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신히 탈출한 뒤 폭파된 한강다리 찍으러 갔다”

3대 사진가 임인식·정의·준영의 한국사 80년 ④ 한강의 다리

등록 : 2018-08-02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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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대 사진가 임인식 6월28일 퇴각 중

용산역 부근서 다리 폭파 소식 들어

부교 잡고 가다가 나룻배 타고 건너

부서진 철교 모습 먼저 찍어

2대 임정의는 70~80년대 사진기자로

지방 출장 중 헬기 타고 가다가

한강다리 사진 종종 찍어서 남겨

강남 항공사진 남기고 싶은 마음


3대 임준영은 한강 이미지에서

우리 청년들이 마주한 현실 포착

할아버지가 찍은 한강철교를

직선이 아닌 원형으로 변형해

1950년 6월28일 1대 임인식 작가가 찍은 화염에 휩싸인 한강철교. 부교를 잡고 한강을 간신히 건너 영등포 노량진 부근 언덕에서 카메라에 담았다.

“어쩌면 할아버지가 한강을 못 건널 뻔했어요. 다시는 만나지 못했을 수도 있었고요.”

7월23일 늦은 오후, 한강철교 1차 촬영을 마친 임준영(42) 작가가 배터리를 충전하기 위해 청암사진연구소로 돌아왔다. 같은 시각 연구소를 지키던 아버지 임정의(73) 작가는 연소하는 기억과 전투 중이었다. 기억을 잊지 않기 위해 이미 여러 번 미간을 구겼다. 1대 사진가 청암 임인식(1920~98)의 ‘1950년 6월28일’을 함께 되짚은 날. 달력은 1년 중 가장 무더운 때인 ‘대서’를 알리고 있었다.

안심하고 서울을 지키라더니

1950년 6월29일 1대 임인식 작가가 찍은 부서진 한강철교. 퇴각 뒤 영등포 한강방어선 취재차 철교 가까이 들어가 촬영했다.

1950년 6월28일 새벽. 폭음 속에서 한강인도교(한강대교)가 끊어졌다. 잇따라 한강철교가 연기에 휩싸였다. “서울 시민 여러분, 안심하고 서울을 지키시오!” 이승만 대통령이 라디오를 통해 서울 사수 의지를 표명한 것이 고작 대여섯 시간 전이었다. 시민들은 이승만 정부가 이미 다리 건너 몸을 피했다는 것을 꿈에도 몰랐다.

“아버지도 그때 한강다리를 건너지 못했어요.” 임정의는 절박했던 임인식의 상황을 대신 회고했다. 국방부 정훈국 소속이었던 임인식 사진대장도 퇴군 중 용산역 부근에 이르러서야 한강다리가 모두 끊겼다는 소식을 들었을 정도로, 한강다리 폭파는 예고 없이 벌어졌다. 임인식은 피난민들과 급히 강물 속으로 들어가 부교를 잡았다.

‘… 중지도 섬에 이르니 다리 밑에서 파괴되어 부서진 수도관의 받침대가 불타면서 수면에 비치고 있었다. 불빛 속에서 나룻배 한 척이 시야에 들어왔다.’

‘… 확인해보니 나의 사진대원들은 한 사람도 빠져나오지 못했다. 한강인도교가 폭파되지 않았다면 수많은 서울 시민들과 군인들이 피해를 보지 않았을 텐데 하는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 6월28일 임인식 종군일기 중

“간신히 한강을 건너고서는 영등포 노량진 부근 언덕에서 부서진 한강철교 먼저 촬영하신 거예요.” 증언할 때마다 속이 타는 기억이었다. “다리 폭파를 두고 역사적으로 말이 많잖아요.”

한강다리는 생명선이었다. 다리가 끊기며 한강 북쪽에 100만 명 가까운 시민들 발이 묶였다. 그 안에 임인식의 식솔도 있었다. 한강인도교 폭파 때 500~800명으로 추산되는 군인과 민간인들이 폭사하거나 익사했다. 서울에 갇힌 9만5천 명 이상이 죽거나 학살, 납치됐다. 임인식은 강을 건넌 다음 날 수치심을 갖고 파괴된 한강철교 가까이 다가갔다. 1900년에 완공한 한강 다리 1호, 한강철교 고개는 뚝 꺾여 땅에 떨어져 있었다.

찍다가 들키면 경찰서 가던 시대

1981년 겨울, 2대 임정의 작가가 찍은 한강 인도교와 중지도(노들섬).

