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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정선 등 조선 미술의 산실
잡기 다룬다고 천대, 터는 2곳이나
우정국 앞 푯돌이 자세하고 친절
인사동, 고미술 중심은 도화서 영향
예조 소속 종6품아문 관청 천대받아
한양이 상업도시로 변모하면서
그림 소유와 감상 욕구가 커져
번화가 광통교에 유통 시장 형성
청계천 복원 이후 본래 자리에서 상류 쪽으로 50여m 옮겨진 광통교. 도화서가 있던 을지로 입구에서 광통교~종각까지 한양 최대의 서화 시장이 열렸다.
조선 시대 미술의 산실이었던 도화서 터를 찾아 길을 떠난다. 도화서 푯돌은 두 곳에 있다. 서울시 공식 도화서 터 푯돌은 중구 을지로 2가 1의1 지하철 2호선 을지로 입구역 3번과 4번 출구 사이 내외빌딩 앞 보도에 있다. 또 한 곳은 종로구 견지동 39의 7 우정총국 앞 화단에 서 있다. 조계사 일주문에서 갑신정변의 무대인 우정총국 사이 50m에는 민영환 집 터, 전의감 터, 도화서 터 등 주요 장소의 역사가 중첩됐다. 조선 시대 도화서는 잡기를 다룬다고 하여 괄시와 모멸을 받았으나, 후세엔 이를 기리는 푯돌이 두 곳에 남은 게 아이러니하다. 권력은 쉬 사라지지만 예술의 향기는 오래가는 법이다.
도화서 터 푯돌은 왜 두 곳에 세워졌을까. 도화서는 조선 초기부터 17세기 중반까지 종로구 견지동과 공평동 부근인 한성부 중부 견평방, 지금의 우정총국 앞에 있었다. 800여 칸에 이르는 큰 규모의 관청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숙종(1676년)이 도화서 자리를 시집가는 누이 명안 공주에게 떼어주는 바람에 집도 절도 없는 떠돌이 신세가 됐다. 18세기 후반 남부 태평방 지금 자리로 옮긴 뒤 1894년 갑오개혁으로 폐지될 때까지 존속했다.
1783년부터 1881년까지 규장각 소속으로 도화서 상원 역할을 한 자비대령화원(임시로 뽑혀 왕의 명령을 기다리는 화원) 제도가 운영되었기 때문에 도화서 조직은 이원화됐다고 할 수 있다. 자비대령화원은 궐내 각사가 모여 있는 창덕궁 안에 대기하면서 왕명에 따라 어진(왕의 초상화)이나 행차도를 그리는 특별 업무를 했다. 궐 밖 예조 소속의 도화서와 궐 안 궁중 화원으로 분리된 셈이다. 도화서 화원 중 별도의 시험을 쳐 규장각 자비대령화원으로 선발되면 특별 대우를 받았다. 18세기 문예 부흥기를 이끈 김홍도와 이인문이 대표적이다.
우정총국 앞 도화서 터 푯돌에는 ‘도화서는 조선 시대 그림에 관한 일을 담당한 관청으로 한국 전통 회화의 요람이자 중심이 되었던 곳이다’라고 적혀 있다. 뒷면에 도화서의 이전 경위와 직제와 역할, 도화서가 낳은 인물 등을 상세하게 기록해놓았다. 이 푯돌은 2003년 12월 한국화 대기획 추진위원회가 서울시 문화예술진흥기금을 받아서 설치한 것이다.
인사동이 서화와 전적, 고미술의 중심지가 된 데에는 도화서의 영향이 컸다. 도화서가 소광통교 옆으로 옮겨온 뒤 광통교가 서화의 중심가이자 한양 최고의 번화가로 떠올랐다. 광통교는 지금의 신한은행(옛 조흥은행) 앞 사거리에 있었다. 현재의 광통교는 청계천을 복원하면서 상류 쪽으로 150m 옮겨놓은 것이다. 광통교를 4분의 1로 축소한 모형이 신한은행 앞에 놓여 있다.
을지로 입구 도화서 터 푯돌은 2002년 서울시가 세웠다. ‘도화서는 그림 그리는 일을 관장하던 조선 시대의 관아이다. 화가를 양성하고 보호할 수 있는 제도적인 기반을 마련하여 우리나라의 전통적 화풍을 형성하였다’라고 새겨져 있다. 겉보기는 대동소이해보일지 모르겠으나 두 푯돌은 설립 주체, 글씨체, 글씨 크기, 내용이 다르다. 서울시가 세운 것보다 민간에서 세운 푯돌이 유용하다는 느낌을 준다. 디자인이 깔끔하고, 내용도 이해하기 쉽고, 친절하다. 정면의 설명이 부족하면 뒷면을 참고하면 된다. 서울시 공식 푯돌은 어딘지 모르게 경직돼 있다. 동일한 관아에 대한 두 개의 푯돌이 혼선을 준다는 이유로 둘 중 하나만 선택하라면 서슴없이 우정국 앞 민간이 설립한 푯돌을 택할 것이다.
도화서 소속 직업 화가를 ‘화원’이라고 통칭했다. ‘화사, 화공’이라는 호칭도 많이 쓰였다. ‘화가’는 근세에 생긴 용어이다. 도화서는 기예를 천시하고, 기술직을 낮게 여기는 풍조 탓에 예조 소속 종6품아문 관청으로 위상이 아주 낮았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도화서의 직제는 종6품 별제 2명, 화원 20명, 생도 15명, 노비 7명, 표구를 담당하는 장인 2명 등으로 구성됐다. 이들은 법제상 6품 이상 올라가지 못하도록 잡직으로 신분이 제한됐다. 도화서 화원이 되는 취재 시험은 중인의 시험인 잡과에 속하지 않고 별도로 운영되다보니 잡과보다 한 수 아래로 취급됐다.
