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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18년~기원후 475년
500년간 호령한 한성백제의 왕궁
흙성이 문도 없이 널브러진 형편
서벽은 1925년 홍수 때 완전 붕괴
몽촌·월성토성과 달리 평지 축조
경당역사공원 안에 백제 우물터
발굴 당시 200여 점 토기 발굴
63년 토성 내부 사적 미지정 ‘실책’
시, 4066억원 토지보상 나서기로
시, 4066억원 토지보상 나서기로
서울 송파구 풍납동 풍납토성 안 풍납백제문화공원 전경. 한때 미래지구라 했던 이곳에서 한성백제 왕궁의 풍모를 느낄 수 있다. 한성백제의 종묘 격인 경당지구와 지척이다.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노주석 제공
서울 송파구 풍납동 풍납토성 경당지구를 찾아 길을 떠난다. 풍성로15길 경당역사공원은 한성백제의 왕궁 풍납토성 안 신전 터다. 기원전 18년부터 기원후 475년 웅진(공주)으로 수도를 옮길 때까지, 500년간 잠실벌을 호령했던 한성백제의 영과 욕이 배어 있다. 서울에서 기원전의 고즈넉한 백제사를 느낄 수 있는 공간이다.
지하철 5·8호선 천호역 10번 출구로 나와서 광성교회를 지나 영파여중 사거리 쪽으로 직진하다보면 풍납전통시장이 나온다. 우회전하면 예상치 못한 풍경이 펼쳐진다. 시장 골목 오른쪽에 길게 드러누운 언덕이 끝없이 뻗은 이색적인 장면이다. 다른 한쪽 면은 예리한 칼로 깍둑썰기한 모양새다. 시장 골목이 중앙에 형성돼 있고 언덕 반대쪽은 다가구·다세대 주택과 연립단지가 잠실벌 롯데월드타워를 배경으로 빼곡하다.
왕릉의 도시 경주에서도, 고대 로마의 공회장(포로 로마노)에서도 보지 못한 괴이쩍은 풍경이다. 늙은 은행나무가 언덕을 호위하듯 가지를 늘어뜨린 품새도 범상치 않다. 찬찬히 살펴보면 언덕이 아니라 인간의 피조물이다. 흙으로 쌓은 성곽이 문도 없이 널브러져 있다. 풍납토성의 실체다. 풍납동을 감싼 길이 3500m, 너비 43m, 높이 11m의 거대한 토성은 여덟 토막으로 절단된 상태다. 토성은 천호대교 분기점에서 올림픽대교 분기점까지 드넓게 펼쳐져 있고 군데군데 길이 나 있다. 70여m 떨어진 몽촌토성을 감싸고 흐르는 성내천을 경계로 위쪽은 풍납동이고, 아래쪽은 성내동이다.
풍납 백제문화공원 기념탑.
풍납토성은 기원을 전후한 무렵에 처음 쌓기 시작해 늦어도 3세기쯤 지금과 같은 형태로 완공됐다. 이는 방사성탄소연대측정법과 열발광연대측정법, 광자극발광연대측정법 같은 과학적 절대연대 산출 결과다. 현재 동벽 1500m, 북벽 300m, 남벽 200m가 남아 있고, 한강 쪽 서벽은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완전히 유실됐다. 고구려의 국내성이 2600m, 신라 경주의 월성이 2400m인 것과 비교하면 웅장하다. 산이나 자연 구릉을 이용한 월성이나 몽촌토성과는 달리 평지에 쌓은 것이 특징이다. 풍납토성은 일제강점기인 1936년 토성 성벽만 고적 제27호로 지정해, 토성 안에 민가가 들어서는 것을 막지 못했다. 해방 후 1963년 사적 제11호로 지정하고, 1964년 성안을 발굴했지만 백제왕성이라는 확증을 찾지 못하고 방치했다. 1997년 ‘세 줄의 깊은 해자’ 즉 삼중환호와 조선 시대의 종묘처럼 지배층이 제사를 지내던 신전으로 추정되는 여(呂)자형 집터와 우물 등 유구와 수천여 점의 백제 초기 유물이 풍납토성 경당지구와 미래지구에서 쏟아져나왔다. 이전까지 풍납토성이 기원전 18년 온조가 도읍을 정한 하남위례성이라고 확신하지 못했다.
풍납전통시장길을 통해 한성백제의 왕도로 들어가는 길은 초라하다. 성 밖에서 성안으로 진입하는 기분을 느낄 수 없다. 성문도 없고 한쪽은 아예 성벽이 없다. 성이 아니라 그저 오래된 시장 골목에 접어드는 것 같다. 절단된 토성을 통과해서 직진하면 ‘바람드리 6길’이라 적힌 안내팻말이 나온다. ‘바람드리’란 풍납(風納)을 우리말로 옮긴 도로명이다. 강남의 랜드마크가 된 롯데월드타워를 보고 따라 걷다보면 곳곳에 발굴 현장을 알리는 공터가 눈에 띈다. 주민 보상이 이뤄져 이주하고 남은 집터다.
