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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서울시 기념물 제1호 지정
식재 시기는 조선 성종 때로 추정
죽은 시기 기록은 없어
500년 이상 살았던 것으로 보여
최근 재건축조합이 이전하려 했으나
서울시, 기념물 1호 의식해 불허
양잠업과 농업은 조선 산업의 양대 축
경복궁과 창덕궁에 비단 짜는 행사도
서울시 기념물 제1호인 500년 묵은 잠실리 뽕나무가 있는 서초구 잠원동 55의11 일대를 잠원로 반대편에서 바라본 모습. 아파트 재개발조합측이 이전을 추진했으나 서울시가 불허한 것으로 알려졌다.
서초구 잠원동 55의11 서울시 기념물 제1호 ‘잠실리 뽕나무’를 찾아 길을 떠난다. 죽은 지 오래돼 누렇고 앙상한 ‘원조 뽕나무’ 한 그루가 품은 사연 때문이다. 잠실리라는 지명에 현혹돼 송파구 잠실동과 헛갈리면 안 된다. 아파트 숲으로 변하긴 매한가지지만 ‘누에를 치는 방’이라는 이름만 남은 잠실과는 다르다. 지명의 명멸과 선점에 얽힌 흥미로운 이야기가 숨어 있다. 이 뽕나무의 생몰 연대는 왕실용 비단을 생산하는 서울 양잠의 기원과 종말을 알리는 열쇠다. 잠실리 뽕나무는 100만 평에 이르는 드넓은 뽕밭이었던 서초구의 지역 정체성을 밝혀주는 장소인문학의 곳간이기도 하다.
잠실리 뽕나무 찾기는 지하철 3호선 잠원역 4번 출구에서 시작된다. 역 벽면과 공간은 온통 누에와 뽕나무다. 이른바 ‘누에테마역’ 콘셉트로 꾸며져 있다. 역사가 일천한 서초의 전통을 강조하려는 몸부림처럼 보인다. 그러나 잠원역에서 잠실리 뽕나무 찾아가기란 ‘압구정동에서 압구정 찾기’만큼이나 쉽지 않다. 뽕나무를 만나러 나가는 지하철역 출구 안내는 물론, 그 흔한 안내 팻말 하나 없다. ‘서울시 기념물 1호’라는 말이 무색하다. 양잠업 홍보에만 열을 올릴 뿐 ‘양잠의 고향’을 찾아가는 길 안내는 빼먹었다. 구태여 찾을 필요도, 볼 것도 없다는 배짱처럼 읽힌다.
그래도 길을 나선다. 잠원역 4번 출구를 나서서 서초여성플라자를 지나 래미안 신반포팰리스 아파트단지를 끼고 돌다가 잠원동주민센터 교차로에서 나루터로를 따라 쭉 내려가면 된다. 길 건너편에는 신동중학교와 신동초등학교, 미주파스텔 아파트가 차례로 이어진다. 신동초등학교 삼거리와 잠원로가 만나는 지점에 한신16차 아파트 119동과 120동이 한강 전망을 가로막고 서 있다. 잠원역에서 1600m, 걸어서 30분 거리다.
한신16차 아파트 120동 앞이 잠실리 뽕나무의 집이다. 20평 남짓한 철제 보호망이 잠원로 쪽 보도를 절반쯤 차지하고 있다. 아파트단지 안도 아니고, 보행로도 아니다. 문지방에 엉덩이를 걸치고 엉거주춤 앉은 모양새다. 주인이 객으로 내쫓긴 격이다. 1982년에 심은 후계목 네 그루가 생명의 흐름이 멈춘 둘레 1.4m의 고사목(죽은 나무)을 둘러싸고 제법 깊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서울시에서 세운 유리 표지판이 있지만 햇빛이 반사돼 내용을 읽기 어렵다. 푯돌은 바깥 구석에 서 있다. 이 길은 사람 길이 아니다. 한남대교 남단 교차로를 드나드는 차량이 싱싱 지나다니는 신작로다. 푯돌 순례자가 지켜본 10여 분 동안 주민 2명이 지나갈 정도로 외지다.
서초구가 2002년에 세운 잠실리 뽕나무 푯돌엔 “조선 초기에 심어진 뽕나무로 서울시 지방기념물 제1호이며 이 일대는 조선 시대 뽕나무밭이었음”이라고 적혀 있다. 뒷면엔 뽕나무를 기준으로 앞으로 640m 가면 잠원나루 터가 나오고, 뒤로 1010m 가면 주흥동이 나온다고 안내도 해준다. 주흥동이란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마을이 떠내려가자 부호 김주용이 집 20채를 지어 이재민을 입주하게 했는데 주용의 ‘주’와 부흥의 ‘흥’을 따서 주흥동이라 했다는 마을이다. 전나무골이라고도 했는데, 지금의 고속버스터미널 뒤 서초구 반포1동 일대이다. 서울시는 행정구역 변화를 반영해 2008년 이 나무의 공식 명칭을 ‘잠실 뽕나무’로 바꿨다. 그러나 같은 장소에 있는 서초구 푯돌에는 여전히 ‘잠실리 뽕나무’라고 표기돼 혼란스럽다. 명칭을 바꿨지만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잠실리 뽕나무는 역사가 됐다.
