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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3호선 옥수역 7번 출구
옥수현대아파트 진입로 오른쪽
얼음 제사 지내던 사한단 터와 나란히
종묘와 사직 제사용 얼음 창고
조선 후기 관영 빙고 저장량 3750톤
사영 빙고 5만6250~9만 3750톤
얼음 사용량만 보자면
서울 사람 문명도는 세계 최고 수준
서울 사람 문명도는 세계 최고 수준
서울 성동구 옥수동 중심부를 가로지르는 흉물스런 옥수고가도로 아래 빈터에 옛 동빙고를 닮은 참한 공공문화공간이 들어섰다. 옥수동의 지명은 본래 두뭇개였으나 동빙고가 있다 하여 ‘빙고골’이라고 했다.
서울 성동구 옥수동 4번지 동빙고 터를 찾아 떠난다. 푯돌을 찾을 때는 정부 정책에 다소 반하더라도 동명이 들어간 옛 지번 주소를 이용하는 게 현명하다. ‘옥수동’이라는 지번 주소가 ‘독서당로40길 25’라는 도로명 주소보다 한결 찾기 쉽다. 도로명 주소 대부분은 ‘피할 것은 피하고, 알릴 것은 알리는’ 방식이다. 지번에 포함된 지역의 내력과 정체성을 숨긴다. 도로명은 부동산 가치 제고를 위해 멋진 이름을 앞세우고 있을 뿐이다. 동빙고 터가 동빙고동에 있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독서당로에서 옥수동이나 동빙고를 찾기란 쉽지 않다.
지하철 3호선 옥수역 7번 출구로 나오자마자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리면 옥수현대아파트 단지가 보인다. 아파트 정문을 향해 50m쯤 올라가다보면 진입로 왼쪽에 큼지막한 아파트단지 안내도가 눈에 띈다. 2개의 푯돌은 그 아래 옹기종기 놓여 있다. 동빙고(東氷庫) 터와 사한단(司寒壇) 터이다. 서울시의 표석 설치 현황에 따르면 두 푯돌의 위치는 옥수현대아파트 정문 옆이라고 돼 있지만, 엄밀하게 따지자면 미타사 앞이라는 표현이 정확할 것 같다. 역사성과 지속가능성을 따져도 신라 때 창건된 사찰과 한 묶음으로 가는 게 나을 성싶다.
두 푯돌이 동일 장소에 놓인 까닭은 뭘까? 푯돌의 문구를 찬찬히 읽어보면 인과관계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둘은 일란성 쌍둥이 같은 존재다. 푯돌의 디자인이 다른 점이 다행스럽다. 1998년에 세운 동빙고 터 푯돌에는 ‘조선시대 종묘(宗廟), 사직(社稷)의 제사 때 쓰던 얼음을 보관하던 창고 터로 연산군 10년(1504) 동빙고동으로 옮겨졌음’이라고 새겨져 있다. 2000년에 건립된 사한단 터 푯돌에는 ‘조선시대 빙고(氷庫)에 얼음을 저장할 때와 꺼낼 때 수우신(水雨神)인 현명씨(玄冥氏)에게 제사를 지냈던 터. 얼음이 잘 얼게 해달라고 동빙제(凍氷祭)와 기한제(祈寒祭)를 지냈는데 1908년에 폐지되었다.’ 라고 적혀 있다. 두 푯돌의 공통점은 얼음이다. 금보다 귀한 얼음을 캐려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소중하게 보관한 흔적이다. 유감이라면 두 푯돌의 문구를 동시에 읽었을 때 비로소 용도와 기능이 이해됐다는 점이다.
푯돌 바로 옆에 옥수역 고가도로가 지나가는 흉한 공간이 있었다. 최근 성동구에서 고가 아래 ‘다락(樂)옥수’라는 공공문화공간을 마련했다. 얼음 창고를 닮은 낮은 단층 문화공간을 고가 아래 들이고, 건물 천장과 고가 사이에 스테인리스 스틸 재질의 조형물을 매달아 찬 기운을 아래로 갈무리하고, 더운 기운을 위로 날려버리는 효과를 시늉 냈다. 고가도로 아래 죽은 공간에 운동기구 몇 개 설치해놓았던 때보다는 확실히 나아졌다. 동빙고를 복원하거나 재연하지는 않았지만 ‘빙고골’이라고 했던 옛 분위기가 얼핏 느껴진다. 그런데 공간 어디에도 건물의 내력을 알리는 설명이 없다. 안타깝게도 아직 동빙고의 존재감을 느끼지 못하는 듯하다.
1950년대 말 2월 어느날 한강의 채빙 장면. 뒤에 한국전쟁 통에 폭파됐다가 복구한 한강철교가 보인다.
두 푯돌이 내뿜는 포스는 정면 달맞이봉 공원과 연결된다. 산을 에워싼 채 굽어보는 거대한 아파트단지 사이에 끼어 형편없이 쪼그라들었지만 돌출된 화강암반을 중심으로 범상치 않은 존재감을 나타내는 바위산이다. 옛날부터 남산, 낙산과 함께 정월대보름 달맞이 3대 명당 중 하나였던 달맞이봉과 그 아래 미타사라는 절집이 한강 동호의 명소 독서당과 동빙고의 명맥을 잇고 있다.
미타사는 ‘종남산 미타사’라는 편액이 걸려 있는 비구니 도량이다. 옛날에는 남산을 ‘목멱산, 인경산, 종남산’이라고 했는데 일상에서는 다 사라지고 절집 이름으로 남았다. 미타사 천불전 마당의 200년 묵은 느티나무 아래에 서면 비록 찢겨나갔지만 달맞이봉의 지형을 느낄 수 있다.