오늘날 한강을 연결하는 다리는 31개에 이른다. 다리마다 사연도 많다. “많다, 정말 많아.” 혼잣말하는 임정의는 1981년 출장 중 찍은 한강인도교와 중지도(노들섬) 사진을 꺼내 보였다. 사진기자로 지방 출장차 비행기를 종종 타던 때였다. 한강인도교는 전후 복구를 마치고, 4차로에서 8차로로 확장된 참이었다. 1982년에는 한강철교 공사 모습을 사진으로 남겼다. ‘안보교’로 불린 잠수교 위로, ‘강남 개발시대’를 알린 반포대교가 올라선 해였다. 해방 후 3개였던 한강 다리는 총 15개로 늘어났다.

“교량은 군사시설로 매우 중요하게 여기던 시절이라, 마음껏 찍기가 어려웠어요. 그래서 몰래 가서 찍곤 했죠. 필름을 압수당하고 신원조사 받고 잡혀가 망신당하기 쉬웠던 시절이었으니까요. 아버지는 강북 항공사진을 남기셨으니, 저는 강남 항공사진을 남기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요.”

‘건축사진’이란 말이 낯설던 때였다. 만연한 반공 정서 속에서, 교량 사진은 군사정보나 국가정보로 분류됐다. 마침 임정의가 활동했던 시절은 강남 개발을 견인하는 한강 다리들이 빠르게 건설되던 때였다. “가수 혜은이가 ‘제3한강교’를 불렀잖아요.” 강물은 흘러 제3한강교 밑을 지날 때, 다리는 한남동, 신사동, 압구정동을 향해 뻗어나갔다.

“강남이 허허벌판이던 때예요. 강북에서 강남 가는 일이 지금처럼 쉽지 않았거든요. 70년대 사진기자 시절에는 서울 발전상을 기록하거나 새마을운동 화보집 등을 찍기 위해 촬영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영문판 뉴스리뷰에서는 외국 홍보용 사진을 담아 소개하고요.” 그 경력은 기록사 측면에서 전후 개발 시대 시대상을 그대로 이어간 셈이 됐다.

서울 최고 폭염을 기록한 1994년, 성수대교가 무너진 그해 서울 인구는 이미 1천만 명을 넘어섰다. 강남 인구는 강북 인구를 추월하고 있었다.

낭만과 희망 찾아 한강 다리로

2018년 여름, 3대 임준영 작가가 찍은 한강철교. 드론으로 촬영해 원형의 이미지로 만들었다. (@juneyoung_lim)

21세기, 청암사진연구소의 사진가들은 ‘촬영 조건이 많이 달라졌음’을 먼저 실감한다. 임준영은 한강 다리 어디서도 검문을 받은 적 없다며, 아버지 이야기를 묵묵히 들었다. 임준영은 “경찰들은 오히려 다리에서 몸 던지는 사람들을 감시하는 분위기 같던데요?” 하며 현장 분위기를 전했다. 요즘 젊은이들은 ‘한강다리로 가즈아!’는 구호를 미래를 자조할 때 곧잘 쓴다. 강북이나 강남, 어디로든 방향을 못 잡는 청년 세대들의 현실이 두 땅의 경계에 끼어 있는 듯했다.

임준영은 촬영 내내 ‘눈보다 가슴으로 뷰파인더를 마주’하고자 했다. 용산구 이촌동과 동작구 노량진동을 잇는 1.1㎞ 길이의 한강철교는 지난 118년 동안 이편과 저편을 잇는 하나의 직선이었지만, 임준영은 철교를 원형으로 구부리기도 하고 파노라마로 펼치기도 하며 선을 변형해 보였다.

“도시의 다양한 면을 다양한 형태로 담는 것은 작가의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해서요. 저 너머 다시 만난 사람들을 떠올리며 드론을 띄웠습니다. 탈출하고 싶은 전쟁 같은 도시 ‘서울’이지만, 저는 여전히 낭만이 살아 숨 쉬는 도시라고 생각해요.”

서울의 정감 어린 얼굴은 지난 역사의 그림자까지 마주할 때, 비로소 보이는지 모른다. “행복하자, 아프지 말고” 가수 자이언티의 ‘양화대교’ 노랫말 세대인 임준영은 2018년 여름날 한강철교 사진에 반딧불이를 닮은 노란색 수채물감을 뿌렸다. 퍽퍽한 삶, 그래도 ‘희망’ 아니겠느냐 했다.

기획·글 전현주 객원기자 fingerwhale@gmail.com

사진 청암사진연구소 제공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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