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래시장의 맛, 그곳에만 남아 있는 그리움 찾아서

숭인시장·강남영동 전통시장·돈암제일시장·청량리 전통시장·남성사계시장·영천시장 맛 탐방

등록 : 2018-12-20 14:47 수정 : 2018-12-20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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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 구경을 한 뒤 헛헛한 배를

달래줄 장터 음식이 그립다

세상은 변했지만 추억의 맛은 그대로

숭인시장 분식집

시장에 간다. 왁자지껄 난장판 속에서도 먹을 것을 몰래 나누어주던 손길이 그립다. 옥신각신 흥정 끝에 한 줌 얻어가는 덤도 그립다. 시장구경 다 하고 난 뒤 헛헛한 배를 달래주던 장터 음식도 그립다. 세상은 변했지만 시장에는 아직도 그리움을 품어줄 만한 것들이 남아 있다.

사라진 맛을 찾아서

종종 어떤 맛이 그립다. 서울시 동작구 흑석동 ‘흑석시장’에 있던 ‘정주분식’의 냉면과 국수의 맛이 그중 하나다. 재개발로 시장 일부만 남았다. 정주분식은 그때 없어졌다.

연탄불로 물을 끓여 면을 삶고 육수를 데웠다. 탁자 몇 개 놓인 실내도 있었지만 연탄 화덕이 있던 곳은 식당 밖 긴 의자와 긴 식탁이 놓인 곳이었다. 손님은 그 식탁과 의자를 나누어 썼고 아줌마는 그 안에서 국수와 냉면을 만들어냈다.


냉면 사발에 한가득 담긴 국수가 1천원, 냉면이 2천원이었다. 육수에 섞인 진하고 거친 양념장이 면과 잘 어울렸다. 육수와 면이 입을 풍요롭게 했다. 거칠게 감치는 맛이었다.

그 맛과 다르지만 그 느낌이 나는 냉면을 서울시 강북구 ‘숭인시장’에서 찾았다. 넓지 않은 공간에 채소전, 기름집, 공산품 판매점, 의류 매장, 생활 잡화 판매대, 식당, 음식을 파는 판매대 등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시장 안 한 분식집 냉면이었다. 그 집 내력도 43년이라고 한다. 인터넷 글을 보면 그 집 떡볶이는 추억의 맛 1순위다. 쫄면·잡채·김밥도 판다. 이 겨울에 팥빙수를 찾는 사람도 있다. 탁자 몇 개 놓인 실내도 있지만 긴 의자를 나누어 앉는 자리도 있다. 그것도 옛 정주분식과 비슷하다.

서울 강남구 논현동 빌딩 숲에 가려진 이면에 40여 년 동안 맥을 잇고 있는 재래시장이 있다. 전에는 영동시장이라 했는데, 지금은 ‘강남영동 전통시장’이라고 한다. 그 시장에 있던 만둣집이 없어졌다. 오랫동안 만두를 찌던 식당 앞에는 여러 가지 반찬이 놓였다. 반찬가게로 바뀐 것이다. 직장인들의 출출한 배를 달래고 입맛도 살려주던 만두였는데, 더 이상 만두를 만들지 않는다고 하니 그 집 만두 맛도 금세 그리워진다. 반찬가게와 떡집·기름집과 순댓국집·포장마차·과일·채소 가게가 뒤섞인 강남의 재래시장 한쪽이 허전하다.

특화된 시장들

서울시 중구에 있는 중부시장은 1957년에 국제시장으로 시작했다. 건어물 상가가 들어서기 시작한 때는 1960년대 중반이었다. 건어물 특성화 시장으로 전성기를 누리기 시작한 건 8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였다. 중부시장이라는 이름이 ‘중부·신중부시장’으로 바뀌었나보다. 안내판에 그렇게 소개하고 있다.

중부·신중부시장 골목

각종 건어물이 판매대에 가득하다. 멸치 골목, 굴비 골목 등 단일 품목 이름을 내건 특화된 골목도 있다. 주전부리, 안줏거리로 건어물만 한 게 어디 있겠는가! 일단 그 골목에 들어서면 뭐라도 한 봉지 사서 나오기 마련이다. 건어물 냄새에 취해 시장 곳곳을 돌아다니다가 ‘시장에서 건어물을 사서 맥주를 마실 수 있는 공간을 시장 안에 마련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안내판에 앞으로 그렇게 할 수 있게 만들겠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건어물 한 봉지 사서 시장 구경을 마치고 시장 바로 앞 유명한 함흥냉면집에서 겨울 냉면 맛을 보는 것도 좋겠다.

