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규성의 LP 이야기

매주 토요일 오디션 문전성시…이문세도 떨어져

1970~80년대 포크 음악의 또 다른 산실 쉘부르 下

등록 : 2019-03-28 16:11

크게 작게

명동으로 옮긴 뒤 라이브 클럽

100원 내고 이종환 앞에서 오디션

이문세 여러 번 낙방, 남궁옥분 3수

아트 포크 김두수도 ‘쉘부르’ 출신

쉘부르 무대에서 노래하는 포크 가수 남궁옥분. 1978년. 남궁옥분 제공

종로 시대를 마감한 음악감상실 쉘부르는 명동으로 이전하면서 전성기를 누렸다. 1970년대 중반 서울 명동은 ‘쉘부르’ ‘오라오라’ ‘가젤’ ‘PJ’ 등 통기타 라이브 클럽들이 성업했다. 명동 시대를 대표하는 가수로는 종로 시대의 쉐그린, 권태수, 채은옥, 김세화를 비롯해 전영, 남궁옥분, 하덕규, 강영숙, 박영일, 강은철, 박강성, 김두수, 최성수, 강승모, 신형원, 변진섭, 양하영, 강영철, 신계행, 김승덕, 박진광, 윤태규, 한승기 등이 있다. 포크 가수뿐 아니라 조갑출이 리드했던 밴드 ‘25시’도 명동 쉘부르에 고정 출연했다.

음악감상실 성격이 강했던 쉘부르는 명동으로 옮긴 후 라이브 클럽으로 체질을 개선해 정기적으로 오디션을 보기 시작했다. 토요일 오후마다 명동 쉘부르는 통기타 한 대 달랑 메고 찾아온 무명 가수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무대에 서기 위해서는 이종환 앞에서 통기타를 치며 노래하는 오디션 통과가 필수였다. 당시 오디션에 참가하려면 참가비 100원을 카운터에 있는 ‘미스현’에게 내고 신청서를 받아 제출했다.

지하의 명동 쉘부르에 들어서면 입구 왼쪽에 기타 10대를 보관하는 수납장이 입장객들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오디션은 총 13개의 전구 중 10개에 불이 들어와야 1차 관문을 통과했다. 13개 모든 전구가 켜지면 박수와 환호성이 터졌다. 최종 합격자는 거금 3만원(당시 대졸 초봉이 7만원)을 상금으로 받았다. 이문세도 명동 쉘부르에 여러 번 찾아와 오디션을 봤지만 끝내 무대 시간표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이처럼 이종환의 주관적 평가로 실력이 있어도 오디션 문턱을 넘지 못한 가수들도 많았다.


명동 쉘부르 출신 가수들의 LP들.

쉐그린에 이어 권태수가 진행을 이어받은 명동 쉘부르에서는 날마다 월 숫자가 쓰인 탁구공 12개, 일 숫자가 쓰인 탁구공 31개가 담긴 바구니에서 무작위로 공을 뽑아, 그 날짜가 생일인 손님에게 맥주와 안주를 서비스로 제공하는 행사가 인기를 끌었다.

주병진은 종로 시대 허참의 뒤를 이어 명동 쉘부르가 배출한 개그맨이다. 그는 오디션 인터뷰 무대에서 탁월한 유머 감각을 발휘해 사회자로 뽑혔다. 당시 TBC의 김웅래 프로듀서(피디)가 방송의 개그 코너 출연자를 섭외하다 소문을 듣고 찾아와, 1977년 주병진은 방송에 진출했다. 가수로는 1978년 TBC 해변가요제에 누나 주선숙과 듀엣으로 나와 본선까지 진출했다.

1977년 10월 단순히 상금을 타보려는 가벼운 마음으로 오디션에 지원했던 창작노래 동아리 ‘참새를 태운 잠수함’의 남궁옥분은 세 번째 도전 끝에 합격했다. 당시 명동 쉘부르에는 선머슴 같은 외모의 포크 가수 전영이 새로운 스타로 떠올랐다. 본명이 전미희인 전영은 여고 졸업 후 이곳에서 활동을 시작해, 데뷔곡 ‘어디쯤 가고 있을까’를 발표해 돌풍을 일으키고 있었다. 남궁옥분도 이후 1981년 KBS 신인가수상, 1982년 MBC 10대가수상, KBS 여자가수상 등을 받으며 명동 쉘부르를 대표하는 가수로 성장했다.

지방으로 떠나기 전 고속터미널에서 남궁옥분과 쉘부르 동기 김백숙, 전영과 그의 친구(좌로부터) 1979년.