‘몽유도원도’를 그린 안견은 조선 초기의 대표적 화원이다. 안평대군의 비호를 받아 정4품 호군에 올랐으나 두고두고 미천한 화원 출신이라는 신분이 걸림돌로 작용했고, 후대의 벼슬길을 막았다. 이 밖에 겸재 정선,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 오원 장승업 등이 화원 출신이다. 15세기 성종은 도화서 화원 최경과 안귀생이 어진을 잘 그렸다며 당상관(종3품 이상)으로 승급시키려 했으나 ‘미천한 신분’을 이유로 신하들이 반대해 무산되고 말았다.
화원의 신분은 일률적으로 규정할 수는 없으나 의관(의사)이나 역관(통역사), 율관(법률가) 등 중인층과 혼인해 신분이나 직업을 세습하는 사례가 많았다. 17세기 이후 기술직 중인 가문이 형성되는 시기와 맞물려 화원을 가업으로 계승했다. 역관이자 서화 감식자로 유명한 위창 오세창이 화원들의 계보를 정리해 편찬한 <화사양가보록>에 따르면 조선 시대 활동한 45개 화원 가문이 소개돼 있다. 경주 이씨, 전주 이씨, 양천 허씨, 개성 김씨, 밀양 변씨, 해주 이씨, 인동 장씨가 있다. 이 중 인동 장씨는 200년 동안 화원직을 세습하면서 독점적인 서화 가문으로 번성했다.
‘전 김홍도 자화상’으로 알려진 작품.(평양 조선미술박물관)
김홍도는 당대 최고의 천재 화가였다. 스승 강세황은 <단원기>에서 “그의 그림은 옛사람과 비교할지라도 대항할 사람이 거의 없었다. 단원은 독창적으로 스스로 알아내어 교묘하게 자연의 조화를 빼앗을 수 있는 데까지 이르렀다”고 극찬했다. <단원기>에는 “그림을 구하는 자가 날마다 무리를 지어 비단이 더미를 이루고, 찾아오는 사람이 문을 가득 메워 잠자고 먹을 시간도 없을 지경”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하급 무반 벼슬아치를 배출한 중인 신분이었지만 37세 때 정조의 초상을 그리고 종6품 찰방 벼슬을 받았고, 연풍 현감에 제수됐다.
조희룡이 쓴 <호산외사>에 “김홍도는 그림을 그려달라며 보내온 3천 냥 중 진귀한 매화 한 그루를 2천 냥 주고 사고, 800냥으로 술을 두어 말 사서 매화 감상회를 마련하고, 나머지 200냥으로 쌀과 땔나무를 사니, 하루의 계책도 못 되었다”라고 적었다.
기인 장승업은 100년 전 화원인 단원 김홍도와 혜원 신윤복처럼 ‘나(吾)도 원(園)이다’라는 의미에서 오원이라고 호를 지었다. 김홍도와 신윤복에 비교해서 모자람이 없다는 자신감의 표현이다. 장승업의 화풍은 안중식, 조석진에게 계승돼 노수현, 이상범, 변관식 등 현대 화단으로 이어졌다.
‘실경산수화’를 개척한 대가 겸재 정선은 조선 최고의 부자 화가이자 종2품에 오르고 84세까지 수를 누렸으나 도화서 출신이라는 이력이 평생 그를 괴롭혔다. 정선은 그림을 총 400여 점 남겼는데, 당시 한다 하는 집안은 모두 그의 그림을 소장할 정도였다. 그림 한 점에 한양의 좋은 기와집 한 채 값을 호가했다고 한다.
단원과 자웅을 겨루는 문인화가 겸재 정선의 자화상으로 알려진 ‘독서여가도’.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노주석 제공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에 걸쳐 한양은 거대한 상업도시로 변모해갔다. 신분제는 흔들리기 시작했고, 주변부에 머물러 있던 중인, 상인, 농민들이 부를 축적하면서 양반이 독점하던 문화 예술의 형성과 소비에 가담했다. 새로운 감각의 생활 취미와 유흥 문화가 성행했다. 특히 18세기 후반 한양의 한복판 광통교 일대는 그림을 사고파는 시장이 생겨났다. 도시민의 문화적 욕구가 커지면서 그림 감상과 소유에 관심이 커졌다. 왕실과 사대부로 대표되는 상류층 문화가 확산되면서 한양 최고의 번화가였던 광통교 일대를 서화의 유통 공간으로 변모시켰다.
광통교는 육조대로~운종가~숭례문을 연결하는 정(丁)자형 도로의 중심이었다. 도성에서 축조된 다리 중 가장 큰 돌다리로 ‘소광통교’와 구분해서 ‘대광통교’, 길다고 하여 ‘광교’, 도성 내 6번째 다리라고 하여 ‘육교’라고도 일렀다. 광통교 위쪽 종루 일대에는 백목전(무명가게), 지전, 면자전(면화가게), 동상전(잡화점), 포전, 마상전(마구가게)이 늘어섰고, 아래쪽에는 칠목기전, 월외전(머리에 올리는 가발) 등이 진을 쳤다. 도화서는 국립병원인 혜민서, 궁중음악과 무용을 관장하던 장악원 등과 함께 광통교의 번성을 주도했다. 광통교 북쪽은 시전 상인, 남쪽은 화원·의원·역관 등 기술직 중인들이 모여 살았다. 중인들의 전성시대가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 원장ㅣ서울전문 칼럼니스트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