서울풍물시장 청춘1번지 이발소

세상을 떠돌다 시장으로 모인 온갖 물건들이 새 주인을 기다리는 곳, ‘서울풍물시장’도 볼만하다. 파는 사람도 그 물건에 얽힌 내력을 다 모를 테니 그 이야기를 상상하며 풍물시장 골동품을 돌아본다. 생활 잡화, 신상품 의류, 구제 의류 등도 1층과 2층에 걸쳐 즐비하다. 그중 ‘청춘1번지’라는 이름의 공간이 눈길을 끈다.

60~70년대 서울 상점·술집·다방·교실·문방구 등을 재현한 공간이다. 옛날 분위기의 이발소는 실제로 영업하고 있다. 무료로 교복이나 교련복 등을 입고 사진 찍는 곳도 있다. 잔치 같은 시장 구경 다 했으면 식당가에 들러 잔치국수로 시장기를 달래도 좋겠다.

그 시장의 그 맛

한국전쟁 중인 1952년, 미아리고개 아래 성북천 옆에 모여든 사람들은 먹고살기 위해 좌판을 깔았다. ‘돈암제일시장’은 그렇게 시작됐다. 1958년 문을 연 감잣국집이 성업 중이다. 50년 가까이 된 생선가게 옆에는 30년 넘게 직접 만든 찹쌀순대와 김밥을 파는 집이 있다. 뭉근한 불로 가마솥에서 끓이는 것은 손님상에 낼 선지가 들어간 우거지된장국이다.

돈암제일시장 순대와 김밥

시장 먹을거리로 빼놓을 수 없는 게 순댓국이다. 동작구 사당동에 있는 ‘남성사계시장’은 사람이 많이 찾아 활기가 넘친다. 사계는 사계절을 뜻한다. 시장길을 봄·여름·가을·겨울 네 구역으로 나누어 이름을 붙였다. 그중 겨울에 해당하는 골목이 먹자골목이다. 순대 요리를 파는 곳이 많다. ‘50년 전통’ ‘3대’라는 문구가 보인다. 생태탕·동태탕·황태 요리 등을 파는 식당도 있다. 가마솥에서 뽀얀 국물이 설설 끓는다. 뜨거운 김에 겨울 골목이 훈훈해진다.

남성사계시장 먹자골목

청과물시장 등 청량리의 거대한 시장 한쪽에 자리잡은 ‘청량리 전통시장’의 일부 골목을 통닭 골목이라고 한다. 통닭 파는 집이 모여 있기 때문이다. 시장 5번 출입구로 나가 오른쪽 좁은 골목으로 접어들면 청국장을 파는 식당이 몇 집 모여 있다. 구수한 청국장 냄새가 골목에 은은하게 흐른다. 직접 띄운 청국장을 화롯불에 끓여 먹던 옛 겨울 추억이 맛있다.

청량리 전통시장 통닭 골목

서대문구에 있는 ‘영천시장’은 한국전쟁이 끝나고 하천을 복개한 자리에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어 물건을 팔면서 시작됐다. 시장이 활기차다. 튀김·떡볶이·도넛·꽈배기·만두·찐빵 등 이른바 ‘시장표’ 단골 주전부리가 많다. 오래된 순댓집도 있다. 똬리를 튼 순대 옆에 ‘원조 48년’이라고 쓴 글이 보여 물어봤더니 장사를 시작한 지 48년 됐다고 한다. 30년을 넘게 순댓국을 파는 식당 안에는 유명인들과 찍은 사진과 사인이 많다.

먹을 것들이 넘치는 시장 좁은 골목에 헌책방이 숨어 있다. 시장 골목에서는 찾기 힘들고 큰길로 나가서 책방 입구를 찾는 게 쉽다. 장을 보다, 혹은 장거리 음식을 먹다, 골목책방에 들러 오래전 누군가가 마음을 다해 써내려간 책에서 마음에 남는 글 한 구절 만나는 것이 영천시장의 또 다른 맛 아닐까?

영천시장. 48년 된 작은 식당

글·사진 장태동 여행작가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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