫 앨범 녹음에 참여했다. 녹음은 카펫이 깔린 가정집 응접실에서 휴대용 미군용 릴 테이프 녹음기에 길게 연결된 한 개의 마이크 주변에 멤버들이 모여 동시녹음을 시도했다. 연주나 노래가 틀리면 처음부터 다시 녹음하는 악조건이었지만, 아침부터 시작된 14곡의 녹음은 실수 없이 단 한 번에 끝냈다. 한국 최초의 창작 록 앨범은 이처럼 최악의 척박한 환경에서 탄생했다.
에드포 시절 발매한 앨범들.
청년 신중현이 신선한 목소리로 신나게 부르는 ‘커피 한잔’의 오리지널 곡 ‘내속을 태우는구려’와 후에 ‘퀘션스’의 객원 보컬로 참여한 임성훈의 노래로 유명해진 ‘명동거리’의 원곡 ‘나도같이 걷고싶네’는 흥미로운 트랙이다. 그리고 신중현 사단의 첫 여가수가 펄시스터즈나 김추자가 아닌 1964년 KBS 아마추어 톱싱어 경연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고 KBS합창단원으로 활동했던 장미화라는 사실은 흥미롭다. ‘안녕하세요’로 70년대를 풍미한 장미화는 ‘天使(천사)도 사랑을 할까요’ ‘굳나 燈(등)불을 끕시다’ 2곡을 녹음했다.
최초의 창작 록 음반에 대한 반응은 서울이 아닌 지방에서 먼저 감지되었다. 이에 부산 제일극장 쇼 무대에서 활동하던 에드포는 서울로 올라와 시민회관(지금의 세종문화회관), 서울 세종로의 ‘아카데미 음악감상실’, 젊은이의 명소였던 명동 ‘오비스 캐빈'의 꼭대기 층에서 공연을 했다. 티켓은 어느 정도 팔렸지만 ‘쇼 단장’들의 횡포에 생계가 힘들었다고 한다. 당시 에드포는 일반 무대와 더불어 장미화, 전미라, 제비시스터즈 등 여성 객원가수들과 무용수들과 함께 미8군 클럽에서도 활동했다. 또한 리더 신중현은 송만수에게 곡을 주며 첫 작편곡집을 발표해 작곡가로서 활동 영역을 넓히기 시작했다. 더불어 에드포는 재즈가수 김영국의 음반에 세션으로 참여하며 1965년까지 활동을 이어갔다.
에드포가 제비시스터와 미8군 클럽에서 공연하는 사진.
신중현이 창설한 에드포의 첫 음반은 중고 대중가요 LP 가격이 천정부지로 뛰고 있던 1990년대 말에 서울 청계천에서 “일본인이 400만원에 사갔다”는 풍문이 나돌았다. 외국곡 카피가 아닌 자신의 창작곡으로 승부를 걸어 흥행 참패를 이어갔던 신중현이 1968년 펄시스터즈의 데뷔 앨범을 통해 뒤늦게 사랑받기 시작하면서 이 음반도 주목받았다. 60년대 후반에 변형 재킷으로 재발매된 무수한 음반이 그 증거다.
초반은 KBS 텔레비전에 출연한 멤버들의 연주 사진을 재킷으로 사용한 LKL레코드다. 재반은 라벨 색이 회색도 있다. 간혹 재킷은 초반이지만 음반은 신진레코드사 라벨의 재반이 들어 있는 경우가 많으니 꼼꼼하게 봐야 된다. 초반과 재반의 가격 차이는 어마어마하다. 재반은 LKL에 이어 신진에서 여러 버전이 무차별적으로 제작되었다. 그중 하얀 바탕에 에드포 멤버들의 흑백사진으로 커버가 장식된 버전은 서정길, 장미화, 투닥스, 전미라 등 4명이 노래한 7곡이 2면을 장식하고 있어 재발매 음반 중 가장 희귀하다.
몇 장의 ‘연주 음반’으로 명맥을 이어갔지만 당시 대중적 인기는 외국 번안곡으로 활동했던 라이벌 밴드 ‘키보이스’의 몫이었다. 먹고살기 힘들어진 신중현은 1966년 결국 밴드를 해산하고 미8군 클럽 무대로 돌아갔다. 이후 신중현은 연주음악 위주로 활동하면서 ‘블루즈 테트’(‘한국의 벤쵸스’로 명기한 에드포 음반), ‘액션스’ 등을 거쳐 1968년 ‘덩키스’ 결성 후 펄시스터즈의 빅히트까지 10년의 무명 시기를 감내했다.
글·사진 최규성 대중문화평론가ㅣ한국대중가요연구소 대표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