잠실리 뽕나무의 생몰 연대가 불명확하므로 수령에 대한 언급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문화재청이 운영하는 국가문화유산 포털에 따르면 “언제 심어지고, 죽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조선 전기에 심어진 것으로 추측되어진다”라면서 “잠실리 뽕나무는 이미 죽은 상태이지만 조선 전기의 것이라 전해오는 유서 깊은 나무이며, 우리나라 누에치기의 역사를 살필 수 있는 중요한 나무이다”라고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관련 자료로 수령을 점쳐볼 수는 있다. 심은 때는 성종 때로 추정된다. <조선왕조실록> 성종 1년(1470) 기록에 “각 도에 잠실을 1개씩 설치했다”고 적혀 있다. 또 조선 중기의 문신 성현이 1499년부터 1504년까지 쓴 만물사전 <용재총화>에는 “요사이 또 설치한 신(新) 잠실은 한강 아래쪽 서쪽 동네 원단동에 있다”라는 기록이 나온다. 원단동이 지금의 잠원동 어림이다. 세종 때 뽕나무밭 조성은 서잠실 서대문구 연희동과 동잠실 송파구 잠실동을 지칭하므로, 성종 때 조성한 신잠실 잠원동보다 최소 50년 이상 앞선다. 세 곳 모두 관리가 파견돼 직접 뽕나무를 가꾸고 누에를 쳐 백성들에게 양잠 시범을 보였던 국립양잠소 격인 ‘잠실도회’가 있던 곳이다.
심은 시기는 그렇다 치더라도 죽은 시기에 대한 기록이 없다는 점은 한심하다. 무성한 잎을 자랑하는 1910년도 사진 1장과 1972년 사진밖에 남은 게 없다. 1972년 사진의 나무는 고사 상태로 보인다. 을축년 대홍수 때 이 일대 가옥이 다 떠내려간 것으로 보아 그때 뽕나무가 치명상을 입었다는 추측도 가능하다. 1973년 1월17일 서울시가 기념물로 지정할 때 고사 인지 여부도 확인되지 않는다. 상식적으로 죽은 나무를 기념물 1호로 지정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고사했더라도 그 가치가 떨어지지 않는다고 봤을 수도 있다.
지금의 잠원동 일대에 신 잠실이 조성됐음을 밝히고 있는 성현의 용재총화.
1972년 대한잠사회가 촬영한 잠실리 뽕나무. 이때 이미 고사한 상태로 보인다.
서울시 기념물 제2호가 700년 묵은 광진구 화양리의 느티나무이고, 제3호는 고려 강감찬(948~1031) 장군의 관악구 봉천동 낙성대 생가터다. 제4호 역시 강감찬 생가터의 13세기 제작 삼층석탑인 것을 보면 제1호의 의미를 만만하게 볼 수 없다. 1973년 지정 당시는 살아 있는 상태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따라서 막연하게 ‘조선 전기’ 혹은 ‘500년 이상’ 이라고 표현하는 잠실리 뽕나무의 최대 수명은 성종 1년에 심어 1972년까지 살아 있었다고 추정할 때, 502살이 되는 셈이다. 궁궐에 남아 있는 뽕나무 중 가장 크고 나이가 많아 천연기념물 제471호로 지정된 창덕궁 뽕나무의 수령이 400살에 불과하다.
이 나무가 잠실리 뽕나무가 된 배경은 의외로 단순하다. 1963년 강남 땅이 서울에 편입되기 전까지 이 지역이 경기도 시흥군 신동면 잠실리와 신원리였기 때문이다. 잠실동과 잠원동 두 곳 다 잠실리였다. 하지만 현재의 송파구 잠실동이 이름을 선점하자 중복을 피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잠실리의 ‘잠’자와 신원리의 ‘원’자를 합쳐 잠원동이라고 작명한 것이다. 최근 이 일대 재건축사업이 진행되면서 조합 측이 692㎡(210평) 규모의 공원을 조성해 잠실리 뽕나무를 옮길 계획을 세웠으나, 서울시는 이전을 허용하지 않고 현 위치에 보존할 방침이라고 한다. 안내 팻말도 없는 서울시 기념물 1호의 위력이다. 500년 동안 자리를 지키다 죽은 뽕나무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다.
잠실리 뽕나무와 4그루 후계목의 군락지.
조선 시대 양잠업은 농업과 함께 의복과 음식을 얻는 국가 산업의 양대 축이었다. 왕의 친경 제례 공간이 선농단이라면 왕비의 친잠 제례 공간은 선잠단이었다. <세종실록>에는 ‘경복궁 안에 뽕나무 3590그루와 창덕궁 안에 뽕나무 1천여 그루를 심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경복궁과 창덕궁에서 왕비가 직접 비단을 짜는 시범을 보이는 ‘친잠례’가 이따금 열렸다.
동잠실과 서잠실은 잠실의 명맥을 잇지 못했다. 송파구 잠실의 양잠 전통은 30여 년 전 주민들이 옛 부리도 자리에 생긴 잠실7동 아시아공원에 뽕나무를 심고, 해마다 음력 10월1일 제를 올리는 정도이다. 연희궁에서 쓸 비단을 조달했다는 연희동에는 어떤 흔적도 남지 않았다. 이에 비해 잠원은 잠실이나 연희동보다 50년 가까이 늦게 생긴 ‘후발 뽕밭’이지만 이 뽕나무의 존재로 말미암아 서울 양잠의 고향으로 이름을 올렸다. 죽은 뽕나무 한 그루가 거대한 메가시티 서울이 한때 양잠의 도시였음을 증명한다.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 원장l서울전문 칼럼니스트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