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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이 연회와 음악 감상의 목적으로 덕수궁 안에 지은 정관헌 풍경. 1900년에 준공됐다. 커피는 우리나라에 소개된 지 100여년 만에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차의 반열에 올랐고 서울 시내에만 1만6000여개의 커피전문점이 생겼다.
“서울 최초의 커피 애호가는 고종이다. 기록된 사람들을 추적하면 그렇다. 1896년 아관파천 때 영추문을 지나 러시아 공사관에 도착한 대한제국의 황제는, ‘가배차’(커피)를 처음 만나 사색에 잠겼다. 그후 덕수궁에 돌아와서 ‘정관헌’(靜觀軒)을 짓고 커피 탐닉에 들어갔다.
1902년 경성에 들어선 ‘손탁호텔’은 러시아 공사 베베르의 처형 손탁(Sontag, 1854~1925?)이 고종에게 터를 하사 받아 운영했다. 최초의 호텔식 다방을 만들어 귀빈을 대접했고, 선택된 사람들만 커피를 마셨다. 현재 정동 이화여고 안에 그 터가 표석으로 남아 있다.
100여년이 지난 오늘, 커피 한잔이 당신 곁에서 모락모락 김을 올린다. 혹은 이미 한잔 음미하고 일터로 가는 중인지도 모른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2015년 한국인의 연간 커피 소비량은 1인당 428잔. 1주일에 10잔이 넘는 커피를 마신다는 계산이다. 한국인은 주식인 밥보다 커피를 더 마신다. ‘커피에 우유를 섞을 때, 우주가 생성된다’고 어느 천문학자가 말했는데, 누구였더라… 나직이 중얼거리는 이 순간, 에스프레소에 하얀 우유 거품을 섞는 바리스타의 손끝이 신성해진다. 거룩한 기분으로 건네받은 커피를 한 모금 삼킨다. 몸에 정오의 우주가 퍼져나간다.
덕수궁 정관헌에서 출발해 서울 골목 여기저기를 수색하며, 앞서간 이들의 커피 자국을 하나둘 모았다. 시대의 정서와 노래와 글들이 커피와 함께 분쇄·추출되어 흔적은 더없이 고요했다. 지도는 점으로 물들고, 점과 점을 잇는 일은 마치 별자리를 그리는 일 같았다. 땀을 식히고 남은 커피를 마저 삼킨다. 먼저 종로1가, 30년대 경성으로 안내한다. 글·사진 전현주 문화창작자
1930년대 모던 보이와 모던 걸들의 다방 커피 옳지 알았다 바로 그걸세 요즈음 서울 명물 카페의 걸 밤에 피는 네온의 불꽃 박쥐 사촌 누나 라 -<서울명물> 강홍식 노래(1935년)
1930년대 모던 보이와 모던 걸들의 다방 커피 옳지 알았다 바로 그걸세 요즈음 서울 명물 카페의 걸 밤에 피는 네온의 불꽃 박쥐 사촌 누나 라 -<서울명물> 강홍식 노래(1935년)
종로구 통인동 이상의 집 일부를 개조해 2009년 문을 연 이상의 집. 커피와 책이 있는 문화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눈부신 오후, 청진동 길목에 서서 동네를 바라본다. 1933년 경성(서울), 시인이자 건축가였던 이상은 이곳에 다방 ‘제비’를 열었다. ‘날개야 다시 돋아라. 한 번만 더 날아 보자꾸나’ 하고 아득한 방점을 찍는 단편 <날개>도 여기서 썼다. 이상이 커피를 좋아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커피를 팔고 싶어 했던 건 분명해 보인다. 이문이 없어 2년 후 폐업한 ‘제비’를 뒤로하고, 이상은 인사동, 명동, 종로의 광교를 오가며 다방을 개업했고, 폐업을 반복했다.
30년대 경성은 카페와 다방이 호황이었다. 식민지하의 개화를 발판 삼아 물 건너갔다가, 신 문물을 체험한 이들이 제 빛깔대로 공간을 꾸미고 마실거리를 팔았다. 예로 소공동의 복합문화공간 ‘낙랑파라’에서는 정기적인 문학 행사와 개인전을 열고 베토벤과 모차르트의 음악을 들려주었는데, 청춘 남녀들의 ‘힙한’(최신 유행) 문화공간으로 입소문이 났다. 이태준 등 ‘구인회’의 멤버들이 드나들었다.
