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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때 252개 가게 완전 파괴
1대 임인식, 전후 부활한 점포 찍어
채소·생선에 PX 물품 판매 “활기”
남아 있는 ‘군복 골목’, 그 시절 흔적
2대 임정의, 남대문 도깨비시장 취재
불법판매 현장서 플래시 터져 곤욕
3대 임준영, “남대문 같은 오랜 역사
더 많이 발품 팔아 기록” 다짐
1953년 1대 임인식 작가가 찍은 남대문시장 그릇가게.
지난 7일 금요일 저녁, 남대문시장 칼국수 골목으로 허기진 손님들과 상인들이 몰려와 자리잡기 시작했다.
“이 골목? 40년은 한참 넘었죠.”
한 아주머니가 ‘딸칵’ 불을 올리며 골목길 나이를 말했다. 길은 온통 노르스름했다. 백열등 불빛 덕이었다. 청춘을 칼국수 골목에서 보냈다는 아주머니들이 분주히 국수를 삶고 꽁보리밥을 그릇에 퍼날랐다.
“서울 남대문시장 가면 박격포도 판다더라”
“6·25전쟁 끝날 무렵이죠. 1952년부터 아버지가 운영했던 대한사진통신사가 남대문시장 바로 옆에 있었거든요. 출퇴근하면서 남대문시장을 거치니 때마다 사진을 찍으셨을 거예요. 남대문시장은 서울 사람들의 삶의 현장이었죠. ‘생활 그 자체’였어요.”
2대 임정의(73) 사진가가 1대 임인식(1920~1998) 사진가의 흑백사진을 꺼내 보였다. 양곡판매소 간판이 큼지막한 가게 앞으로 사람들이 걸어다닌다. 마수걸이하는 상인들은 아침부터 분주하다. 말 그대로 “남대문시장에 가면 없는 게 없던” 때 이야기다.
1953년 임인식 작가가 찍은 숭례문 앞을 지나는 아낙네들.
서울시사편찬위원회가 펴낸 <서울의 시장>에 따르면 남대문시장은 6·25전쟁 때 큰 피해를 보았다. 전쟁 중 252개 점포가 완전히 파괴되었는데, 피난 갔다가 막 돌아온 50여 명의 상인들이 주변 노점상들과 힘을 합쳐 “지하실 위에 판자나 천막 조각”을 얽어 점포를 만들고 억세게 삶을 일궜다. 임인식 작가가 시장을 촬영한 1953년 무렵엔 폐허 속에서 150여 개 점포와 500여 개 노점이 부활해 있었다. 기적이었다.
“그 시절 쌀, 채소, 생선 그런 게 다 남대문시장에 있었죠. 동대문시장과는 성격이 조금 달랐어요. 남대문시장은 서울역과 시내가 가까우니까 외국인들도 많았고. 신세계백화점이랑 상권이 연결되잖아요. 신세계백화점 본점 자리에 미군 피엑스(PX)가 있었다고. 미군 부대에서 나온 군복, 담요, 텐트, 군화 등 군수품이나 밀수품이 많았죠. 군복이 질기고 튼튼하니까 몰래몰래 빼돌려 검정 물 들여 파는 거예요.”
서울역사편찬원이 펴낸 <근현대 서울의 복식>에 따르면 “당시 탈색과 염색집이 호황을 맞을” 정도였다. 군수품이 하도 많아서 “남대문시장에 가면 박격포도 살 수 있다”는 말까지 나왔다. “실제로 총알 빼고 다 있었던 것 같아요.”
지금도 남대문시장에 가면 50년대 흔적을 골목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깔끔한 팻말을 붙인 남대문시장 ‘군복 골목’은 외국인 관광객들이 기념품을 사러 자주 온다. 전후 피난민들이 자리잡아 순대와 빈대떡을 팔던 ‘떡장 골목’은 남대문시장 대표 먹거리인 호떡 좌판 거리로 명맥을 이어나갔다. “전쟁으로 서울이 쑥대밭이 되었지만, 사람들은 먹고살아야 하지요. 서민들 사는 거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죠.” 남대문시장은 늘 활력이 돌았다.
1953년 임인식 작가가 찍은 남대문시장 생선가게.
‘도깨비’들과 뛰어다닌 남대문시장 지하세계
한편 2대 임정의 작가에게 남대문시장의 기억은 그리 유쾌하지 못했다. 70년대 초반 <코리아헤럴드>에서 사진기자로 일할 때, 남대문시장 ‘지하 세계’ 취재를 다녔던 경험 때문이다.
