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규성의 LP 이야기

26년 만에 LP 신보 내는 현존 최고 음악 커플

가수 데뷔 40주년 맞은 정태춘-박은옥 커플

등록 : 2019-02-14 15:13 수정 : 2019-03-21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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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92년 장마, 종로에서’

8집 LP 발표 이후 처음 발매 예정

데뷔 40주년 기념해 신곡 등 수록

음악계로 돌아온 한국 포크의 거장

정태춘 박은옥 부부 공연사진, 1992년.

한국 대중가요계에는 시대마다 황금 콤비를 이뤄 대중의 사랑을 받았던 가수 커플과 가수-작곡가 커플이 많다. 현존하는 최고의 음악 커플인 정태춘-박은옥 부부는 1978년 같은 해에 가수 활동을 시작했다. 정태춘은 치열한 현실 의식과 뜨거운 작가 정신, 토속적 정서에 뿌리를 둔 서정의 미학을 구현한 아름다운 작품과 음반사전심의 철폐 운동 등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선 굵은 업적을 남긴 한국 포크의 거장이다.

가수 데뷔 40주년을 맞은 정태춘-박은옥이 남긴 발자취에 현재적 의미를 부여하는 앨범, 전시, 출판, 전국 투어 등 다채로운 작업이 잇달아 열린다. 사실 정태춘은 가수보다 작사·작곡자로 먼저 이름을 알렸다. 21살이었던 1975년 <골든 포크 앨범> 13집에 수록된 양병집의 ‘에헤라 친구야?’이 그의 데뷔곡이다. 이후 박은옥, 윤설희, 윤정하, 손미나, 남궁옥분, 조인숙, 이미배, 이수만, 양병집, 위일청 등 많은 가수들이 그가 만든 노래를 불렀다.

정태춘-박은옥 부부는 현재까지 13장의 정규 앨범과 여러 장의 베스트 앨범을 발표했다. 정규 앨범은 2012년에 발표한 11집이 마지막인데, 정태춘은 3집, 박은옥은 2집 이후인 1984년부터 공동 작업으로 앨범을 발표하고 있다. 다만 서사의 기운이 넘쳐났던 7집 <아 대한민국>(1990년)은 정태춘의 솔로 앨범으로 발표되었다. 7집은 카세트테이프와 시디(CD)로만 발매되었고, 8집 <92년 장마, 종로에서>(1993년)는 LP로 발매된 마지막 앨범이다.


정태춘 박은옥 부부, 서울 인사동, 2004년.

포크 가수 정태춘의 데뷔 음반

정태춘과 박은옥은 1975년 대마초 파동 이후 포크송의 열기가 시들해지기 시작한 한국 대중음악의 암흑기였던 1978년에 등장했다. 정태춘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실린 데뷔 음반은 서라벌레코드에서 1978년 8월20일 발매한 7인치 싱글이다. 이 음반에 수록된 ‘시인의 마을’과 ‘아하! 날개여’는 가수 정태춘의 데뷔곡이다. 소량 제작되었기에 지금은 무척 희귀한 고가의 음반이다. 정규 1집에 보름 앞선 10월20일에 발매된 음반이 하나 더 있다. 신인 여가수 장영희와 함께한 스플릿 앨범에서 정태춘은 ‘섬마을’ 등 5곡의 창작곡을 발표했다.

정태춘 데뷔 초기 곡이 수록된 LP 음반들.

주류 가요계와 거리를 두기 시작한 정태춘

정태춘 1집의 ‘시인의 마을’과 ‘촛불’ 등은 전원적 삶에 대한 그리움이 짙게 배인 명품 포크송이었다. 1979년 MBC 신인가수상, TBC 방송가요대상 작사 부문 수상은 당대 대중이 그의 구수하고 서정적인 가락에 얼마나 많은 공감대를 형성했는지 증명한다. 정태춘의 페르소나인 박은옥은 공식 데뷔 이전에 부산 등 다운타운에서 통기타 가수로 활동했다. 데뷔부터 지금까지 오로지 정태춘이 만든 곡만 노래해온 그녀는 1집을 통해 ‘회상’ ‘윙윙윙’ 등을 히트시키며 존재감을 얻었다. 정태춘은 일부 수록곡에서 코러스를 맡아 훗날의 환상적인 듀엣 작업을 예고했다. 1980년 발매된 박은옥의 2집 초반은 희귀 앨범이다.