유럽식 신문화를 이식하는 젊은이들과 이를 ‘무기력과 권태’로 바라보는 논설주간들의 비판이 교차하던 시절이었다. 일제의 민족말살 정책 아래 표현의 자유를 속박당하며 전시 체제 속 대도시는 기묘하게 뒤틀려갔다. 다방은 시국과 시름을 논하는 작은 탈출구가 되기도 했다. 다방을 타고 서울을 떠다닌 시인, 그의 공간을 잊지 못한 사람들이 여전히 서울에 있다.
계동 '물나무 다방'
30년대 경성, 그 시절 이상이 꿈꾼 다방의 모습을 모티브로 한 공간이다. 주인이 직접 발품 팔아 모은 1920~30년대 찻잔과 커피 기구들이 있다. 주문하자마자 원두를 볶아서 분쇄·추출하는 커피 맛이 특별하다. 주소: 종로구 계동길 84-3 문의: (02)318-0008 운영시간: 매일 11:00~24:00 명절 휴무
통인동 '이상의 집'
이상의 집 ‘터’ 일부에 자리한 문화공간. 2009년 문화유산국민신탁이 첫 보전재산으로 그 터를 사들였다. 이상과 관련된 책을 갖추고 동네 주민들과 방문객들에게 무료로 개방하니 자유롭게 열람할 수 있다. 주소: 종로구 자하문로7길 18 문의: 070-8837-8374 운영시간: 화~토 10:00~13:00, 14:00~18:00 / 일·월, 설·추석 연휴
1970년대
멜랑콜리한 도시인들의 믹스커피 한잔
커피 한잔을 시켜놓고 그대 오기를 기다려봐도
웬일인지 오지를 않네 내 속을 태우는구려
-<커피 한잔> 펄시스터즈 노래(1969년)
성수동 맥심 모카책방.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는 여유를 전하기 위해 마련된 장소다. 맥심 모카골드 믹스커피를 제공한다.
1969년 ‘커피 한잔’의 펄시스터즈가 엠비시(MBC) 가수왕 상을 받는다. 트로트가 주를 이루던 시절, 삼촌들은 신식 걸그룹의 등장에 속을 태웠다. 전후 미군 피엑스(PX) 등을 거쳐 암거래되던 인스턴트커피가 대중의 혀끝을 매혹한다. 70년대, 동서식품이 미국 제너럴 푸즈 사와 기술제휴해 한국 최초로 인스턴트커피를 생산했는데, 7년 뒤 세계 최초로 커피와 크리머와 설탕을 배합한 커피믹스를 출시한다. 커피믹스는 시장의 판도를 바꾸었다. 싼값에 바로 마실 수 있다는 점이 한몫했다.
커피뿐이 아니다. 본격 ‘아파트 시대’가 열리며 서울의 주거지가 급격히 획일화되었다. 소설가 박완서는 단편 <서글픈 순방>에서 집 없는 신혼부부의 절망을 통해 그 시기의 서울과 서울 사람들을 세세히 기록하기도 했다. 길목마다 빠르게 자판기가 들어서던 시절이었다.
80년대 올림픽을 앞두고 ‘다방’ 대신 ‘커피전문점’이라는 말이 쓰이기 시작했다. 1988년 압구정동에 최초의 커피전문점인 ‘자뎅’이 올라서고, 1999년 스타벅스가 이화여대 앞에 1호점을 연다. 자판기는 소란했던 과거와 뒤엉켜 밀려나고 에스프레소를 바탕으로 한 다양한 커피 메뉴가 신문화를 이끌었다. 뒤따라 브랜드 커피 시대가 열렸다. 2000년대 커피의 특별소비세가 없어지며, 한국인들은 머지않아 ‘밥보다 커피를 더 마시는’ 진기록을 세우게 된다.