1980년 추계예대를 중퇴한 하덕규는 화실을 경영하며 틈틈이 작곡도 했다. 그는 명동 쉘부르에서 진행한 노래자랑대회에서 3전 4기 도전 끝에 한가한 낮 시간을 배정받았다. 이후 동창생 오종수와 ‘시인과 촌장’을 결성해 1집을 냈지만 가요계의 분위기에 쉽게 적응하지 못했다.

하덕규 솔로 1집의 ‘슬픈 재회’는 반드시 언급해야 할 명곡이다. 반응을 얻지 못했던 이 노래는 남궁옥분이 제목을 ‘재회’로 변경해 다시 불러 차트 정상에 올랐다. 앵무새처럼 히트곡만 강요했던 방송 현실에 갈등했던 남궁옥분에게 재기의 원동력이 되었고, 하덕규도 음악 활동을 재개할 계기를 마련해준 노래다.

배문고를 다녔던 고등학생 강승모는 통학길에 쉘부르에 전시된 출연 가수들 사진을 보며 가수의 꿈을 키웠다. 고등학교 졸업 후 참가한 오디션에서 송창식의 ‘가위, 바위, 보’와 이은하의 ‘겨울 장미’를 불러 통과했다. 이종환을 대부로 대했던 강승모는 ‘창밖의 여자’를 부를 때면 ‘조용필보다 더 조용필스럽다’는 평을 들었다. 그는 1984년 데뷔 음반에서 조용필과 흡사한 창법에 여성스러운 창법을 더한 ‘무정 블루스’를 빅히트시켰는데, 일부 사람들은 조용필의 신곡으로 착각했을 정도였다.

최성수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1978년, 명동 쉘부르에서 가수 활동을 시작했다. 무명 시절 그는 쉘부르에서 노래는 기본이고 업소 입구에서 손님들을 90도 각도로 인사하며 맞이했고 음악실 디제이까지, 힘든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1986년 KBS 가요대상 신인왕 후보, 1988년 MBC와 1989년 KBS에서는 10대가수상을 받으며 스타덤에 올랐다. 그의 노래는 주류와 언더그라운드, 성인과 청년 취향의 경계에 있는 음악으로 평가할 만하다.

연극배우를 꿈꾸며 중앙대 연극영화과로 진학한 박강성은 목표를 수정해 1982년 MBC 신인가요제에서 대상을 차지했다. 뛰어난 가창력을 갖고 있었지만 쉘부르 등 다운타운의 라이브 카페에서 오랜 기간 무명 가수의 설움을 겪었다. 종로 시대에 관객으로 가수의 꿈을 키웠던 강영철은 오디션에서 두 번 낙방한 끝에 통과했다. 그때 쉘부르에서 양하영을 만나 혼성 듀엣 ‘한마음’을 결성해 한 시대를 풍미했다.

아트 포크 뮤지션 김두수도 1982년 서울 명동의 PJ살롱, 쉘부르 등에서 무명 통기타 가수 생활을 시작했다. 명곡 ‘가을 사랑’의 신계행도 명동 쉘부르 출신이다. 1985년 대성음반에서 발매한 옴니버스 앨범 <별들의 속삭임>을 통해 ‘가을 사랑’ ‘사랑 그리고 이별’을 발표하며 인기 가수의 반열에 올랐다. 가수왕에 등극한 변진섭까지 배출한 쉘부르 출신 가수들은 다른 업소에서는 오디션 없이 무대에 오르는 특혜를 누렸다.

명동 쉘부르 무대와 명동 이전 광고 1975년

남궁옥분은 “쉘부르의 가수 대기실은 1평 반 정도로 좁았다. 가수들은 무릎이 맞닿은 채로 서로 기타 코드를 봐주고 줄이 끊어지면 기타를 빌려주는 끈끈한 동료애가 있었다”고 기억한다. 실제로 명동 쉘부르 가수들은 정신없이 바쁜 크리스마스이브나 연말 특수에는 자발적으로 주방에서 안주까지 만들었고, 유일한 업소 휴일인 6월6일 현충일에는 단체로 강원도 강릉 경포대 등으로 야유회를 떠났을 정도로 끈끈했다. 고 이종환의 음악에 대한 애착이 담긴 라이브 카페 쉘부르는 70~80년대 무명 통기타 가수들의 등용문으로 평가받는다.

글·사진 최규성 대중문화평론가ㅣ한국대중가요연구소 대표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맨위로