음악 작업으로 교감한 두 사람은 1980년 5월 결혼했다. 달콤한 결혼 생활과는 달리 데뷔 음반부터 가해진 노랫말에 대한 ‘공륜의 심의보류 조치’는 정태춘의 창작욕을 옥죄었다. 또한 지상파 텔레비전의 <명랑운동회> 같은 오락 프로그램 출연을 강요당했던 방송 환경은 정태춘에게 고통을 안겨주었다. 이에 인기에 연연하기보다는 자신만의 음악에 천착하며 주류 가요계와 차츰 거리를 두고 자신만의 음악을 구축하기 위한 탐구와 시도에 더욱 몰입했다.

시인이 되고자 했던 자아를 담은 초기 앨범들

정태춘 박은옥 독집 LP 음반들.

첫 독집의 상업적 성공에 고무된 제작사는 차기작의 곡 선정과 제작 일체를 신인 가수에게 맡겨버렸다. 1980년 발매된, 암흑 속에서 기타줄 튕기는 정태춘의 모습이 담긴 2집 재킷은 음악에 큰 변화가 생겼음을 알리는 시그널이었다. 전작의 상업적 성과에 미치지 못했지만 2집은 노래하는 시인이 되고자 했던 정태춘의 자아를 중심으로 자신만의 음악적 색채 찾기를 탐구한 결과물이다. 불교적 분위기가 강력한 이 앨범은 젊은 날의 정태춘이 추구했던 음악 세계를 선명하게 드려낸, 숨겨진 한국 포크의 명반으로 재평가받고 있다.

음반의 상업적 실패로 치른 혹독한 대가

2집의 실망적인 상업적 결과에 굴하지 않았던 정태춘은 더욱 자신의 음악 세계 구축에 천착했다. 3집에서는 국악과 양악의 음악적 상관관계에 대한 실험을 시도했다. 작품은 의미심장했지만 상업적 대가는 처참했다. 그로 인해 3집은 데뷔 싱글과 더불어 음반수집가들이 가장 탐내는 희귀 앨범이 되었다. 연이은 상업적 실패로 제작사까지 경영난에 허덕이게 되면서 정태춘은 이후 몇 년간 앨범을 발표하지 못했다. 노래를 부를 무대도 급감했다. 경제적 궁핍이라는 불청객을 맞이한 정태춘은 이후 부당한 사회 현실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지닌 노래로 변화한다. 그의 음악에 서정과 서사를 넘나드는 양극의 질감이 공존하는 이유이다.

부부의 공동 작업으로 부활

정태춘 박은옥 80~90년대 공동 작업 LP 음반들.

생활고에 시달렸던 정태춘과 박은옥 부부는 지구레코드와 4년 전속에 800만원이라는 굴욕적인 계약을 맺게 된다. 공동 앨범으로 발표한 4집은 위기를 기회로 역전시키며 재기의 발판을 마련해주었다. 경제적 빈곤에서도 신뢰를 잃지 않았던 두 사람의 듀엣곡 ‘사랑하는 이에게’는 힘겨운 시간을 겪는 모든 연인들을 위한 헌사가 되었다. 이 노래는 1980년 박은옥 2집에 먼저 실렸지만, 듀엣곡으로 생명력을 얻었다. 이후 정태춘 박은옥은 1985년 5집과 1988년 6집에서 더욱 역동적인 민요적 선율과 창법을 선보였다.

1990년 7집 <아 대한민국>은 비합법 카세트테이프로 발매되었다가 1996년 합법적 CD로 재발매된 역작이다. 1993년 사전 심의를 거부하고 발매한 8집은 서사와 서정을 합체한 민중가요의 새로운 음악 어법을 제시한 이들 부부의 최대 명반이다. ‘창작·표현의 자유 만세’라는 붉은 스티커를 찍은 이 LP 재킷의 구호는 음반 사전심의 철폐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켰다. 2017년 LP로 재발매된 정태춘 1, 2집에 이어 40주년 기념으로 발매될 신보 <사람들 2019>에는 모처럼 신곡과 더불어 LP로도 제작된다는 반가운 소식이다.

글·사진 최규성 대중문화평론가ㅣ한국대중가요연구소 대표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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