성수동 '맥심 모카책방'
‘맥심’이 성수동 골목상권과 어울려 한시적인 팝업스토어를 오픈했다. 방문객들에게 맥심 인스턴트 커피를 무료로 타 준다. 1층과 야외 테라스에서는 커피와 책을, 2층에서는 문화 행사를 즐겨 본다. 5월27일까지. 주소: 성동구 성수이로7길 41 운영시간: 매일 11:00~20:00
혜화동 국립민속박물관 ‘추억의 거리’ 다방
1970~80년대 서울의 모습이 그립다면 국립민속박물관의 ‘추억의 거리’로 가면 된다. 약 50m 길이로 조성한 거리 다방에서는 옛 장식 그대로 7080세대 음악을 들으며 자판기 커피를 마실 수 있다. 예약해야 한다. 주소: 삼청로 37 국립민속박물관 운영시간: 10:00~11:30, 13:00~ 15:00, 16:00~16:30 / 화 휴무 문의: (02)3704-3114
2010년대
집돌이, 집순이들의 나만의 커피 한잔
사랑은 은하수 다방 문 앞에서 만나
홍차와 냉커피를 마시며, 매일 똑같은 노래를 듣다가 온다네
-<사랑은 은하수 다방에서> 10㎝ 노래(2011년, 인디뮤직)
오늘날 커피 문화는 어디까지 진화했을까. 애호가들은 생두의 ‘생산 가공 방식’에 주목한다. ‘스페셜티 커피’다. 스페셜티 커피란 미국 스페셜티커피협회에서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 인증한, 전 세계 커피 생산량의 상위 10% 등급의 커피를 말한다.
서울에도 스페셜티 커피를 파는 커피전문점이 본격적으로 생겨났다. 남다른 풍미 덕에 용산과 홍대 앞, 연남동, 상암동 등 스타 바리스타를 찾아 카페 순례를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20, 30년대 ‘끽다점(찻집) 순례자’를 자처하며 공간을 탐방하던 사람들이 ‘맛 순례자’로 변모한 격이다. 스타벅스와 이디야 같은 대형 프랜차이즈들이 자사 메뉴에 스페셜티 커피를 넣었다. 동시에 ‘빽다방’, ‘커피에 반하다’ 등의 프랜차이즈와 편의점들은 저가 커피를 추출한다. 때문에 커피마저 빈익빈 부익부로 나뉜다는 점이 산업계 이슈다. 이름난 동네 카페들은 상권의 변화와 자본력에 대항해 힘겹게 버티고 있는데, 인디그룹 ‘10㎝’의 노래로 유명해진 홍대 앞 ‘은하수 다방’은 높은 임대료를 감당 못해 작년 말 문을 닫아 문제가 되기도 했다.
커피의 고급화와 개인화가 진행되면서 커피를 마시는 장소도 다양해지고 커피를 만드는 기구들도 개인화가 진행되고 있다.
이 와중에 최근 몇년 사이 두드러진 ‘홈카페족’이 돋보인다. 집 한켠에 커피바를 마련해 나만의 커피를 즐기는 이들은 ‘저렴한 값과 색다른 맛’, ‘즐거운 취미 생활’을 즐기는 수단으로 ‘홈바리스타’를 자처한다. 이들을 겨냥한 제품군 출시도 본격화되고 있다.
돌아보면, 황제의 커피 한잔이 내 방으로 오기까지, 백여년의 시간이 걸린 셈이다. 2016년 5월 서울 시내 커피 전문점 1만7000개. 여기에 각 가정이 관리하는 ‘커피바’를 더하면 이 음료에 담긴 개인들의 사정은 얼마나 많은 걸까. 오늘날 서울은 정말 커피의 도시다. 커피 한잔에 담긴 당신의 이야기가 궁금하다.
보광동 '헬카페 로스터즈'
티브이엔(tvN) ‘수요미식회’와 허영만의 신작 <커피 한잔 할까요>에 등장하고 더 유명해졌다. 바리스타 두명이 매장에서 직접 콩을 볶아 내린 융드립 커피가 깊고 진하다. 매장 내 레코드판 음악도 명성이 자자하다. 주소: 용산구 보광로 76 운영시간: 평일 8:00~22:00 / 주말 12:00~22:00 문의: 070-7604-3456
논현동 '이디야 커피랩'
국내 토종 커피 프랜차이즈 ‘이디야’가 학동역 인근 500평 부지에 대형 커피연구소를 세웠다. 커피 문화와 재미, 휴식을 한번에 즐길 수 있도록 훈련된 전문 바리스타들이 손님을 응대한다. 빵도 인기가 좋다. 주소: 강남구 논현로 636 이디야빌딩 운영시간: 매일 07:30~02:00 문의: (02)543-64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