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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년 사법고시 고배 뒤 진로 고민하다
작곡가 손석우 만나 우연찮게 데뷔
데뷔곡은 60년 ‘우리 애인…’ 아니라
61년 발표한 ‘목동의 노래’
재즈풍의 스탠더드 팝, 한 시대 풍미
유성기 음반 63~64년께 발매
최희준 1960년대 전성기 시절 중요 음반들.
한국 대중가요계의 큰 별이 졌다. ‘대중음악계의 신사’로 알려졌던 최희준(본명 최성준) 선생이 지난 8월24일 지병을 이겨내지 못하고 향년 82살로 영원한 이별을 고했다. 60년대 당시로서는 드물었던 서울대 법학과 출신 가수였던 그는 수많은 히트곡을 연달아 내며 1964년부터 1966년까지 동양방송(TBC)의 프로그램 <가요대상>에서 3연패와 1966년 신설된 문화방송(MBC)의 <10대가수상>에서 초대 ‘가수왕’에 등극하며 한 시대를 화려하게 풍미했다. 1936년 서울에서 태어난 고인은 57년 서울대 장기자랑 대회에서 법대 대표로 김광수 악단의 반주로 샹송을 불러 입상했다. 이후 ‘노래 잘하는 서울법대생’이란 입소문을 타면서 미8군 쇼 무대의 밴드 마스터 파피에게 소개되어 ‘쇼 보트’라는 단체에서 아르바이트 가수활동으로 짭짤한 수익을 올렸다. 58년 사법고시에 낙방한 그는 대학 졸업 후에 진로를 고민하다, 1960년 서울 명동의 어느 다방에서 비너스레코드를 창립해 음반 제작을 준비하던 작곡가 손석우를 만났다. 직업 가수가 되려는 마음이 없었던 최희준은 음반 녹음 제안을 받고 처음엔 망설였지만 결국 정식 데뷔를 결심했다. 이에 손석우는 본명 성준 대신 ‘항상 웃음을 잃지 말라’는 뜻으로 ‘희준’(喜準)이라는 예명을 지어주었다. 한명숙의 대표곡 ‘노란 샤스의 사나이’, 현미의 ‘밤안개’, 패티김의 팝송들과 더불어 최희준은 미8군 무대 출신 가수들과 함께 미국 재즈의 영향을 받은 ‘스탠더드 팝’ 바람을 선도하며, 트로트가 주류였던 가요계에 새로운 트렌드를 몰고 왔다. 당시는 목소리가 예쁘고 고운 ‘은쟁반에 옥구슬 굴러가는’ 꾀꼬리 가수들이 각광받던 시기였다. 최희준, 한명숙, 현미 등 미8군 무대 가수들은 삼베처럼 꺼칠꺼칠한 허스키 보컬을 구사해 음반 반품 사태가 나는 진풍경을 연출하기도 했다. 하지만 중저음 허스키 음색의 최희준은 개성 있는 보컬리스트 전성시대를 주도하며 한국 대중음악의 다양성에 일조했다. 최희준의 앨범은 대부분 전성기였던 60년대에 집중돼 있다. 1992년 <제1회 대한민국재즈페스티발 실황 앨범 2집>에 ‘맨발의 청춘’과 애창 샹송인 ‘고엽’(AUTUMN LEAVES)을 부른 것이 마지막 LP 앨범이다. CD로는 1995년에 데뷔 35년 기념 베스트 앨범이 발매되었다. 선생의 각종 부고 기사들을 보면 약속한 듯이 데뷔곡을 1960년 ‘우리 애인은 올드 미쓰’로 표기했다. 오류다. ‘우리 애인은 올드 미쓰’는 데뷔곡이 아니라 첫 히트곡이다. 노래가 발표된 년도는 1960년이 아닌 1961년이다. 최희준은 1961년 작곡가 손석우가 창립한 비너스레코드 10인치 LP로 제작된 1집을 통해 발표한 ‘목동의 노래’로 음반 데뷔했다.
최희준 ‘당신의 이름은 깍쟁이’ SP 유성기 음반 한나라레코드와 같은 노래가 수록된 도미도레코드 발매 LP음반. 1963~1964년.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그의 데뷔곡에 대한 논란의 불씨를 지필 음반이 하나 있다. 최희준이 음반 데뷔했던 1961년 당시는 SP 유성기 음반(78회전 음반)과 본격 제작이 시작된 LP 음반이 혼용되어 발표된 과도기였다. CD 제작이 본격화된 1990년 중반에 LP가 함께 제작되었던 것을 생각하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최희준의 ‘당신의 이름은 깍쟁이’와 한명숙의 ‘추억의 밤안개’가 함께 수록된 SP 유성기 음반은 도미도레코드의 서브 레이블인 한나라레코드에서 제작되었다. 이 유성기 음반은 수록된 노래들이 모두 다시 실린 도미도레코드 스플리트 LP로 미뤄 유성기 시대 끝자락인 1963~64년쯤 발매된 것으로 추정된다.