“당시 외제 물건(수입품)은 판매가 불법이었거든요. 시계, 카메라 등등 통틀어 모두 ‘사치품’이라 하고, 밀수품도 많아서 경찰과 세관이 집중 단속 많이 했어요. ‘경찰이 뜬다’고 하면 상인들이 잽싸게 물건을 덮고 후다닥 사라졌어요. 워낙 사람이 많아 바글바글한데다가, 눈 깜빡하면 소매치기가 지갑을 훔치고, 정신없고 하니까 ‘도깨비시장’이라고 한 거죠.”
임정의는 어느 날 남대문시장 대도상가 지하 세계에서 운영하는 ‘도깨비시장’을 찍어오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한다. “양담배, 양주, 이런 걸 몰래 들여와 판다는 거예요. 살금살금 숨어 들어가서 사진을 찍는데, 그만 플래시가 ‘번쩍’ 했죠. 깡패들이 서너 명 몰려왔어요. 당신 뭐냐고!” 결국 붙잡혀 끌려가는 수모를 종종 겪었다. “나중엔 요령이 생겨서, 필름 넘기라고 하면 빈 통만 넘겨주고 모면하곤 했어요.”
남대문시장 권역의 차량 흐름도 바뀔 때였다. 1973년, 서울 시청과 숭례문 권역 땅속으로 서울 지하철 1호선 공사가 한창이었다. 임정의는 남대문시장 취재를 나간 김에 공사 현장도 덩달아 촬영했다. 남대문시장 지하 세계 사진은 ‘주먹들에게 뺏기거나 협박으로’ 남기지 못했지만, 남대문 ‘지하 사진’이 대신 남았다. “그래요, 난 70년대 남대문시장 지하 세계만 보고 돌아다닌 셈이죠. 지금도 남대문시장 지하에 가면 도깨비시장이 있을까요?”
외국인 관광 1번지, 오늘날 남대문시장
1973년 2대 임정의 작가가 찍은 서울 숭례문 권역 지하철 1호선 공사 현장.
3대 임준영(42) 작가와 남대문시장의 첫 인연은 80년대 중후반 ‘남대문 화방 골목’에서 시작됐다. “물감과 붓 구하는 게 편했거든요. 지금도 남아 있네요. 길이 많이 정돈됐어요.”
흙먼지가 폴폴 풍기던 길은 시멘트로 덮여 걷기 편해졌지만, 왠지 골목의 위세는 예전만 못해 보였다. 지게꾼들의 역할은 오토바이 배달꾼들이 대신하고, 주판알 튕기던 상인들은 이제 전자계산기를 두드리며 조금은 더 고상해졌지만, 일찌감치 폐점을 준비하는 상인들의 얼굴은 어둡기만 하다. 대형마트의 등장과 온라인 ‘직구’의 시대, 발품을 팔아 장을 보는 이들과 남대문시장 ‘도깨비’들은 3대 사진가 임준영의 프레임 속에서 사라졌다.
대신 오늘날 남대문시장은 외국인 관광객들의 관광 1번지로 이름 높다. 서울을 찾는 외국인 관광객 30%가 필수 관광 코스로 다녀간다. 남대문시장 화방 골목 부근에 좌판을 펼친 은발의 할머니는 45년 동안 남대문시장에서 장사했다며 한마디 보탰다. “가을 명절 맞으면 바람이 선선하고 시장이 예뻐요. 곧 사람들이 다시 장보러 몰려올 거야. 옛날부터 늘 그랬거든.”
남대문시장 들머리를 막 빠져나온 임준영이 야경 찬란한 숭례문 앞에서 말을 이었다. “서울에 오래 살았지만 여전히 잘 모르겠어요. 6·25전쟁 때도 조금 부서지고 말았던 숭례문이 오히려 현대에 들어 불이 나 소실된 적 있잖아요? 사진가들은 더 발품을 팔아 기록하고, 독자들에게 익숙하면서도 새로운 ‘뷰’(사진)를 보여줘야 한다는 부담과 의무가 생기는 것 같아요. 남대문시장처럼 오래된 서울의 공간을 돌아보니 더욱 그런 생각이 듭니다.”
2018년 3대 임준영 작가가 찍은 남대문시장 (Like Water 33). 임 작가가 작업하는 연작은 도시와 물이란 두 요소의 조화로 생명의 연속성을 전달하는 데 초점을 두고 있다. (@juneyoung_lim)
기획·글 전현주 객원기자 fingerwhale@gmail.com
사진 청암사진연구소, 임준영 제공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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