좁은 골목을 지나자니 별안간 앞이 트이면서 시골 학교 운동장만 한 공간이 나온다. 동네 어르신들과 아이들이 시간을 보내는 한가로운 풍경이다. 동아한가람·신성·극동·대동 아파트가 에워싸고 있어서 한눈에 보아도 아파트단지가 들어설 터인데 공원으로 남았다. 잠자던 백제의 혼을 깨운 경당역사공원이다. 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침공으로 한성백제의 수도가 함락당한 뒤 백제가 웅진으로 남하한 뒤 500년 이상 폐허였던 곳이다. 그 때문에 우리는 백제 700년 중 한성백제 500년은 까맣게 잊고, 웅진(475~538)과 사비(부여, 538~660)시대만 기억하게 됐다.
몇 개의 구역으로 나뉜 경당역사공원 한쪽에 우물 모양의 음수전과 낮은 푯돌이 눈에 띈다. 경당지구 제1구역 제206호 백제 시대 우물터다. 푯돌에는 “한 변 11m 정도의 방형(네모 형태) 공간을 3m 깊이로 파고 점성이 강한 흙과 모래를 교대로 채워넣어 기초부를 만든 후 그 중앙에 우물을 만든 특이한 구조이다. … 주변에서 발견된 도랑의 존재를 볼 때 단순히 식수를 확보하기 위한 우물이 아니라 물이 들어오고 빠지는 시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우물을 보호하는 건축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라고 적혀 있다.
우물의 형태나 제작 기법 등 모든 면에서 독특하고 특수하다. 발굴 당시 우물 바닥에는 200점이 넘는 토기가 5겹으로 채워져 있었고, 그 위는 돌과 흙으로 메워져 있었다. 대부분의 토기 입 부분을 고의적으로 파손한 흔적으로 보아 토기를 묻을 때 제사 행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우물의 연대는 출토된 토기를 볼 때 4세기 말이나 5세기 초로 추정된다. 우물의 바닥면은 나무를 이용해 네모지게 만들고 자갈을 이용해 수평을 맞췄다. 나무는 4단으로 쌓아올렸으며 그 위로 깬 돌을 쌓아올려 제일 윗부분은 둥글게 처리했다.
경당지구 제2구역 구덩이 밀집지구(경당지구 제101호)에서 쓰레기 폐기장 4곳이 겹쳐서 발굴됐다. 이 또한 단순한 쓰레기장이 아니라 제사를 지내고 난 뒤 사용한 그릇과 제사를 위해 희생된 동물을 묻은 곳이다. 말머리 뼈 9개가 한 구덩이에서 나왔다. 말은 소나 양과 달리 고대에도 제물로 쓰지 않은 귀중한 재산이었으니 이 신전의 위상을 엿볼 수 있다. <삼국사기>에 “구수왕 14년(227년) 가뭄이 들어 동명왕 사당에 제사를 지냈고…” “비류왕 10년(313년) 왕이 몸소 희생물을 베었다”는 기록과 일치한다.
제3구역 지상 건물터(경당지구 제44호)는 하늘에서 내려다봤을 때 여(呂)자 모양의 초대형 건물이다. 남쪽 전실은 동서 5m 남북 6m에 이르며, 북쪽 후실은 동서 18m, 남북 13m에 이르는, 지금까지 발견된 백제 건물터 가운데 사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크고 특이한 구조다. 건물을 둘러싸고 판 도랑에는 숯을 채웠다. 왕이 주관하는 제례 공간으로 파악된다.
풍납토성은 유적 보존과 사유재산권 행사의 갈림길에서 우왕좌왕했다. 1963년 사적 지정 과정에서 토성 내부는 제외하고 성벽만 지정한 정부의 명백한 실책에서 초래했다. 풍납토성 내부에 집을 마련한 사람들에게 무슨 죄가 있겠나. 1997년 이후 아산병원 기숙사와 외환은행 합숙소를 비롯해 신우연립·남양연립·삼화연립·경당연립 재건축과 미래마을, 삼표산업 신축이 줄줄이 무산됐다. 흥미롭게도 경당지구, 미래지구라는 호칭은 재건축조합의 이름이었다.
백제의 시조 온조가 기원전 18년 하남위례성을 세운 곳으로 추정되는 풍납토성 조감도. 문화재청 제공
문화재청과 서울시는 2009년부터 풍납토성 안팎을 건축 금지, 건축 제한 등 6개 권역으로 나눠 사유재산권 행사를 제한했다. 주민들은 유적 보존이라는 이름 아래 20년 넘게 고통을 당하고 있다. 다행히 서울시는 풍납토성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올리기로 하고, 지방채 발행 등 4066억원을 들여 토지 보상에 나서기로 했다. 백제의 고향 풍납토성은 서울이 가진 역사문화의 깊이를 살찌우는 호재로 작용할 것이고, 그동안 고통받은 주민들에게도 향토애의 현장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풍납토성에서 백제의 혼이 빛을 발할 날이 머지않았다.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 원장ㅣ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