61년 서울 남산 한국방송(KBS) 스튜디오(지금 영화진흥위원회 시사회실)에서 열린 개국 쇼에서 화제의 신인가수 최희준은 첫 히트곡 ‘우리 애인은 올드미쓰’를 불렀다. 이후 1963년 ‘진고개 신사’, 1964년 ‘맨발의 청춘’ ‘빛과 그림자’, 1965년 ‘하숙생' ‘종점’ ‘길 잃은 철새’ 등을 연이어 히트시키며 가수 인생의 정점을 찍었다. 당시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바쁜 일정에 쫓겼던 그는 64년 자가용을 마련하면서 ‘마이카 1호 가수’가 되었다.
최희준 노래하는 모습 정동극장 단독콘서트 2002년.
60년대는 극장 쇼 무대의 전성기였다. 65년 최희준은 전남 여수 중앙극장에서 낮 공연을 마치려는데 객석에서 갑자기 ‘하숙생’을 불러달라며 연호했다. ‘하숙생’은 새롭게 시작된 KBS의 라디오 드라마 주제곡이었다. 여수 공연은 이 드라마 주제가가 나간 지 채 일주일이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최희준은 급히 녹음만 마치고 전국 순회공연길에 올라 가사를 외우지 못한 상태였다. 그런데 드라마 인기가 삽시간에 치솟아 열화와 같이 노래를 청하는 관객들로 인해 당황했다. 최희준은 여러 극장 공연에서 ‘하숙생’을 세 번 넘게 앙코르로 불렀을 정도로 노래에 대한 반응이 뜨거웠다. 당시 아무 방송이나 틀면 흘러나왔던 ‘하숙생’은 철학 전공 대학생들 사이에서 존재의 근원을 표현한 노래로도 통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좋아하는 남한 노래 가운데 하나로 꼽히기도 했다.
최희준 서울법대 졸업 사진과 1959년 최희준 냇 킹 콜 내한공연 때 기념사진.
최희준은 민요와 트로트 일색이던 60년대에 위키 리, 유주용, 박형준, 작곡가 손석우, 김기웅과 함께 ‘포 클로버스’라는 국내 최초의 노래 동아리를 결성해 밝고 건강한 가요 보급에 앞장섰다. 명문고·명문대 출신이라는 학벌 프리미엄으로 이름을 얻었던 이들은 비탄조의 트로트와 다른, 밝고 건강한 팝 스타일의 노래로 대중가요의 체질을 변화시킨 선구자들이다. 또한 멤버들 중 최희준과 유주용은 패티 페이지, 냇 킹 콜 등 세계적인 외국 가수들의 내한공연에 어김없이 찬조 출연했던 국가 대표급 가수로 존재감을 더했다.
1963년 패티 페이지 내한공연 때 ‘포 클로버스’로 찬조 출연한 사진과 음반들.
필자가 음반으로만 만나던 고인을 직접 만난 것은 96년 국회 출입기자 시절이다. 당시 그는 가수가 아닌 제15대 국회의원으로 변신했다. 과묵한 이미지였지만 다정다감했던 그가 노래하는 모습을 직접 본 것은 정계를 떠난 2002년 서울 정동극장 소극장 무대였다. 당시 밴드 ‘사랑과 평화’의 최이철이 연주를 맡았는데, 환상적인 케미로 관객들을 사로잡았다. 결국, 그 공연이 고인의 노래를 들었던 처음이자 마지막 무대가 되었다.
고 최희준은 1960년대에 국가 재건의 분위기를 북돋는 건강한 노래로 ‘딴다라’로 폄하되었던 대중가수의 품격을 높였다. 그는 최정상의 인기를 구가했던 대스타였지만 ‘찐빵’이란 별명으로 불릴 만큼 친숙한 이미지로 대중과 소통했다. 이제 고 최희준의 노래를 직접 들을 수는 없지만, 그는 어떤 장르의 음악을 시도해도 중심을 잃지 않았던 뛰어난 보컬리스트로 기억될 것이다.
글·사진 최규성 대중문화평론가ㅣ 한국대중가요연구소 대표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