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푯돌은 경운동에 있으나
서북학회 기록은 낙원동 주소
건물은 건국대 캠퍼스 안에
버젓이 존재, 85년 옛 자재로 복원
낙원동은 대한제국~해방 이후
대표적 대학가이자 정치 중심지
보성전문·건대·국민대·단국대가
서북학회 건물서 태동
서울시 종로구 낙원동에 있던 서북학회 회관은 1985년 광진구 화양동 건국대 캠퍼스로 옮겨져 복원된 뒤 등록문화제로 지정됐다. 지금은 설립자의 기념관이자 박물관이다.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노주석 제공
서울 종로구 경운동 47의 17 서북학회(西北學會) 터 푯돌을 찾아 떠난다. 지하철 3호선 안국역 5번 출구로 나와서 천도교 수운회관을 지나 낙원상가 쪽으로 내려가다보면 길가에 편안하게 앉아 있다. 판석형 푯돌에는 “서북학회는 대한제국 시대인 1908년에 국권 회복 운동을 위하여 평안도, 함경도, 황해도민이 조직한 애국계몽단체였다. 1909년 일제의 탄압이 가중되자 만주에 무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군 운동으로 전환시키는 데에 크게 기여하였으나 1910년에 강제해산되었다. 그 후 이곳에는 한때 오성학교, 보성전문학교, 건국대학교 전신인 정치대학이 자리하였다”라고 비교적 상세하게 새겨져 있다.
그런데 푯돌은 경운동에, 서북학회 옛터는 낙원동에 주소를 두고 있어서 마치 딴살림을 차린 듯하다. 서울시가 세운 공식 푯돌 위치와 서북학회 터를 알리는 주소가 제각각인 것이다. 푯돌이 있는 곳에서 낙원상가 쪽으로 내려와 인사동 접어드는 길목인 낙원동 282번지 일대 낙원동 건국주차장 자리가 옛 서북학회 터라는 기록 때문이다. 서북학회가 발간한 기관지 <서북학회월보>에 기록된 한성부 중부 교동 29의 2를 서북학회의 주소로 인정한다면, 지금의 낙원동 282번지가 푯돌이 서 있을 곳이다. 당시 같은 필지가 쪼개졌다고 하더라도 경운동 푯돌을 낙원동으로 옮기는 것이 맞다.
또 다른 문제는 푯돌 속 서북학회 건물이 광진구 화양동 건국대학교 캠퍼스 안에 버젓하게 실재한다는 점이다. 건물이 남아 있다면 푯돌이 있을 이유가 없다. 이 건물은 1976년 도시계획에 따라 1977년 해체됐으나, 옛 자재를 보관하고 있던 학교 측이 1985년 캠퍼스에 복원했다. 문화재청은 2003년 건물을 등록문화재 제53호에 올렸다.
푯돌의 정의는 사라진 옛터를 알리는 용도다. 푯돌 속의 옛 건물이 다른 곳에 복원돼 문화재로 등재된 것은 희귀한 사례다. 이 경우 옛 장소를 알리는 푯돌을 유지해야 할까? 푯돌을 그대로 둔다면 다른 곳으로 이전해 복원됐다는 내용이 반드시 포함돼야 한다고 본다. 또 건물이 있던 장소는 아랑곳하지 않고 복원한 건물을 문화재로 지정한 문화재 당국의 인식도 공감하기 어렵다. 해체된 문화재를 어렵사리 복원한 것은 평가할 만하나, 문화재 복원의 가치는 장소와 건물 그리고 기억이 삼위일체를 이룰 때 성립한다. 그것이 장소인문학이다.
서북학회가 있던 낙원동은 대한제국 시기부터 해방 이후까지 서울의 대표적 대학가이자 천도교 중앙대교당, 서북학회, 한국민주당(한민당·광복 직후 결성된 우익보수 정당) 등을 중심으로 독립의 피가 끓어 넘치는 정치의 중심지였다. 서울대학교가 들어선 뒤 혜화동이 대학로의 아성을 굳혔지만, 그 이전 원조 대학로는 낙원동이었다. 북촌과 인사동을 잇는 낙원동은 이후 종로가 ‘정치 1번지’가 되는 단서를 제공한다.
서북학회는 근현대 대학의 산실이자 요람이었다. ‘낙원동 교사’로 알려졌던 시절, 고려대학 전신 보성전문학교와 건국대학, 국민대학, 단국대학이 서북학회 건물에서 태동했다. 서울에 개량한옥을 남긴 ‘조선의 건축왕’ 정세권이 물산장려회관을 지어 조선물산진열관을 차린 것도 낙원동 300번지였다. 천도교 중앙대교당 옆 보성사에서 3·1독립선언서가 인쇄되고,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이 모였으며, 최초의 도시공원 탑골공원에서 만세시위가 발화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서북학회의 독립 염원이 영향을 미쳤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서북학회와 신민회는 사실상 일심동체였다. 독립전쟁 전략을 채택하고, 국외 독립군 기지 건설에 주력했다. 서북학회 임원들은 대개 신민회 발기인이었고, 서북학회 발기인 33인 역시 대부분 신민회 비밀 회원이었다. 교육운동은 일제하 민족운동의 원동력이었다. 학회는 서울에 살면서 지역에 연고를 둔 당시 지식인들의 자발적인 결사체였다. 겉으로는 교육을 통한 계몽운동을 표방했지만 속으로는 구국항일을 품었다. 교육운동 단체로 위장한 정치결사체였다. 신분제와 과거제가 사라진 새로운 세상의 질서에 적응하려는 몸부림이기도 했다.