옥수동 달맞이봉 아래 신라 고찰 미타사가 주위 아파트단지에 포위된 채 고립된 모습이 안쓰럽다.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노주석 제공
서울 성저십리(성밖 10리) 지역 중 가장 바깥쪽에 있는 나루가 두뭇개 나루였다. 한강과 중랑천 두 강이 만난다고 하여 두물개(二水浦)라고 하던 것이 두뭇개, 두모포(豆毛浦)로 변한 것이다. 콩나물로 유명한 두모포는 일제강점기 행정구역 개편 과정에서 옥수동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옥정수’(玉井水)라는 이 동네 우물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종이 재료인 닷나무를 심었던 저자도는 왕실 재산이었기에 오염이 덜했다. 종묘와 사직 제사용 얼음을 채빙하는 장소로 적격이었다. 한강 동쪽의 호수 같은 강이라고 하여 동호(東湖)라고 하였고, 옥수동과 압구정동을 연결하는 두뭇개 나루에 다리를 놓을 때 동호대교라고 이름 붙였다. 한강진 서쪽 서빙고 옆 서빙고나루에 잠수교와 반포대교가 놓였다.
얼음 채취·보관은 6세기 신라 지증왕 때 기록이 <삼국사기>에 전해질 만큼 오래된 첨단 기술이었다. 서울의 빙고는 남쪽 지방 경주나 안동, 청도, 창녕, 현풍 등지처럼 석빙고가 아니라 돌과 나무를 혼합한 목빙고 형태로 지었다. 빙고는 동빙고, 서빙고와 대궐 안 내빙고 2곳 등 모두 4곳이 있었다. 동빙고는 제사용 얼음을 보관하는 격이 높은 저장 시설이었고, 서빙고 얼음은 왕실 종친, 높은 벼슬아치, 사대부 그리고 활인서의 환자와 전옥서의 죄수에게 나눠줬다. 왕이 내리는 시혜였다. 내빙고는 궁중용 얼음 보관 창고였다. 폭군 연산군은 1504년 장록수와 함께 놀 사냥터에 옥수동 동빙고가 포함되자 미련 없이 지금의 동빙고동으로 얼음창고를 옮겼다.
얼음을 채빙하고 운송, 저장하는 일을 장빙역(藏氷役)이라고 하였는데, 부역 중 최악의 고역으로 꼽혔다. 장빙역을 피해 달아나는 부역민들이 속출해서 ‘장빙과부’라는 말이 생길 정도였다. <동국여지비고>에 따르면 얼음은 저자도 근처에서 음력 12월이나 1월 중 새벽 2시쯤 길이 1척5촌(45㎝), 너비 1척(30㎝), 두께 7촌(21㎝)으로 한 덩이씩 떠냈다. 얼음 한 덩어리의 무게는 5관(18.75㎏)인데 세 덩어리를 묶어 지게에 지고 옮겼다. 얼음은 시신 보관용, 약재, 음식 등 다방면에 썼다. <경국대전>에는 얼음을 나눠주는 반빙(頒氷)의 대상과 기간, 수량이 기록돼 있다. 왕은 복날이면 ‘빙표’(氷票)라는 얼음 쿠폰을 총신에게 하사했다. 조선시대 빙표는 돈으로 살 수 없는 특권 중의 특권이었다.
얼음의 역사를 바꾼 사람이 조선 9대 성종의 형 월산대군이다. 관영빙고(동·서빙고, 내빙고, 지방 석빙고)를 뛰어넘는 개인용 사빙고(私氷庫)를 양화도(망원동, 합정동)에 설치했다. 망원동에 있는 망우정(희우정)은 예사 정자가 아니라 얼음을 보관한 대규모 얼음창고였다. 이 지역 주민 대부분이 장빙업에 종사해 부를 축적했다. 마포나루에 모이는 팔도의 고깃배에 얼음을 채운 빙어선 영업이 시작됐고, 서울 사람들은 남대문 칠패시장과 종로 시전, 동대문 이현시장에서 계절과 관계없이 살아 있는 생선을 사먹을 수 있었다. 쇠고기를 파는 현방(다림방), 돼지고기 가게 저육전도 얼음 덕분에 유통기간이 늘어났다. 장빙업을 둘러싼 경강 상인 간 이권 다툼이 그 어떤 업종보다 치열할 정도로 수지맞는 장사였다. 2012년에 개봉한 김주호 감독의 코믹사극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서빙고 얼음 털기를 다뤘는데, 실록에도 나오는 실화다. 현대판 은행 강도다. 한재림 감독의 2013년 영화 <관상>에도 로비용 얼음 한 덩어리가 등장한다.
<한국수산지>에 따르면 목빙고는 18세기 접어들어 흑석동, 노량진, 마포, 양화진을 중심으로 자리잡았다. 한강 북사면 강기슭 고지대를 파서 지하실을 만들고 지상에 나무 지붕을 설치했는데, 한강변 고지대 대부분에서 목빙고가 관찰됐다고 한다. 조선 후기 관영 빙고의 얼음 저장량은 20만 정(1정은 18.75㎏이므로 3750톤)으로 추량되는데, 사빙고의 얼음 저장량은 300만~500만 정으로 5만6250톤에서 9만3750톤에 이른다. 목빙고의 얼음 저장 능력이 석빙고에 비해 현저히 떨어지므로 저장한 얼음의 3분의 2가량이 녹아 없어진다고 가정하여도 서울 인구 30만 명 중 1명당 70~100㎏의 얼음을 소비했다는 계산이 나온다. 19세기 이후 얼음 사용량이 문명도의 지표로 사용된 것을 고려하면 서울 사람의 문명도는 당대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서울은 얼음 천국이었다.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 원장ㅣ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