강고한 지역정서가 흠결이었다. 서북 지방은 조선 500년 동안 차별과 수탈의 대상이었다. 그 때문에 신분 차별의 구분이 없고, 독립자활의 기풍이 강했다. 평북 정주 출신 독립지사 남강 이승훈은 “500년 학대가 가져다준 선물”이라고 설명했다. 다른 지역보다 빨리, 많이 유교를 버리고 기독교를 선택한 까닭에 대해 고려대 총장을 지낸 김준엽은 자신의 저서 <장정>에서 “근대 이후 서북의 기독교세가 가장 강했던 것은 기독교를 조선 통치 이념 유교에 대항하는 가치관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학회 결성 바람이 불었다. 평안도·함경도·황해도 출신은 서북학회를 결성했고, 전라도 출신은 호남학회, 경기도·충청도 출신은 기호흥학회, 경상도 출신은 교남교육회, 강원도 출신은 관동학회를 각각 운영했다. 이들은 서울에 본부를 두고 출신자들에게 서양식 교육을 했다. 안창호, 이갑, 박은식, 이동휘 등이 주도한 서북학회는 기존의 서우학회와 한북흥학회를 통합해 창설했다. 회원은 서북 사람으로 국권 회복을 원하는 2300~2500명이 참여했다. 서북학회는 전국 65곳에 교사 양성에 주안점을 둔 협성학교 분교를 세웠다. 심지어 북청 출신이 대부분인 물장수를 위한 수상 야학교를 운영하기도 했다.
서북학회는 모금으로 회관을 짓기 시작해, 1908년 33명의 공동 소유로 낙원동 282번지에 건물을 완성했다. 르네상스식 2층 벽돌 건물은 중앙 돔을 앉힌 탑실을 둔 것이 특징인데, 돌출된 중앙 현관부와 좌우 3개의 창호 배열 등 전체적인 구성은 당시 서울에서 가장 크고 웅장한 건물의 하나인 한성전기회사 사옥의 축소판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당시 보기 드문 현대식 건축물로 중국인 기술자가 동원되었는데, 우리에게 벽돌 건축물을 짓는 기술이 없었기 때문이다.
서북학회가 모금해 지은 낙원동 시절 회관. 연면적 400평 규모의 3층 벽돌 양옥은 개관 당시 장안의 화제였다.(왼쪽 사진) 서북학회가 1908년 2월부터 1910년 1월까지 매월 1일에 발간한 기관지 ‘서북학회월보’ 제1호 표지.(오른쪽 사진)
1910년 국권을 일제에 빼앗김과 동시에 서북학회는 폐쇄됐다. 그러나 건물은 천도교가 운영하던 보성전문학교와 협성학교와 협성실업학교 그리고 오성학교의 교사로 쓰였다. 건물의 유전은 1941년 태평양전쟁이 터지면서 일본 헌병대가 점령하면서 시작됐다. 해방 이후 조선공산당이 회관을 점거해, 인쇄기를 설치해 조선공산당 기관지 발행처로 쓰였다. 또 이승만을 도와 함께 정부를 수립했다가 야당의 길을 간 한민당의 본부 사무실로 쓰였다. 정치 1번지 신화의 탄생이다.
외도는 잠깐이었다. 이 땅에 깃든 학교의 유전자(DNA)는 사라지지 않았다. 이곳은 낙원동이기 이전에 조선 시대 교동이었고, 그전에는 향교동이었다. 장소의 역사를 바꿀 수 없었다. 고려 시대 한양 향교가 있어서 향굣골, 향골이라고 이르다 향교동을 거쳐 교동이었던 곳이다. 지금의 낙원동·경운동·종로2가와 3가·돈의동 일대이다. 학교터였기에 학교로 돌아갔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초등교육기관인 교동초등학교와 옛 덕성여자대학교 캠퍼스가 아직도 건재하다.
1946년 5월부터 이곳에 건국대의 모체가 된 ‘조선정치학관’이 개설돼 학생을 받았으며, 국민대학 설립기성회 임원들도 이곳에 자주 모여 현안을 논의했다. 1947년에는 교사 일부를 쓰던 단국대가 문교부 인가를 받아 정규 대학으로 발족하기도 했다. 3개 사립대학의 모태이다. 민중병원을 운영하던 건국대 설립자 유석창이 인수해 야간부와 법인의 사무실로 쓰다가 해체되기에 이르렀다. 건국대 캠퍼스로 옮겨진 서북학회 회관 건물은 현재 설립자의 기념관과 박물관으로 쓰인다.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 원장ㅣ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